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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미각과 삶, 혹은 추억

도시락 반찬 변천 약사(略史)

by 낮달2018 2019.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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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도시락 반찬 변천의 역사

▲ 70년대 겨울의 교실 풍경. 무쇠 난로에 쌓아 올려서 도시락을 데워먹었다. 군위 화본 추억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 ‘도시락’을 싸 온 경험이 없다. 초등학교에서 급식이 시작된 것은 1997년이고, 늦어도 99년부터 중고등학교에서도 급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단지 소풍(이젠 이것도 ‘체험학습’이라고 부른다.)을 가면서 도시락을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학교 급식은 어머니들을 도시락 스트레스로부터 해방했지만, 아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식당에서 ‘뜨신 밥’을 먹게 된 대신 이른바 오래된 형식의 ‘밥상 공동체’로부터 멀어졌다. 저마다 다른 반찬을 나누며(때로는 빼앗아 먹기도 하며), 점심시간을 앞당겨(?) 도시락을 비우던 추억 따위는 아이들의 사전에 없는 것이다.

 

6·70년대 학창시절, 도시락의 추억

 

▲ 도시락 종류도 여럿이다.

소풍을 가면서 도시락을 가져간다고 하지만, 그 도시락은 김밥 일색이니 굳이 도시락이라고 부를 것까지도 없다. 도시락이란 ‘플라스틱이나 얇은 나무판자, 알루미늄 따위로 만든’, ‘흔히 점심밥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 데’ 쓰는 ‘밥을 담는 작은 그릇’(<표준국어대사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도시락을 거르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는 오후까지 수업하는 고학년 시절에, 그리고 중고등학교 땐 토요일을 빼곤 하루도 빠짐없이 도시락을 ‘지참’해야 했다. 그건 ‘밥’이고 ‘힘’이며 모든 에너지의 원천이었으니까.

 

내가 처음으로 도시락을 싸 간 것은 초등학교 졸업반 때였을 것이다. 나는 엎어지면 코가 닿을 만한 거리에 집이 있어 굳이 도시락을 쌀 필요가 없었다. 나는 아이들이 일제히 도시락을 꺼내 식사를 시작하면 교실을 나와 집까지 뛰어서 가곤 했다. 일하다 짬을 낸 어머니가 차려주는 점심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졸업반이 되고, 중학교 입시 때문에 방과 후에 보충수업을 하게 되면서 시간이 훨씬 빡빡해졌다. 밤에도 교실 가녘에 남포등을 걸고 공부를 계속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학교 울타리 너머에 집이 있으면서도 도시락을 가져온 것을 좀 겸연쩍어하면서 제자리에 앉아서 얌전히 도시락을 먹었다.

 

그때 아이들이 대체로 어떤 반찬을 싸 왔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 김치가 중심이었고, 가끔 고추장을 싸 오는 동무들도 있었던 것 같다. 그 무렵만 해도 아이들은 숫보기여서 제자리에서 도시락 뚜껑을 세워 반찬을 가리고 부끄럼을 타면서 밥을 먹었다. 아이들이 가져온 반찬이란 게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회의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주말을 빼면 매일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다녀야 했다. 나는 대구에 사는 맏형님의 단칸 셋방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당연히 내 도시락을 싸는 건 형수의 몫이었다. 형수는 시장에서 사 온 미제 이유식 거버(Gerber) 병에다 반찬을 담아 주었다.

 

▲ 도시락은 보자기로 쌌다.

흔히 ‘벤또’라고 부르던 내 도시락은 누런 직사각형의 운두(그릇이나 신, 모자 따위의 둘레나 둘레의 높이)가 좀 높은 양은 도시락이었다. 나는 세상에 도시락은 그렇게 생긴 것뿐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학교에 가니 꽤 많은 아이가 운두가 낮은 대신 크기가 교과서만 한 세련된 형태의 양은 도시락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내 것처럼 누런 것도 있었지만 은빛이 많았다.

