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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삶 ·세월 ·노래

박인희, 혹은 사이먼과 가펑클의 ‘스카버러’

by 낮달2018 2019.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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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희가 번안해 부른 사이먼과 가펑클의  ‘스카버러의 시장(Scarborough Fair)’(1966)

▲ 스카버러는 영국 잉글랜드 북동부 노스요크셔(North Yorkshire)의 북해에 면한 행락지다.

번안곡의 제목이나 노랫말은 원곡과 꽤 동떨어진 경우가 있는 듯하다. 기본적으로 정서가 다르고 사물에 대한 표현이나 서사가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번안곡으로 알게 된 노래는 원곡의 내용이나 표현과 무관한 것일 때도 적지 않다.

 

70년대를 전후하여 꽤 높은 인기를 누렸던 트윈폴리오의 노래 ‘웨딩 케이크(Wedding Cake)’나 조영남이 번안해 부른 노래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 같은 노래가 그 좋은 예다.

 

코니 프랜시스가 부른 원곡 ‘웨딩 케이크’에는 ‘사랑의 상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10년차 주부가 ‘결혼과 결혼 후의 삶’을 담담히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관련 글 : 두 개의 ‘웨딩 케이크’, 그 삶과 사랑]

 

조영남이 부른 번안곡 ‘물레방아 인생’은 ‘세상만사 둥글둥글, 호박 같은 세상’을 정처 없이 돌고 도는 떠돌이의 자유로운 삶을 ‘물레방아’로 비유해 노래했다. 미시시피 강의 유람선 ‘프라우드 메리’의 멈추지 않는 운항을 통해 ‘자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과 지향을 노래한 원곡과는 ‘자유로운 삶’만 일치한다. [관련 글 : ‘프라우드 메리’와 40년 세월]

 

아, 박인희, 그리고 ‘스카브로의 추억’

 

원곡과 번안곡 얘기를 시작하는 것은 얼마 전에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은 박인희의 오래된 노래, ‘스카브로의 추억’ 때문이다. 뉘 집 애 이름 부르듯 했지만, 박인희는 1945년생, 우리 작은누나와 동갑내기인 해방둥이다. 우리 나이로 일흔셋. 그러나 화장기 없이 긴 생머리를 한, 소녀 같았던 박인희의 모습에서 나는 할머니를 잘 상상할 수 없다.

 

정갈한 모습만큼이나 차분하고 청아한 그이의 목소리를 나는 좋아했다. 바이브레이션 따위의 기교를 부리지 않고도 그의 목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적셔주었다. ‘세월이 가면’에서 그이의 절제된 목소리로 드러나는 것은 이별의 아픔이나 그리움이라기보다 세월 속에 성장한 사랑의 깨달음이다. [관련 글 : 박인환, 박인희 <세월이 가면>]

 

박인희가 영화 <졸업(1967)>의 삽입 음악(OST)이었던 ‘스카버러 페어(Scarborough Fair)’를 번안 개사한 ‘스카브로의 추억’을 발표한 게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 게 고등학교 졸업을 전후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어떤 연유에선지는 우리는 이 노래를 박인희의 번안곡보다는 원곡으로 더 많이 불렀다. 스카브로가 어디였는지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막연히 화자의 추억과 사랑이 서려 있는 고풍스러운 서구의 어떤 도시를 떠올리는 것으로 족했으니 말이다.

 

박인희의 목소리로 스카브로를 만난 뒤 나는 인터넷 검색으로 이 도시가 영국 잉글랜드 북동부 노스요크셔(North Yorkshire)의 북해에 면한 행락지라는 걸 알았다. 국내엔 ‘스카브로’라고 알려졌지만, 현지 발음으로 ‘스카버러(Scarborough)’다.

 

이 노래의 원제는 ‘스카버러의 시장(Scarborough Fair)’이다. 스카버러 시장은 중세 말부터 정기적으로 열렸던 저자였다. 당시 스카버러는 유럽 대륙으로부터 상인들이 몰려오는 중요한 교역 거점이었으며 장이 서면 마술사, 서커스, 재담꾼, 구경꾼 등에 의한 축제의 장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스카버러 페어, 영국의 구전 민요

 

스카버러 페어는 16세기 무렵부터 전해져 온 발라드 형태의 민요 가운데 하나다. 이 노래는 음유시인들에 의해 불리면서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어 오는 과정에 많은 버전이 생겨났고, 가사의 형태도 수십 가지로 전해져 왔다고 한다.

