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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삶 ·세월 ·노래

‘달맞이꽃’, 그 꽃과 노래 그리고 세월

by 낮달2018 2019.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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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복의 ‘달맞이꽃’

▲ 안동시 풍산읍 낙동강 강변 둑길에서 만난 달맞이꽃 . 이 꽃은 야행성 나방을 꽃가루 운반자로 선택했다 .

나는 꽃보다 먼저 노래로 ‘달맞이꽃’을 만났다.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1952~ )이 부른 대중가요 ‘달맞이꽃’으로 말이다. ‘달맞이꽃’이 언제쯤 발표된 노래인지는 잘 모르겠다. 75년 무렵이었던 듯한데, 글쎄다.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관련 정보는 눈에 띄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새삼 이용복이 특별히 대중의 사랑을 받은 가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검은 안경을 끼고 열정적으로 노래하던 그의 목소리의 결을 나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뭐랄까,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는 고음의 떨리는 목소리는, 그러나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노래 속에 아주 편안히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얼굴에 햇살을’과 ‘달맞이꽃’을 부르던 시절

 

그의 노래 가운데, 내가 즐겨 부른 노래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 몇몇 곡은 한때 내 애창곡이기도 했다. 우리가 농조로 ‘그 낯짝에 땡볕을’이라고 패러디했던 ‘그 얼굴에 햇살을’은 한동안 내가 가장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그의 독특한 음색이 아주 잘 어울렸던 ‘줄리아’,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로 시작하는 ‘어린 시절’, ‘잊으라면 잊겠어요’, ‘마지막 편지’ 따위가 그것이다.

 

▲ 이용복(1952~   )

‘달맞이꽃’은 언제 즐겨 불렀는지는 기억에 없다. 단지 동료교사들과 울진 불영계곡으로 놀러 갔다가 술자리에서 그걸 열창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경주 부근의 여학교에 첫 발령을 받고 부임하던 해였으니까 벌써 25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그때 잔뜩 핏대를 올려 부르던 그 노래의 가락은 지금도 선명하다.

 

노랫말이 워낙 은근하다. 나는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라는 노랫말에서 이 꽃을 지레 알아버렸다. ‘쓸쓸히’ 미소를 띠거나 시들어가는 이 꽃의 모습에 나는 애틋한 사랑의 사연을 적당히 겹쳐버렸다.

 

노래를 부르면서도 나는 정작 ‘달맞이꽃’을 몰랐다. 그게 어떤 빛깔의 꽃일지도 나는 상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단지 노래를 부르고, 거기 담긴 그 꽃의 이미지를 막연히 반추했을 뿐이었다.

 

들에 핀 꽃으로 달맞이꽃을 처음 만난 게 30대의 끝, 한 시골 학교에 복직하고서였다. 나는 내가 막연히 상상했던 이미지와 전혀 다른 그 꽃을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이게 달맞이꽃이라고? 달맞이꽃은 집을 나서면 들판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꽃이었다. 막연히 하얀색이 아닐까 상상했던 빛깔도 노란색이었다.

 

‘월견초(月見草)’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는 그 꽃의 신비는 깨끗이 스러져 버렸다. 뒤늦게 그게 ‘귀화식물’이라는 걸 알았고, 한낮에는 꽃잎을 닫고 있는 그 꽃에서 별다른 아름다움 따위를 찾기도 어려웠다. 나는 내 머릿속에 피어 있던 달맞이꽃과 실제 꽃 사이의 부조화를 씁쓸하게 받아들였다.

▲ 병산서원에서 풍산 소산리로 가는 낙동강 둑길. 안개 자욱한 이 길에서 나는 달맞이꽃을 만났다.

달맞이꽃을 다시 ‘만난’ 것은 지난 한가위 연휴 중이었다. 나는 국제 청소년 성취포상제 참여 학생들의 탐험 활동(1박 2일)에 담당교사로 동행했다. 구담 습지에서부터 낙동강을 따라 안동댐까지 걷는 ‘낙동강 생태탐험’ 길이었다.

 

노래와 꽃의 부조화, 다시 만난 달맞이꽃

 

병산서원에서 하룻밤 야영을 마친 다음 날, 꼭두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어 먹고 7시께 길을 나섰다.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고,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원에서 나와 풍산 소산리로 가는 강변의 길게 벋은 둑길을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길 오른편에는 낙동강 준설 공사에 동원된 중장비가 서 있었고 왼편에는 준설토가 쌓아 놓은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 둑길에는 억새가 줄지어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아직도 꽃잎을 열고 있는 달맞이꽃을 만난 것이다. 꽃잎을 열고 선명한 꽃술을 내밀고 있는 달맞이꽃,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꽃잎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나는 늘 꽃잎을 닫고 있던 달맞이꽃이 그런 꽃술을 감추고 있는지는 정말 몰랐다. 주변에 모인 아이들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럴 나이다. 자신을 돌아보기에 바쁜 나이, 외부에 시선을 돌릴 겨를이 없는 시기인 것이다.

