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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접도(花蝶圖), 혹은 욕망의 끌림

by 낮달2018 2019.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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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화접도’ 고운 쥘부채를 사다

▲ 중앙박물관에서 산 화접도 쥘부채. 화접도는 19세기의 선비화가 남계우(南啓宇, 1811~1888)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쥘부채를 하나 샀다. 중앙박물관은 처음이었다. 전국교사대회에 참석하기 전 우리 지회는 박물관에서 두어 시간을 보냈다. 일부는 ‘파라오 특별전’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박물관 전시실을 순례하며 시간을 보냈다.

 

언젠가 중앙박물관을 찾으리라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정작 잠시 들른 박물관에서 나는 좀 어정쩡했다. 아예 박물관 구경을 목표로 한 걸음이 아니었던 탓이다. 나는 동행한 역사 전공의 후배 교사를 길라잡이 삼아 그의 해설을 귀담아들으며 한 시간쯤 전시실을 두루 돌아다녔다.

▲ 남계우(1811~1888) 작  ‘나비’. 중앙박물관 소장

전시물 조명은 따로 있었지만, 안경을 끼지 않은 내게 전시실은 대체로 좀 어두웠다. ‘깬석기’나 ‘빗살무늬토기’ 따위의 우리말 이름이 좋았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타제석기’와 ‘즐문토기’ 따위의 한자어로만 역사를 배웠기 때문이다.

 

전시실을 돌다 복도로 나왔는데, 거기 기념품점이 있었다. 원래 나는 어디를 가든 기념품 따위를 사는 성미가 아니다. 그런데 공연히 뭔가가 당겼던가 보았다. 나는 진열장 속에 든, 예사롭지 않은 기념품들 구경을 시작했다.

 

눈길이 머문 데가 쥘부채였다. 하나는 푸른빛이 나는 산수화가 그려진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리따운 나비 그림이었다. 좀 점잖은 단색화인 앞엣것보다는 나는 뒤엣것의 빛깔에 몹시 마음이 끌렸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나비 그림을 골랐다.

 

부채를 포장한 길쭉한 상자 안에 그림 설명서가 들어 있었다. 그림은 ‘꽃과 나비’를 그린 화접도(花蝶圖). 그린 이는 19세기의 선비화가 남계우(南啓宇, 1811~1888)다. 그는 나비 그림에 뛰어나 ‘남 나비’라고까지 불린 조선 말기의 화가라 한다. 화가가 채색으로 섬세하게 묘사한 꽃과 나비는 선명하고 화사하다.

 

어차피 내게는 그림을 제대로 살필 능력은 없다. 나는 그림을 보고 단지 ‘곱다!’고 느꼈고 그것은 사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그 감정에 좀 묘한 울림이 있었다. 거기에는 무언가 아련한 미련 같은 것, 혹은 이루어질 수 없는 유혹 같은 미묘한 감정의 자락이 깔려 있었다.

 

나는 원색의 옷을 입어 본 적이 없다. 화려한 원색의 빛깔 앞에서는 천리만리 도망가는 사람이다. 그나마 입는 색상은 청색 계통이 유일하다. 그런데도 어느 날부턴가 그런 짙은 색상의 옷을 입은 사람들(정확히 여자들)의 모습이 심상하게, 아무 거부감 없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 이탈리아 배우 모니카 벨루치.  순수와 농염 사이.

여성들의 화장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각은 꽤 중층적이다. 대체로 젊을 때는 화장하지 않은 순수한 민얼굴을 좋아하는 듯한데, 그게 반드시 남자들의 일반적 경향은 아닌 것 같다. 취향의 개인차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남자들은 여성들의 화장기 없는 민얼굴을 좋아하는 만큼 화장한 여인이 뿜어내는 고혹적인 분위기에 대한 선호도 쉬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경계는 다소 무뎌지지 않나 싶다. 말하자면 민얼굴의 순수와 ‘고혹적 화장’의 거리란 기실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다. 화장 속에 버무려진 여인의 관능, 매혹적 끌림이나 맑고 민얼굴의 순수는 기실 한 얼굴의 두 측면이라는 걸 비로소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아름다움에 목마른 이들의, 천박하고 조급한 욕망처럼 보이던 여성의 화장이 아주 무던하게 다가오는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화사한 화장은 물론이거니와 손톱에 정성 들여 칠한 매니큐어나 볼연지나 어쩌면 과하다 싶은 눈 화장, 귀고리나 팔찌 등의 장신구조차 넉넉하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화장과 장신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타인에게 아름답게 다가가고 싶은 여성 본능의 직접적 표현이다. 그것은 흔히들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숨기고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본질을 향해 성큼 다가서는 것이며 누구에게도 쉬 드러낼 수 없는 내밀한 자기 정체성의 확인 같은 건 아닐는지.

 

화장을 포함한 여성들의 단장(丹粧)을 바라보는 시선이 넉넉해지는 것은 성마르게 집착하던 ‘순수’란 게 일종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깨달음과 맞닿아 있다. 조금 더하거나 덜하거나 하더라도 본질이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 낙동강변의 금계국.  강렬한 원색은 아련한 미련 같은 것, 혹은 이루어질 수 없는 유혹 따위의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날부터 여성들의 좀 짙은 화장도 심상하게 바라보게 되면서 나 역시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너그러움이라 표현하기보다는 거기에 은근히 끌리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솔직할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곱고 화사한 것, 혹은 그것이 환기하는 어떤 불가해한 욕망 같은 것에 대한 끌림 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매니큐어를 한 여성들이나, 화려한 장신구를 걸친 여성들을 이제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노랗고 빨갛게 물들인 여성의 풍성한 머릿결에서 나는 건강한 에로티시즘을 느끼기도 한다. 또 하이힐을 신은 여성의 단아한 모습에서 나는 일종의 기품마저 느끼곤 하는 것이다.

 

그것 역시 ‘나이 듦’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문득, 가 버린 시절과 그것을 되돌아보는 저물녘의 쓸쓸함 같은 것. ‘곱고 화사함’, 그것은 어차피 젊음 그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젊음의 아쉬운 그림자 같은 것이니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현재를 반추하는 것은 아닐는지.

 

앞서 말했듯, 나는 두 개의 부채 중에서 하나, 곱고 화사한 ‘화접도’를 골랐다. 돈을 치르면서 나는 내 선택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걸 위해 쓴 일만 원이 나는 전혀 아깝지 않았다. 나는 동료들에게 내가 산 화접도 쥘부채를 자랑했다.

 

“곱지?”
“곱네요.”
“그래서 샀어.”
“나이 드시니 고운 게 좋으신가 봐요.”
“그런 거 같아.”

 

나이 탓이라 해도 나는 전혀 서글프지 않았다. 나는 돌아와 부채를 아내에게 건넸다. 아내도 곱다고 반색을 했다. 아직 쥘부채를 손에 붙일 만큼 덥지는 않다. 자연 쥘부채는 아내의 화장대 위에 곱게 모셔져 있다. 나는 가끔 그걸 펴 보고 그 화사한 색감이 주는 느낌을 오래 음미하곤 한다.

 

 

2009. 6.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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