▲ 사이먼과 가펑클의 3번째 앨범 < 파슬리 세이지 로즈메리 앤드 타임 >(1966)

이 노래는 1966년 이곳을 여행한 사이먼과 가펑클(Simon and Garfunkel)이 현지 가수에게서 전해 듣고 편곡한 것이다. ‘스카버러의 시장’은 이듬해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영화 <졸업>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널리 퍼졌다.

이 노래는 흔히 듀엣 형식으로 불리는데 흥미로운 것은 노랫말이다. 남녀가 함께 노래하는 짧은 부분이 앞뒤에 있고 중간에 남자와 여자가 각각 노래하는 부분이 남녀가 같이 노래하는 부분을 사이에 두고 배치되어 있다. (남녀-남-남녀-여-남녀)

 

이 노래의 형식과 의미에 대한 해석은 좀 엇갈린다. 우선 전쟁으로 인해 악령으로 변한 소년이 불가능한 요구를 건네면 나그네는 “파슬리, 세이지, 로즈메리와 타임(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이라는 후렴구로 대응하는 형식으로 보는 독특한 해석이 있다.

 

후렴구의 의미도 그것을 일종의 ‘액막이하는 말’로 해석한다. 네 가지 종류의 허브 식물이 드러내는 의미는 매우 상징적인데 후렴구에서는 이 4가지 허브를 반복적으로 나열함으로써 일종의 ‘부적 효과’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를 따로 밝히지 않는다.

 

후렴구, 네 가지 허브의 상징적 의미

 

이 노래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후렴구의 의미는 매우 상징적이다. 파슬리는 소화를 도우며 쓴맛을 없애는 식물로 중세에는 영적 의미로 파악되었고 세이지는 수천 년에 이르는 내구력의 상징이다. 로즈메리는 정절, 사랑, 추억을 나타내는데, 지금도 영국과 유럽에서는 신부의 머리에 로즈메리의 작은 가지를 꽂는 관습으로 남아 있다. 타임은 용기의 상징, 노래가 지어진 시대의 기사들이 싸우러 갈 때마다 방패에 타임 모양을 새긴 것은 그 때문이었다.

▲ 후렴구에 등장하는 네 가지 허브 식물이 가진 의미는 매우 상징적이다.

다른 하나는 이 노래를 화자의 독백으로 이해한다. 화자는, 반복 언급하는 4종의 허브를 통하여 옛 연인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자 한다. 그것은 네 허브가 가진 상징들-온화함과 시간을 기다리는 참을성, 정절과 사랑,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모순된 용기-를 제시하고 그녀가 이 모든 것들을 해낼 때 진정한 자신의 연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화자가 전해 달라는 요구는 모두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는 ‘바늘땀도 세세한 바느질 자국도 없이’ ‘캠브릭 셔츠를 만들라고’ 요구하고, ‘물은커녕 비도 내리지 않’는 ‘마른 우물에서 그것을 빨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아담이 태어난 후로 꽃이 핀 적이 없’는 ‘가시나무에서 그것을 말리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해 준다면’ ‘그녀는 나의 연인’이라면서.

 

스카버러의 사랑, 그 역설과 고려가요 ‘정석가’

 

이상이 남자의 요구라면, 여자는 요구도 이어진다. ‘소금물과 바닷모래 사이의 것’인 ‘1에이커의 토지를 발견하도록’ 하라고, ‘양의 뿔로 그곳을 경작하라’고, ‘그러고 나서 후추 열매를 뿌리라고’, ‘가죽으로 된 낫으로 그것을 베라’고, ‘히스로 된 밧줄로 엮으라고’ 한다. ‘그렇게 해 준다면 그는 나의 연인’이라고, ‘바늘땀 없는 셔츠를 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요구한 것은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행동이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은 말 그대로 하늘의 옷에 해당할 뿐, 바늘땀 없는 셔츠를 만드는 것도, 그것을 물도 없는 우물에서 빠는 것도, 죽은 가시나무에서 말리는 것도 이행 불가능한 일들인 것이다.