 

“이게 달맞이꽃이야.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꽃잎을 열고 있네.”
“밤에만 피어요?”
“그럼. 그래서 ‘달맞이꽃’인 거지. 한자로는 월견초라고 하지.”
“왜 밤에만 피어요?”
“몰라, 너무 많이 알려 하지 마라. 이 녀석아, 내 밑천 드러난다.”

▲ 동네 뒷산에 어귀에 핀 달맞이꽃.

그러고 보니 달맞이꽃이 왜 밤에만 피는지 궁금해진다. 우리는 일상을 지나치게 무심히 바라보고 사는지 모른다. 왜 밤에만 피느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히는 까닭이다. 포상 활동 담당관으로 참가한 내 동갑내기 친구가 거든다. 그는 식물에 대해 아는 게 무척 많다.

 

“수분(受粉)을 잘 시키기 위해서야. 이놈은 벌이나 나비 대신에 밤에 활동하는 나방을 통해 수분을 하거든.”

 

활동을 마치고 돌아와 나는 ‘달맞이꽃’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럴 때 인터넷은 정말 요긴한 도우미다. ‘정말 필요한 정보는 없고 쓰레기 정보가 넘치는 곳’이라는 혹평도 없지 않지만, 역시 필요할 때 생광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달맞이꽃은 남미 칠레 원산인데 지금은 전국에 널리 퍼졌다. 씨앗 수가 포기당 수백만 개로 아무 땅에서나 잘 자란다. 산과 들에 지천(至賤)인 까닭이 여기 있는 셈이다. 다 자란 풀잎은 가축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가을에 땅에 떨어진 달맞이꽃의 씨앗은 이내 싹이 트고 잎이 나, 땅속에서 뿌리가 굵어진다. 달맞이꽃은 납작하게 땅바닥에 움츠린 채 한겨울을 난 뒤 이듬해 봄이 되면 키가 자라기 시작하여 여름에 꽃을 피운다. 달맞이꽃은 이태에 걸친 생육 과정을 가진 2년 초(두해살이풀)인 것이다.

 

밤에 피는 꽃, 달맞이꽃의 생존 전략

 

앞서 말했듯 달맞이꽃이 밤에 꽃을 피우는 것은 낮에 활동하는 꿀벌 대신, 야행성 나방을 꽃가루 운반자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밤에 활동하는 나방을 통해 수분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대부분 꽃이 밤에는 꽃잎을 닫고 있으므로 꽃가루받이[수분]를 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밤에 달맞이꽃이 활짝 피었을 때 꽃술 부분을 만져보면 끈적끈적한 점액으로 꽃가루가 엉겨 있다고 한다. 이는 나방이 꿀을 빨아 먹을 때 그들의 몸에 꽃가루가 좀 더 잘 붙을 수 있도록 한 달맞이꽃의 생존 전략이다.

 

그럼 달맞이꽃은 어떻게 밤낮을 구분해 꽃잎을 여닫을까. 달맞이꽃에는 밝기를 감지하는 센서가 있어 어두워지면 꽃을 피운다. 하루를 주기로 하여 같은 시간에 규칙적으로 꽃이 피는 현상은 생물체 내부의 시간측정기인 생체시계(biological clock)에 의해 조절된다고 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삶과 생존이 지닌 메커니즘이나 동물과 식물의 그것은 다르지 않다. 단지 생존의 방식이 다를 뿐 생명체의 존속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목적과 과정이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낙동강 강변의 달맞이꽃. 옅은 안개 속에 달맞이꽃은 꽃잎을 열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출근 전에 강변에 나가 달맞이꽃 몇 그루를 찾았다. 옅은 안개 속에 달맞이꽃은 그 꽃잎을 수줍게 열고 있었다. 달맞이꽃의 향기는 은은하다고 하는데, 나는 사진을 찍느라 정작 그 향기를 맡아보지는 못했다.

 

컴퓨터에 사진을 띄워놓고 이용복의 노래 ‘달맞이꽃’을 듣는다.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 달 밝은 밤이 오면 홀로 피어 쓸쓸히 쓸쓸히 미소를 띠는 그 이름 달맞이꽃……. 노래는 이십몇 년 전, 내 젊음의 한때를 속절없이 환기하며 노랗게 열린 달맞이꽃 주위를 떠돌고 있다.

 

2010. 9.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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