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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미각과 삶, 혹은 추억

공정무역, ‘아름다운 커피’ 이야기

by 낮달2018 2019.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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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거래로 생산자에게 적정한 이윤을 보장하고, 세계화의 폐해를 줄이는 ‘공정무역 커피’

▲ 히말라야의 선물로 내린 '아름다운 커피'
▲ 학교에서 마시는 설탕 커피

커피를 처음 마신 게 언제였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였을 터이다. 그냥 ‘이런 맛이구나!’ 하는 정도에서 그 묘한 빛깔의 음료를 들이켰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커피는 서민들의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까닭이다. ‘커피를 즐기는 것’이 마치 중산층들의 품위 있는 삶의 징표처럼 이해되던 때였으니 말이다.

 

자판기 커피는 물론 없었고, 여유가 있었던 일반 가정에서는 즉석(인스턴트)커피를 ‘접대용’으로 마련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 먹은 커피 병은 훌륭한 주방 용기로 활용되었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겨우 다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커피와는 친해지지 못했다. 좋아서가 아니라 자릿값을 하기 위해 주로 요구르트나 홍차 따위를 시켜 마셨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건 1882년(고종 19)부터 구미와 일본 등과 수교가 이루어지고 나서다. 아관파천(1896) 때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커피를 즐겼다고 전한다. 민간에서는 독일인 손탁(Antoinette Sontag)이 정동구락부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했고 이후 1920년대부터 명동·충무로·종로 등지에 커피점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커피를 즐기는 사람은 소수였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하이칼라들이거나 일찌감치 신문화를 받아들인 유한계급이 이 색목인(色目人)이 즐기는 음료에 입을 길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새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는 역시 젊은이들이 쉽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1930년대 다방의 풍경을 이렇게 전한다.

 

 오후 두 시,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에 피로한 것같이 느꼈다. 그들의 눈을 그 광선이 부족하고도 불균등한 속에서 쉴 사이 없이 제각각의 우울과 고달픔을 하소연한다. 때로, 탄력 있는 발소리가 이 안을 찾아들고, 그리고 호화로운 웃음소리가 이 안에 들리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방에 깃들인 무리들은 그런 것을 업신여겼다.
 구보는 아이에게 한 잔의 가배차(珈琲茶)와 담배를 청하고 구석진 등 탁자로 갔다. (……)

     - 박태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중에서

 

그때는 커피를 ‘가배차(珈琲茶)’라 불렀던 모양이다. 일본어로는 ‘コ-ヒ-’(고히)라 했다.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음악을 듣는 광경은 지금과도 다르지 않은 듯하다.

 

광복 때까지 여전히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기호 음료였던 커피가 대중화된 것은 8·15해방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였다. 해방과 동시에 진주한 미군들과 함께 그들의 군수품 커피가 암시장에 대거 풀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커피는 커피를 즐기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주로 먹는 원두 커피가 아니라 인스턴트 커피다. 20세기 초기에 이미 발명된 ‘물에 녹는 커피’, 즉 인스턴트커피는 거친 맛과 향 때문에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으나 2차 대전을 계기로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인스턴트커피는 한국전쟁 동안 급속히 대중화되었다. 커피가 곧 ‘교양 있는 문화인의 기호’로 인식되면서 미군 부대, 군수 산업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스턴트커피가 큰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 아름다운 커피 누리집(2008)

이런 역사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즐기는 원두커피가 아니라 인스턴트커피가 주류가 되었다. 전체 커피 시장의 90%를 차지하는 인스턴트커피는 치열한 경쟁과 개발을 통해 이제는 원두커피 못지않은 맛을 내게 되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인스턴트커피를 만든, 세계 커피 시장 점유율 1위인 네슬레가 한국에서만큼은 맥을 추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네슬레 한국 지사장의 탄식도 같이 이유다. “한국의 인스턴트커피는 맛이 너무 좋다. 그래서 굳이 원두커피를 마실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다.”

