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찔레, 그 슬픔과 추억의 하얀 꽃

by 낮달2018 2019. 8. 26.
728x90

찔레꽃 이미지

▲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으로 가는 고갯길에서 만난 찔레꽃.

바야흐로 찔레꽃의 시절이다. 학교 뒷산 언덕바지에 찔레꽃이 흐드러졌다. 장미과에 속하지만 줄기와 잎만 비슷한 동북아시아 원산의 이 꽃(Rosa multiflora)은 보릿고개의 밤을 하얗게 밝힌 꽃이었다. 연중 가장 힘들고 배고프던 시기에 피었다는 이 꽃에는 저 절대 빈곤 시대의 슬픈 추억이 서려 있다.

 

찔레꽃의 추억과 슬픔

 

찔레꽃을 먹기도 했다지만, 나는 찔레순 껍질을 벗겨 먹어본 기억밖에 없다. 찔레꽃은 5월에 흰색 또는 연한 붉은 색으로 꽃을 피운다고 하는데 연분홍 찔레꽃을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양지바른 산기슭, 골짜기, 냇가 등지에 피는 이 꽃의 소박한 흰 빛은 좀 슬프다.

그래서일까. 송찬호 시인이 노래한 ‘찔레꽃’은 저 잃어버린 시절의 사랑과 회한을 노래한다. ‘너’는 결혼하고 홀로 남은 ‘나’는 ‘눈썹을 밀면서’ 너를 잊을 수 있겠거니 한다. ‘너’는 마지막 편지를 찔레나무 숲 덤불 아래 남겼다. 하얀 사발 속의 연서…….

 

차마 다 읽지 못한 편지, 이십몇 년 세월이 흘러 ‘잊겠다’라고 다짐하며 눈썹을 밀었던 젊은이는 마흔몇 중년이 되어 옛 찔레나무 앞에 선다.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사발은 희미하다. 그가 거기서 발견한 ‘오월의 뱀’은 스물몇 해 전,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기를 기다리던 자신의 모습이었던가…….

 

절제를 넘어 마치 남의 얘기처럼 되뇌는 찔레나무 덤불의 추억.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에서 묻어나는 것은 역시 어쩔 수 없는 회한의 정서다. ‘하앴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이 구절은 하얀색이 빛바랜 슬픔의 흔적이라는 걸 넌지시 증명하는 것 같지 않은가.

 

빛바랜 슬픔의 흔적, 하얀 꽃

 

보리밭이나 찔레꽃 덤불 너머에서 익어간 저 지난 세기의 사랑은 우리 세대에겐 그리 낯설지 않다. 그 시절에 이루지 못한 떠꺼머리총각과 댕기 머리 처녀들의 사랑 이야기는 쌔고 쌨고 넘친다. 사랑의 상처를 안고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미자와 경자 누나는 또 몇이었나.

 

‘찔레꽃’을 노래한 대중가요도 여럿이다. 일찍이 백난아가 ‘찔레꽃’을 불렀고, 이연실이 부른 ‘찔레꽃’은 이은미가 다시 불렀다. 뒤에 장사익도 ‘찔레꽃’을 노래했다. 백난아의 찔레꽃은 고향을 떠올리는 매체다. 이연실의 그것은 저 유년의 눈물과 주림을 노래하는 슬픈 꽃이다. 장사익의 찔레꽃도 서럽고 슬픈 꽃이지만 그 슬픔은 안개 속에 가리어져 있다.

 

백난아의 찔레꽃은 ‘붉게 피는’ 꽃이다. ‘연분홍’도 붉긴 하지만, 그걸 ‘붉게’ 핀다고 하는 건 좀 어색하다. 그래서 그녀가 노래한 건 찔레꽃이 아니라 바닷가에 주로 피는 해당화(海棠花)라고도 한다. 60년대의 인기 가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의 가사에 등장하는 그 ‘해당화’ 말이다.

▲ 해당화. 찔레꽃과 같은 장미과의 활엽관목이다. 2007년 의성 비봉산 대곡사 .

‘이연실의 노래 ‘찔레꽃’을 듣는다. 그녀의 찔레꽃은 돌아가신 엄마를 배웅하는 길, 그 길섶에 피어 있었던 꽃이다. 배고픈 날 엄마를 부르며 하나씩 따먹은 꽃이다. 그것은 깊은 밤 엄마가 내려오는 산등성이 나무고, 밤마다 꾸는 엄마 꿈을 밝히는 하얀 꽃이다.

 

7·5조 3음보 율격의 이 노래는 이연실이 불렀던 전래동요 ‘타박네야’의 정서를 그대로 잇고 있다. 어머니 젖을 먹으러 떠나는 먼 길, 온갖 유혹을 넘어 타박네가 이른 곳은 어머니 무덤가다. 그 무덤가에서 따먹은 개똥참외에서 어머니 젖 맛을 깨닫는 타박네……. 그는 우리네 민중의 정서적 원형을 표현한 인물은 아니었을까.

 

언덕바지에 올라 찍어 온 하얀 찔레꽃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이연실의 노래, ‘찔레꽃’을 다시 되풀이해 듣는다. 마치 추억처럼, 잃어버린 청춘 시절의 연가처럼.

 

 

2010. 5. 28.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