 

처음엔 그 차이를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나지막한 운두의 도시락은 단순한 형태를 넘어서 도시와 그 도시의 세련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도시락을 쓰는 아이들은 반찬도 소시지 따위를 싸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과 같은 도시락을 갖추고 싶었으나 내 바람이 이루어진 것은 뒷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서둘러 도시락을 꺼내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아이들 대부분은 제 짝꿍과 나란히 앉아 얌전하게 밥을 먹었지만, 뒷자리의 어깨가 벌어지고 드문드문 수염이 난 아이들은 여럿이 둘러앉아 떠들썩하게 식사를 하곤 했다.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난 형수의 음식 솜씨는 좋았던 것 같다. 어린 시동생의 도시락을 매일 챙겨주는 게 만만찮은 일이었을 텐데, 그걸 그리 불만스러워했던 것 같지는 않다. 형수가 싸준 내 도시락 반찬은 늘 레퍼토리가 정해져 있었다.

▲ 우리나라에선 미국 거버의 이유식 빈 병이 반찬통으로 쓰였다. 거버는 나중에 네슬레에 합병되었다.

노랗게 물들인 단무지, 졸인 어묵, 그리고 오징어채 무침이 그것이었다. 김치가 가장 흔한 반찬이었을 텐데 김치를 싸서 다닌 기억은 별로 없다. 다만 김치를 싸 온 아이들이 국물을 흘려서 벌겋게 된 도시락 보자기가 떠오르곤 할 뿐이다.

 

김치나 국물이 흐를 수 있는 반찬에는 앞서 말한 거버 병이 최고였다. 어떻게 된 물건인지 이 미제 이유식 병은 ‘물샐 틈’이 전혀 없었다. 밀폐 용기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김칫국물을 제대로 갈무리해 줄 수 있는 국산 상품은 없었던 게다. 반찬통으로 미제 이유식 병을 썼던 게 바로 1960년대식이었고, 그건 꼼짝없이 당시 나라 수준이었던 것 같다.

 

거버 병은 새지 않는 대신 거기에 여러 가지 반찬을 넣지 못한다. 여러 칸의 플라스틱 반찬통이 나온 것은 뒤의 일이니 그게 어쩌면 어머니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 반찬통을 핑계 삼아 한 가지 반찬만 준비해도 되었으니 말이다.

 

도시락 반찬의 변천

 

글쎄, 먹성이 한참 좋을 때라 그랬을 수도, 형수의 음식 솜씨가 좋아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나는 내 도시락 반찬에 어떤 불만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싱거웠던 게 아닌가 싶은데 나는 단무지와 어묵은 물론 오징어채 무침을 맛있게 먹었다. 그때 오징어채 무침은 꽤 고급 반찬이 아니었나 싶다.

 

단무지를 처음 먹어본 게 초등학교 4학년 때다. 한 사나흘 결석할 만큼 나는 꼬빡 앓아누워 있었다. 당연히 입맛이 없어 제대로 먹질 못했는데, 할머니께서 어디선가 얻어온, 난생처음 보는 반찬이 바로 단무지였다. 할머니가 ‘다꾸앙’이라고 소개한 그 반찬은 우선 색감부터 식욕을 자극했다. 게다가 노란 국물의 그 감칠맛이라니. 나는 앓아누운 뒤 처음으로 밥을 얼마간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원래 담백한 마른반찬, 김이나 달걀찜, 오징어채 무침, 감자채 볶음 따위를 잘 먹었다. 도시락 반찬으로 자주 먹게 되면서 단무지도 즐겨 먹는 반찬의 목록에 올랐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김이나 달걀은 꽤 고급 식자재여서 제삿날이나 명절날이 아니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 그 시절의 도시락 반찬들

