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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영화 <암살>, 혹은 역사에 대한 성찰

by 낮달2018 2019.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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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

▲ 비록 허구를 다루고 있는 활극이지만 이 영화는 역사를 성찰하게 해 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누적 관객 800만을 넘겼다는 영화 <암살>을 본 것은 개봉 다음 주 월요일이었다. 지난 1월에 임시정부 노정(路程)을 답사하느라 상하이와 항저우를 다녀왔고, 몇 달에 걸쳐 답사기를 쓰느라고 진을 뺐지만 나는 임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에 대해선 달리 특별한 무엇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역사는 허구보다 때론 훨씬 비루하다

 

<타짜><도둑들>을 연출한 감독이니 그의 솜씨를 의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감독의 시나리오가 여러 해를 넘겨서 묵힌 곰삭은 것이었다는 기사를 거듭 읽으면서 나는 그가 버무려 낸 이 영화를 의심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특별한 무엇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배경과 역사적 상황을 빌려왔을 뿐 영화가 한편의 잘 짜인 허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구는 실화에 비해 훨씬 극적이고 훨씬 비장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영화는 역사적 사실성(事實性)과는 일정하게 멀어지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실제의 역사는 때로 허구보단 훨씬 비루하기 쉽다는 얘기다.

 

두 시간을 훌쩍 넘기는 영화는 매우 흥미진진했다. 예상대로 등장인물 가운데 실존 인물은 백범 김구와 약산 김원봉뿐, 나머지는 죄다 허구의 인물이었다. 암살 작전을 입안하는 대목에서 다소 엄정한 현실감이 드러났을 뿐 작전이 시작되면서 이내 영화는 시원한 활극으로 바뀌어 갔다.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다소 무리한 사건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감독의 의도대로 풍성한 이야기를 엮어가며 진행된다. 그리고 결과론이긴 하지만 그것은 생소한 역사적 사실을 매우 효과적으로 전하면서 관객들에게 전혀 생뚱맞지 않게역사를 성찰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 김원봉(조승우 분)은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분단 이후, 잊힌 이름이 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유념해 보도록.

역사는 그것과는 다른 길로 진행되었으니까…….”

 

역설의 역사를 성찰케 하는 영화

 

그게 영화를 보고 나서 본교의 아이들에게, 방송고의 중년 학생들에게 이 영화를 강추한 이유다. 영화는 한 편의 신나는 활극이 제공해주는 카타르시스 못지않게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게 해 준다. 그리고 대단원에서 보여주는 반전을 통해 꼬여버린 역사의 역설을 환기해 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운명처럼 그 시대에 맞서 싸웠고 버텼다.

어떤 이는 이름을 남겼지만 어떤 이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고

하물며 삶의 이야기도 남기지 않았다.”

    - 최동훈 제작노트중에서

 

영화에 몰입하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사실과 허구의 무게를 저울질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임시정부 장면이 촬영되었다는 자싱(嘉興)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피난 시절의 백범과 임정 요인들을 생각했다. 작전을 앞두고 찍은 기념사진, 선서문을 목에 걸거나 폭탄을 손에 쥔 대원들의 모습에서 1930년대를 연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를 겹쳐 보고 있었던 것이다.

▲ 마지막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대원들. 비장하지도 엄숙하지 않은 것도 이 영화의 미덕 중의 하나다.

영화의 배경은 1933년이지만 국내에서 일제 요인들을 응징하려 한 의열단원들의 거사가 펼쳐진 것은 대체로 1920년대다. 이미 지적되었듯, 이 암살 작전과 유사한 의거로 1920년대의 김상옥(金相玉, 1890~1923) 의사가 전개한 의열 투쟁이 있다. [관련 글 : 의열단의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 김상옥 의사의 거사를 다룬 <동아일보> 호외(1923.3.15.)
▲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이 폭탄을 던진 종로경찰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경찰력의 본산이었다.

식민통치의 심장부에서 벌인 김상옥의 서울시가전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 처단, 총독부 및 조선은행 폭파를 위한 의거는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수뇌부와의 협의를 거쳐 확정된 거사였다.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3차례의 서울시가전은 영화에서 그려지는 상황 못지않게 극적이었다.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경과 일지(曰紙) 매일신보 사원 등 10여 명을 응징(중상)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것은 1923112일이었다. 제일 먼저 경찰서를 폭파한 것은 총독부 폭파용 폭탄의 성능을 실험하고 숱한 애국지사들의 설욕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 탄압을 전담하는 경찰서였기 때문이다.

 

닷새 후인 117일에도 후암동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도쿄 출장차 부산으로 떠나는 사이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처단키 위해 동지들을 전날 서울역 일대에 배치하는 등 저격 준비를 완료하고 김상옥은 가까운 후암동의 매제 집에 은신 중이었다. 그런데 당일 새벽 5시에 일제의 형사대 17명이 후암동의 집을 기습한 것이다.

 

형사 4명을 처단하며 포위망을 뚫은 김상옥은 눈 덮인 남산을 맨발로 종주했다. 그는 왕십리 안정사에서 승복을 빌려 변장하고 짚신을 거꾸로 신고 하산하여 수유리를 우회 탈출했다. 김상옥은 생가와 가까운 효제동의 동지 집에 은신하였다.