 

원두커피가 아니라 인스턴트커피가 주류가 된 까닭은 대중화 과정과 더불어 산업화를 거치며 내면화된 ‘빨리빨리’의 문화, 시대 상황 등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부족해 1970년대엔 커피와 커피 크리머(coffee creamer), 설탕을 따로 섞어야 하는 불편을 넘으려 이들 세 가지 재료를 한꺼번에 버무려 놓은 ‘커피믹스’가 등장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세계 11위 커피 수입국이다. 이제 커피는 유한계급의 기호 음료가 아니라 전 국민이 두루 사랑하는 ‘차’가 되었다. 남녀노소, 도농과 빈부귀천과 무관하게 모두가 즐기는 ‘국민 음료’가 된 것이다. 궁벽한 시골에도 다방이 있으며, 농민들은 들일을 하다가도 휴대전화로 다방 커피를 불러서 마시는 시대가 되었다.

 

손님이 오면 술을 내 오는 게 우리네 오랜 예절이었다. 손님이 오면 부리나케 주전자를 들고 도가에 가서 술을 받아오던 기억이 아득하다. 커피는 차 문화가 대중화되지 못했던 우리 여가 문화의 틈새를 들어와 아예 주류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술 대신 차를 마시고, ‘대포 한잔’ 대신에 ‘차나 한잔’을 입에 달고 살게 되었다.

 

▲ 동티모르 평화 커피

커피를 즐기지 못했던 ‘무식한 촌놈’이었던 내가 커피를 가까이하게 된 것은 90년대 중반이었다. 면 단위의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였는데 여러 과목을 맡아야 하는 부담이 있는 대신 수업은 열두어 시간뿐이었다. 하루에 두세 시간 수업이 고작이었으니, 대여섯 시간 수업으로 골병이 들고 있는 요즘에 비기면 가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빈 시간을 죽이기 위해 한 잔 두 잔 마시기 시작한 커피에 어느새 인이 박이고 말았다. 심심해서 한 잔, 그러다 갈증이 나서 한 잔……, 그 학교에서 5년 만기를 채웠다. 갈증의 원인이 커피 크리머 때문이 아닌가 싶어 그걸 뺀 거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4년째부터였던 것 같다.

 

자판기에서 설탕보다 더 열량이 높은 커피 크리머를 제외한 ‘설탕 커피’가 등장한 건 2000년이 넘어서였던 것 같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청와대에서도 이 ‘봉지 커피’를 즐겨 ‘영부인 커피’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지만, 아마 이 설탕 커피의 출현은 ‘인스턴트커피 세대의 분화’를 반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휴게소 등에서 파는 원두커피를 한 잔 두 잔, 맛보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였는데, 진한 인스턴트커피에 길든 입에 그건 여전히 싱겁기만 했다. 그러나 그게 입에 익기 시작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커피 프리머를 타지 않고 마시는 원두커피의 향취는 은은하고 오래 입안에 감돌았다. 이걸 집에서도 즐기겠다고 마음먹으며 바로 커피메이커를 샀고, 딸아이와 함께 하루 두어 잔의 원두커피를 즐기는 호사를 누린 지 꽤 오래됐다.

 

학교에선 물론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없다. 대신 요즘 시판하는 커피 크리머가 들지 않은 봉지 커피를 타 마신다. 하루에 두 잔. 출근해서 바로 한 잔, 점심 식사 후 한 잔의 원칙에 좀 당기면 오전에 한 잔쯤 더 마신다. 오후 6시 이후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나는 뜻밖에 카페인에 예민하여서 쉽게 잠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 히말라야의 선물 ⓒ 아름다운 커피
▲ 아름다운 커피의 원칙 ⓒ 아름다운 커피

여전히 원두커피의 종류에 대해선 잘 모른다. 대형할인점에서 구매하던 원두커피를 아름다운 재단에서 연 ‘아름다운 커피’에서 사기 시작한 것은 2004년부터다. <오마이뉴스>에 쓴 “착한 커피, 혹은 더 바디샵”이란 기사는 바로 이 무렵의 경험을 다룬 것이다.