중학교 신입생 때 함께 도시락을 먹는 옆자리의 짝꿍은 교외의 양계장 집 아들이었다. 그 아이는 늘 도시락 밥 위에 달걀 부침(프라이)를 덮어왔고, 반찬도 달걀말이 따위를 즐겨 싸 왔다. 나는 내 도시락에 다른 불만이 전혀 없었지만, 그 아이의 달걀 반찬은 몹시 부러웠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반찬은 나와 인연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이나 달걀을 요즘처럼 흔전만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긴 했다. 그러나 형수가 그걸 사서 반찬을 만들어 줄 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짝꿍이 도시락 뚜껑을 열면 나타나는 달걀부침과 그걸 걷어내면 드러나는 기름이 배어 얼룩진 밥을 잊지 못한다. 교직에 들어와 한동안 도시락을 사야 했을 때, 아내가 빠지지 않고 달걀부침을 얹어준 것은 내 학창시절의 결핍에 대한 보상이었다.

 

2학년 때는 작은누나, 이듬해엔 큰누나댁 신세를 졌는데 이때도 도시락 반찬은 별 변화가 없었다. 단무지나 어묵 따위는 서민들이 가장 손쉽게 이용하는 음식 재료였기 때문이다.

 

누나들에게선 반찬 한 가지가 더 늘었다. 감자채 볶음이 그것이다. 감자와 양파를 채로 썰어서 프라이팬에 볶은 이 반찬은 한 번씩 풋고추까지 곁들이면 최고의 반찬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 반찬을 즐겨 아내에게 주문하곤 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자취를 할 때는 도시락 반찬으로 김치를 넣어 가는 게 고작이었고, 나중에는 밥만 싸 가서 학급을 한 바퀴 돌아 반찬을 한 가지씩 얻어먹곤 했다. 간신히 밥은 했지만, 김치 말고 달리 반찬을 만들 만한 재주 따위는 애당초 없었던 탓이다.

 

여느 아이들과 달리 고기반찬, 쇠고기 장조림이나 소시지 따위를 싸서 다니는 아이들은 학급에서 많지 않았다. 그들은 앞서 말한 대로 납작한 책 모양의 도시락을 썼고, 거기 담긴 밥도 꼭꼭 누르지 않고 슬슬 피워서 담은 것이었다. 뒤에 이들은 플라스틱으로 된 여러 칸의 반찬통을 사용하여 여러 종류의 반찬을 가져오기 시작했던 듯하다.

 

도시락 반찬 이야기지만 나는 어렴풋이 그것을 통하여 아이들의 계층이 나뉘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다. 계층은 도시락이나 반찬통, 거기 담긴 여느 아이들과는 다른 밥과 반찬을 통해서 시나브로 드러났다. 그것은 한편으로 ‘세련’과 ‘고급’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여느 아이들과 그들을 구별 짓고 있었다.

 

도시락과 학교 급식, 복지논쟁

 

그러나 의식하지 않는 이상, 그게 아이들 사이에 위화감을 만들거나 가정 형편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부잣집 아이들 몇을 빼면 나머지 아이들 대부분의 사정은 거기가 거기였기 때문이다. 6·70년대만 해도 빈부의 격차가 오늘날과는 비교하기 어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도시락 데우기. 그러나 난로를 피우는 날은 매우 드물었다.

학교에 급식이 도입되면서 아이들은 도시락으로 제 집안 형편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동안 식생활 수준은 그 시절과는 견주기 어려울 만큼 높아졌고 높아진 만큼 도시락 반찬으로 드러나는 격차는 더 커질 수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학교 급식은 2000년대 들면서 무상급식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여야 사이에 복지정책을 다투는 소재로 비약했다. 그리고 이는 보편적 복지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환기하며 무상급식 비율이 확대되는 계기로도 발전했다. 2015년 현재 부산을 뺀 영남권 4개 시도(울산·경남·대구·경북)를 제외하면 전국의 초등학생들에게 의무급식이 시행되고 있다. (영남권 4개 시도가 초등학교 의무급식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은 2018년이 되어서다.)

