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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김영갑, 그 섬에 그가 있었네

by 낮달2018 2019.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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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갑의 제주도’를 기리며

▲  사진가 김영갑 (1957~2005).  ⓒ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누리집

다시 제주를 찾았다. 이태째다. 지난해보다 한 달쯤 이른 방문이었지만 제주는 일 년 전 만났던 모습 그대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대부분의 여정은 지난해의 그것을 되밟는 과정이다. 버스 앞자리에 앉아서 나는 이 남도의 섬 곳곳을 무심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는 삼나무 숲과 동백꽃의 행렬, 나지막한 돌담으로 둘러싼 밭과 거기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양배추나 마늘, 쪽파 등의 농작물과 함께 나른하게 봄이 익어가고 있었다. 밭 한가운데나 ‘오름’ 주변에 자리 잡은 ‘산담’이라 불리는 무덤이 정겨웠고, 이제 드문드문 꽃을 피우고 있는 유채꽃이 슬프도록 화사했다.

▲ 절물휴양림. 제주도에는 어디서나 삼나무숲을 만날 수 있다.
▲ 절물휴양림의 연못. 나는 못 안의 섬에서 삼신산(三神山)을 떠올렸다.

터질 듯한 소녀들의 드높은 웃음소리와 싱그러운 재잘거림 속에 제주의 봄은 새롭게 깨어나는 듯했다. 더러는 화장을 하고 짧은 치마와 굽 높은 구두 등으로 한껏 멋을 낸 소녀들에게 미지의 섬에 당도한 봄은 축복 같았다. 아이들은 마치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라는 듯 쉬지 않고 먹어댔고 사진 찍기에 열중했다.

 

셋째 날 오전의 여정에서 우리는 한 ‘댕기 머리’ 사내를 만났다.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의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나는 물론 그전부터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주에서 그 섬의 사계와 풍광을 담는 데 자신의 젊음을 바친 사진작가로만 그를 기억하는 것은 김영갑을 ‘아는 것’이 아니다……. 김영갑이 온 힘으로 지어낸 ‘갤러리 두모악’의 마당에서 나는 비로소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의 사계.  두모악 누리집에서 .
▲  김영갑의 수상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휴먼앤북스, 2004)와 사진집 <김영갑>(다빈치, 2006)

지난해 12월 어느 날, 나는 한 선배 교사로부터 김영갑의 사진집을 선물 받았다.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던 작가의 뜻을 따랐던 걸까. 사진집은 건조하게 그의 이름을 땄다. 부제처럼 붙은 건 그의 생몰연대(1957~2005)와 생뚱맞게 영문으로 쓴 ‘바람, 들, 오름, 구름’이었고 역시 영문으로 쓴 ‘김영갑, 사진, 그리고 제주도’가 가지런히 박혀 있었다.

 

사진집에 펼쳐진 김영갑의 이미지는 놀라웠다. 그가 찍은 사진은 파노라마, 옆으로 길게 퍼진 경치 따위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사진이다. 그것은 그의 사진집에 ‘바람과 들, 오름과 구름, 그리고 제주도’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이 저절로 깨달아지게 해 주었다. 나는 조금씩 아껴두고 보리라고 그 책을 서가 한쪽에 모셔 두었는데 어느 날엔가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에 나는 그 선배 교사로부터 ‘김영갑 갤러리’를 여정에 넣으라는 충고를 기억했고 그렇게 했다. 그러면서도 갤러리에 닿기 전까지 나는 무심하고 심드렁했다. 여전히 나는 한 예술가와 그가 자신의 영혼을 투여해 생산해 내는 작품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라 한다.)은 단순히, 폐교된 초등학교 터에 만들어진, 이미 세상을 떠난 한 작가의 유작이 지극히 소박한 형식으로 전시되고 있는 곳이 아니다. 두모악은 한 예술가가 땅과 들, 바람과 구름 따위의 자연과 교유하면서 빚어낸 예술과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치열한 삶의 증거물이다.

▲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의 풍경들

옛 초등학교를 보수해 만든 화랑을 돌면서 나는 김영갑의 사진과 거기 수 놓인 제주의 산과 들, 제주의 햇빛과 바람을 만났다. 나는 빛과 색으로 재현된 그의 사진을 다만 스치듯 바라보면서 화랑을 한 바퀴 돌았다. 잠긴 작가의 작업실 앞에서 잠깐 안을 들여다보았고, 사무실에서 그의 수상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샀다.

 

나는 두 번째 전시실에 펼쳐진 방명록에다 “위대한 예술, 위대한 작가, 위대한 삶”이라고 썼다. 나는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위대하다’는 형용사의 함의(含意)를 새롭게 이해하는 느낌이었다. 화랑을 나왔을 때, 제주도의 상징인 바람과 돌, 그리고 사람을 주제로 꾸민 아름다운 정원, 그의 뼈를 머금은 마당엔 정오의 햇살이 가득했다.

 

짧은 이동 기간, 나는 그의 수상집을 읽어 치웠다. 그것은 한 작가의 치열한 삶의 기록이었고, 그가 담았던 제주의 산과 들, 바람과 구름에 대한 오롯한 사랑의 고백이었다. 그것은 또 근 위축성 측삭경화증, 이른바 루게릭병으로 알려진 퇴행성 질환을 앓으면서도 갤러리를 만들며 치러낸 김영갑의 투병 기록이기도 했다.

 

김영갑은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다. 돈과 명예는 물론이거니와 연인과의 사랑과 혈육의 정조차 버렸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육신마저 팽개치고 독자적인 사진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한라산을 자신의 ‘영혼의 고향’으로 여겼으며, 제주를 제주인보다 더 사랑했다. 그래서였던가, 그는 20년 동안 자연에 몰입하여 제주 사람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 ‘이어도’를 발견했다고 선언했다.