 

아름다운 커피에선 ‘히말라야의 선물’이란 이름의 네팔산 원두커피(200g)를 1만 원에 판다. 나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두 봉지의 ‘히말라야의 선물’을 분쇄하지 않은 ‘홀빈’으로 산다. 네팔 농민들은 비료를 살 여력이 없어 저절로 ‘유기농’ 커피가 되었다. 배송료 2천 원을 물면 22000원으로 두 달쯤 편안하게 이 대안 무역 커피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시중 커피 전문점에서 파는 커피는 3000~5000원이지만, 정작 생산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그것의 1%도 미치지 못한다. 물론 중간 유통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것은 다국적 커피 회사들이다. 대표적 커피 생산국인 콜롬비아, 과테말라, 에티오피아, 르완다, 동티모르 등은 대부분 빈곤과 내전에 시달리고 있다.

 

아름다운 커피에서 벌이고 있는, 커피를 통한 공정무역은 이들 농민과 직거래를 함으로써 적정한 이윤을 보장하고, 세계화의 폐해를 줄이고자 한다. 이처럼 ‘공정무역’은 ‘유통마진을 절약하고 ‘생산자들에게 더 나은 교역조건을 제시하고 권리를 부여하며, 원조를 넘어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도록 자립을 돕는다.’

▲ 안데스의 선물과 히말라야의 선물 (홀빈)

200g 커피 원두 한 봉지를 사면 국제 커피 시장에서 원두 1㎏이 1.45달러에 거래되므로 재배 농민에게 쥐어지는 건 250원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공정무역 방식으로 판매되는 커피 ‘히말라야의 선물’ 200g 한 봉지를 사면 농민에게 1000원가량이 돌아간다. 유통가의 3배에 가까운 ㎏당 3.45달러의 ‘정당한 가격’에 사 오기 때문이다. 결국 ‘아름다운 커피’를 마시며 나는 네팔 농민들의 자립을 돕는 셈이다.

 

공정무역은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도 생소한 걸음마 단계다. 아름다운 가게가 파는 ‘히말라야의 선물’은 일본의 대표적인 공정무역 단체인 ‘네팔리 바자로’와 협력으로 들여오게 됐는데, 네팔에서 재배된 커피를 ‘생두(生豆) 형태로 들여와 2주마다 전문가와 함께 직접 볶아 공급’한다고 한다.

 

YMCA에서도 동티모르 샤메 지역의 커피를 ‘동티모르 평화 커피’라는 이름으로 전국 60개 YMCA 지부와 녹색가게 20곳에서 판매하고 있다고. 440g에 3만 원. 생산비용을 뺀 수익 전액이 현지 커피농의 자립을 위해 사용된다고 한다.

 

오래전에 쓴 기사(착한 커피혹은 더바디샵))를 통해 나는 ‘여러 개의 동종의 상품 중에 꼬집어 한 제품을 고르면서, 자신의 선택이 갖는 윤리적 의미를 즐거워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선량한 소비자’에 대해서 말했다. 그들의 ‘참여’가 ‘사람 사는 세상’을 여는 조그마한 실마리라는 점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방학을 맞아 하루에 두 번씩 내려 먹다 보니 우리 집 ‘히말라야의 선물’은 나날이 줄어가고 있다.

 

 

2008. 1. 12. 낮달


* 11년 전에는 나는 충실한 ‘아름다운 커피’ 소비자였다. 혼자서 마시는데 그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원두커피를 마시게 되면서 소비량이 갑절로 늘었고 딸애까지 이 소비대열에 끼면서 200g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커피 가격도 오른 데다가 1개월에 1Kg 가까이 소비하게 되면서 더는 ‘착한 커피’의 소비자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대형할인점에서 파는 1Kg 짜리 원두커피로 갈아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름다운 커피’의 1/3 가격이니 부담을 줄인 셈인데, 지금도 가끔 아름다운 커피를 마시던 시절을 돌아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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