 

다시 닷새 후인 122, 이른바 효제동 대격전이 이어졌다. 동지의 집에서 동상을 치료하며 다른 곳으로 피신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은신처를 탐지한 일본 군경 1천여 명이 새벽 5시부터 삼엄한 경계를 서며, 5백여 명이 마을을 네 겹으로 포위했다.

 

열흘 전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닷새 전에는 후암동에서 왜경 4명을 처단하고서도 포위망을 뚫고 사라진 김상옥 의사를 제압하기 위해 일제는 네 겹의 포위망을 쳤다. 1진 권총 형사대, 2진 장총 형사대, 3진 기마경찰대. 4진 헌병 차량기동대로 포위했지만, 일제의 작전은 실패를 거듭했다.

 

뛰어난 사격 솜씨와 담력과 민첩함을 갖춘 김상옥을 당하지 못해 일제는 16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무려 3시간 이상 쩔쩔매야 했다. ‘일대 천(1:1,000)’의 격전은 12연발, 8연발의 쌍권총과 탄대의 탄환이 떨어지자 김상옥이 마지막 한 발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에야 끝날 수 있었다.

▲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김상옥 의사 동상

김상옥 의사가 서울에서 펼친 세 차례의 시가전은 만주에서의 독립군 대부대 작전의 성과에 못지않은 의미를 지니는 쾌거였다. 시기적으로는 3·1운동(1919) 4년 뒤의 일로 당시 일제가 대외적으로 3·1운동을 진정시켜 평온을 회복한 양 선전한 것이 거짓임을 폭로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의거가 일제의 식민통치 심장부인 서울 한복판에서 벌인 시가전이었다는 사실도 매우 고무적이었다.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김 의사가 이시영·이동휘·조소앙 등 임정 동지들과 작별할 때 남긴 말이다. 서른셋의 의혈 청년이 스스로 목숨을 조국에 바치게 한 것은 시대와 역사의 부름 때문이었다. 거사를 위해 국내로 잠입하면서 보초와 세관원을 맨손으로 때려뉘고 압록강을 넘었던 이 간 큰 사내의 모습이 영화 <암살>의 어느 대원과도 겹쳐 보이는 이유다.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의 단지 혈서 투쟁

 

2년 후인 1925년에도 김상옥이 실패한 사이토 처단 거사는 이어졌다. <암살>의 여주인공, 미모의 처녀 대원 안옥윤(전지현 분)은 거사에 성공했다. 그러나 단원 4명을 이끌고 사이토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주도했다가 실패하고 가까스로 중국으로 탈출한 이는 쉰셋의 어머니, 남자현(南慈賢, 1872-1933) 선생이었다.

 

남편을 잃고 47살의 나이에 만주로 떠난 남자현은 독립군의 어머니였다. 그의 단지(斷指) 혈서 투쟁은 유명하다. 1920년대 만주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이 부진하자 선생은 분연히 일어나 혈서를 쓴다. 남자현이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글을 써서 책임자들을 소집하자 간부들은 스스로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1932년 일제가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자 국제연맹은 하얼빈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남자현은 또 한 번 좌우 손가락을 끊어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 조선독립을 원한다)’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려 했지만 삼엄한 경비 속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332, 남자현은 만주국 첫 돌 기념식에 참석하는 만주국 전권대사 부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암살하기 위해 중국 거지로 변장하고 있다가 하얼빈 교외에서 일경에게 체포된다. 그녀는 피 묻은 삼베 적삼을 입고 있었고, 권총과 비수, 폭탄을 갖고 있었다.

 

조선인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61살이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17일간이나 단식투쟁으로 버티다 순국했다. 그이가 껴입은 피 적삼은 의병투쟁에 참전했던 남편 김영주가 전사한 1896년에 입었던 옷이었다. 남자현은 밥을 내미는 일경에게 호통을 쳤다.

 

조선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 죽음은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 복원된 경북 영양의 생가 앞에 세운 남자현 항일순국비

 

영화 <암살>에서 친일파 몇 죽인다고 독립을 이룰 수 있겠냐고 묻는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에게 안옥윤은 그렇게 답한다. “독립을 이루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런다.”. 예순한 살 독립군의 어머니의 호통은 그렇게 이 영화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몰입하되, 차분하게 관전하듯 나는 영화 <암살>을 관람하고 있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순간이 있었다. 저격수로 뽑힌 안옥윤이 독립군 제3지대를 떠나는 장면이었다. 동료들의 말소리가 효과음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잘 가, 옥윤아.”, “누나, 안녕.” 같은 인사말 속에서 나는 꿈결처럼 그 소리를 들었다. “우리 잊으면 안 돼…….” 나는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나는 아내와 딸애 몰래 눈물 한 방울을 찍어냈다.

 

다시 청산하지 못한 역사앞에서

 

왜 그 대목에서 나는 울컥했을까. 글쎄, 지난 1월의 임정 노정 답사에서 만났던 숱한 죽음과 순국의 기억들, 그들 무명의 삶과 죽음을 떠올렸던 것일까. 역사는 배경이 아니라 주역들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 배경이었던 숱한 무명의 삶이 교직해낸 시간이 없었다면 역사는 단지 신기루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영화의 대단원에서 벌어지는 반전은 통쾌하지만 씁쓸했다. 카메라가 최후로 머무는 것은 바람 부는 황량한 들판이었다. 그게 이 영화가, 최동훈 감독이 던지는 역사에 대한 전언(傳言)일까. 그것은 해방 70년의 광복절을 앞두고 다시 저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되씹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2015. 8. 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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