 

도시락(밥)의 변천은 우리나라가 해방 후 가난한 독립국에서 근대화 과정을 거쳐 개발도상 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같이 한다. 그것은 작게는 한 시민의 성장사지만, 그것을 통해 가정 경제의 한 단면과 복지정책의 변천을 짚어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도시락에 얽힌 이야기는 이밖에도 여럿이다. 혼식과 분식을 장려하면서 도시락 검사도 그랬고, 고등학교 때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도시락을 ‘까먹는’ 일 때문에 일어난 촌극도 많았다. 무쇠라도 녹일 나이 아니었던가. 간신히 잠에서 깨어 제대로 아침도 먹지 못하고 등교했으니 1교시를 마치기도 전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마련이었다.

▲ 혼분식 장려 포스터(1970년대)

교실에 선풍기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겨울에는 연통을 길게 뺀 무쇠 난로를 설치했다. 땔감이 뭐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난로를 피운 날이 고작 며칠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난로 위에는 언제나 주번이 식당에서 받아온 대형 알루미늄 주전자가 얹혀 있었는데, 우리는 도시락 뚜껑에 그 미지근한 물을 받아놓고 밥을 먹었다.

 

난로 위에 높다랗게 쌓아놓고 도시락을 데우던 기억은 있긴 한데 희미하다. 불을 때는 날보다 때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었으니, 도시락을 데우던 기억이 가물가물할 수밖에. 지난해 군위 화본마을의 추억박물관에서 만난 무쇠 난로와 그 위의 도시락 더미를 내가 신기한 느낌으로 오래 바라본 것은 그래서였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는 꽤 오랫동안 도시락을 싸 다녔다. 특히 복학하고 나서 동기 복학생들과 학생식당에 모여앉아서 밥을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의사의 왕진 가방 같은 까만 가방을 들고 다니던 때였는데, 그건 도시락과 반찬통을 넣고 다니기에 그만이었다.

 

도시락으로 반추하는 성장기

 

80년대 이후 학교 급식이 이루어질 때까지 도시락 반찬의 변천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학교 소재지가 시골이라 밥을 사 먹기가 곤란한 경우엔 교사들도 가끔 도시락을 싸야 하는 경우가 더러 있긴 했다. 그때 내가 싸 간 도시락도 예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진화한 반찬통에 달걀말이나, 우엉 조림, 고추 찜 무침 따위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쇠고기로 만든 장조림이나 고추장 볶음 따위를 넣기도 했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콩잎이나 깻잎 김치, 두부조림 따위를 더 선호했다. 아이들에겐 햄이 소시지를 대체하는 반찬이었던 것 같다.

 

밀폐 용기가 나오고 보온 도시락이 보급되었어도 나는 여전히 옛 도시락을 좋아했다. 인위적으로 온기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외부에 열을 빼앗기고도 여전히 희미하게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락밥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보온밥통의 밥보다는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둔 밥을 더 좋아한다.

 

도시락은 그걸 싸는 사람에게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주지만 먹는 이에겐 엔간한 호사가 아니다. 비록 신 김치나 어묵 무침에 그친다고 할지라도 그걸 어찌 식당에서 사 먹는 밥에 비길 수 있을까. 겨울엔 밥이 식는 게 아쉽긴 하지만 꼬들꼬들한 밥알을 씹는 맛은 그걸 상쇄해주고도 남으니 말이다.

 

나는 지금도 도시락밥을 즐긴다. 방학 때 학교에 남아 일을 해야 할 때면 나는 아내에게 주문하여 도시락을 챙겨가곤 한다. 밥은 적당히 식어도 상관없다. 식으면서 훨씬 차져진 밥알과 적당히 식은 반찬을 씹으면서 나는 아련하게 저 아련한 시절의 도시락, 내 성장기를 반추하곤 하는 것이다.

 

 

2015. 11.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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