 

소금물과 바닷모래 사이에 있는 토지를 발견하는 것도, 양의 뿔로 그곳을 경작하는 일도, 씨 아닌 열매를 파종하고 가죽으로 된 낫으로 그것을 베라는 것도 남자에게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면 그(그녀)는 나의 연인이라고 확인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 노랫말에 담긴 것은 ‘사랑의 조건’처럼 보인다. ‘이러이러하여야 나의 연인’이라는 구절만 볼 때는 그렇다. 그러나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역설을 요구하고 그것까지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사랑의 궁극(窮極)’으로 해석될 여지는 없을까. 그렇다면 스카버러 페어는 그 역설조차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의 노래일 수도 있겠다.

 

사각사각 가는 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으오이다.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야만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야만
유덕하신 님 여의고 싶습니다.

옥으로 연꽃을 새기옵니다.
옥으로 연꽃을 새기옵니다.
바위 위에 접을 붙이옵니다.
그 꽃이 세 묶음 피어야만
그 꽃이 세 묶음 피어야만
유덕하신 님 여의고 싶습니다.

무쇠로 철릭을 마름질해
무쇠로 철릭을 마름질해
철사로 주름 박습니다.
그 옷이 다 헐어야만
그 옷이 다 헐어야만
유덕하신 님 여의고 싶습니다.

무쇠로 황소를 만들어다가
무쇠로 황소를 만들어다가
쇠나무산에 놓습니다.
그 소가 쇠풀을 먹어야
그 소가 쇠풀을 먹어야
유덕하신 님 여의고 싶습니다.

     -고려가요 「정석가(鄭石歌)」 중에서

 

고려가요 ‘정석가(鄭石歌)’도 불가능한 상황을 가정하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노래는 스카버러 페어와 달리 상대에게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이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확인하는 것이다.

 

화자는 ‘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고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야만’ ‘님’과 헤어지고 싶다고 말한다. ‘옥(玉)으로 새긴 연꽃’을 ‘바위에 접’을 붙여 그 꽃이 피어야만, ‘무쇠로 마름질’하여 ‘철사로 박’은 옷이 다 떨어져야만, ‘무쇠로 만든 소’를 쇠나무산에 풀어놓고 ‘그 소가 쇠풀을 다 먹어야’만, 님과 헤어지고 싶다는 화자의 바람은 ‘헤어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귀결되는 것이다.

 

사이먼과 가펑클이 추가한 ‘반전의 시대상’

 

정석가는 실현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한 것으로 설정한 모순어법으로 이루어진 역설, 화자의 궁극적 소망을 뒤집는 표현의 반어를 통해 영원한 사랑을 노래했다. 스카버러 페어에 쓰인 역설도 비슷한 구조지만 그것이 사랑의 확인을 통해 그 궁극을 드러내는 장치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스카버러 페어는 사이먼과 가펑클의 3번째 앨범 <파슬리 세이지 로즈메리 앤드 타임>(1966)에 ‘스카버러 페어/영창’으로 수록되어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했다. 사이먼과 가펑클은 이 노래를 편곡하면서 가사 일부를 바꾸고 중간에 영창(咏唱, 아리아)을 집어넣었다.

 

당시는 베트남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때여서 미국에서는 반전운동이 활발했다. 사이먼과 가펑클은 전쟁에서 죽어간 청년이 고향의 연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첨가함으로써 이 노래에 반전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스카버러 페어는 다양한 버전이 나왔지만 역시 대종은 사이먼과 가펑클의 것이다. 두 사람과 박인희의 목소리로 번갈아 스카버러 페어를 들으면서 어느덧 흘러가 버린 40년의 세월, 그 젊음의 시간을 무심히 되돌아본다.

 

사이먼과 가펑클 스카버러 페어 https://www.youtube.com/watch?v=-BakWVXHSug

 

2017. 7. 10. 낮달

 

* 참고

· <위키백과>

· 추억처럼 아름다운 스카보로 페어

· 스카보로 페어-화합, 인내, 정절, 용기의 사랑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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