 

그는 제주의 대자연이 연출하는 황홀한 아름다움을 ‘오르가슴’으로 느꼈고, 그것을 위해 ‘문명’을 떠나 제주도 중산간의 초원에 묻혀 살았다. 그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활동한 이다. 1982년부터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하다가 1985년부터 아예 섬에 정착했다. 제주도에는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도 없고, 그가 찍지 않은 것도 없다.

▲ 김영갑, '구름이 내게 가져다 준 행복'. ⓒ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누리집
▲  김영갑의 사진 '눈 비 안개 그리고 바람 환상곡'. ⓒ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누리집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궁금해 사진가가 되었’고 ‘사진을 찍으며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다. 대자연의 신비를 느끼고 하늘과 땅의 오묘한 조화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사진이 ‘외로움과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그는 ‘한 장의 사진에는 사진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 장의 사진을 위하여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그는 사진을 위하여 궁핍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 외로움의 극단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는 끼니를 거르면서 모은 돈으로 일 년에 한 차례씩 ‘누구를 위한 전시회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전시회를 열었다.

 

최선을 다해 전시회를 준비하지만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녀갔는지, 얼마나 많은 작품이 팔려나갔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애썼고 사진으로 밥벌이를 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땅에서 자기가 원하는 사진만을 찍으며 산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살았다.

 

그는 제주에 살면서 살아 움직이는 제주의 역사, 노인들을 통해 제주 사람들의 삶을 이해했고, 그들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자기 몫의 삶에 치열’한 제주 노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는 자신의 혼란과 시련을 넘어섰다. ‘온갖 두려움과 불안, 유혹 따위를 극복하고 삶에 열중하는 섬의 노인들은 나의 이정표’라고 그는 고백한다. 그의 스승은 자연이기도 했다.

 

초원에도, 오름에도 바다에도 영원의 생명이 존재한다.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감을 느낌으로써 나는 신명과 아름다움을 얻는다. 나는 자연을 통해 풍요로운 영혼과 빛나는 영감을 얻는다. 초원과 오름과 바다를 홀로 거닐면, 나의 영혼과 기억 그리고 자연이 하나가 되어 나의 의식 속으로 스며든다. 그럴 때면 훌륭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도 사라진다.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85쪽

 

그가 선택한 궁핍과 고독의 구도의 길 끝에 그에게 병마가 찾아들었다. 그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루게릭병 진단을 받는다. 길어야 5년이라는 이 퇴행성 질환과 그는 싸우기 시작했다. 이어도의 비밀을 찾아낸 예술가에게 내려진 형벌은 가혹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온몸의 기력이 소진해 카메라를 들기는커녕 손가락 힘이 없어 셔터조차 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거나 앞뒤로 움직일 수도 없다. 잔인한 통증 때문이다. 허리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고 두 다리는 후들거려 중심을 잡기도 힘들다. 돌멩이 하나에도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 일쑤이다. 팔의 근육이 녹아 버려 한 손으로는 휴지 한 장 들어 올릴 수가 없다. 국물에 밥을 말아도 목으로 넘기지 못한다. 죽을 넘기기에도 힘에 부친다.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193쪽

▲ 두모악 갤러리의 전시 공간. ⓒ 김영갑 갤러리 누리집

여러 형태의 투병에도 진전이 없자, 그는 과감히 약을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선택한 일은 창고에 쌓여 곰팡이꽃을 피우고 있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그리고 점점 퇴화하는 근육을 놀리지 않기 위해 몸을 움직여 2002년 ‘갤러리 두모악’을 완성했다. 그것은 한 예술가의 영혼이 육신의 피폐와 힘겹게 싸워 거둔 눈부신 승리였다.

 

힘겨운 투병의 시간 동안에도 그는 육친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들이 내민 구원의 손길을 거부하고 그는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고통만큼 형제들의 고통이 더 크리라 믿었던 까닭이다. 가족들을 보내고 그는 그렇게 고백한다. ‘단 한 번도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다.’ 그는 살아생전에 어머니가 자신의 육신을 키워주었고 돌아가신 뒤에는 자신의 영혼을 살찌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그를 거두었던 누이에 대한 사랑을 되새긴다.

 

투병 여섯 해째인 2005년 5월 29일 김영갑은 자신의 갤러리에서 눈을 감았고 그의 뼈는 두모악의 마당에 뿌려졌다. 그 반역의 삶은 끝났는가. 그의 삶은 예술이 반역이고 저항이라는 걸 일깨워 준다. 한 작가의 위대성은 그의 작품에 깃든 영혼의 무게에 비례하는지 모른다. 그의 생애는 우리의 진부한 일상을 향해 삶이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어야 하는가를 반증한다.

 

한 사내의 생을 저울에 달아보아 평균율에서 치우치거나 모자라면 우리는 기인이거나 아니면 천치라 부르길 꺼려하지 않는다. 또는 잘 쳐 줘야 못난 사내밖에 안 된다. 일상적인 삶의 행렬에 그를 세워놓았을 때 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순전히 편하기만 한, 평범한 사람들의 기준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돌출의 혁명을 꿈꾸고 일탈의 자유로움을 사려 든다. 그것도 아주 값싸게, 아니면 신용카드 긁듯이 무심코. 그러나 마흔 나이를 훌쩍 넘긴 한 남자가 우리에게 외친다.

파도와 오름과 풀잎들, 벌레들과 번민과 증오, 그리고 너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름으로 외로움을 처절히 세울 때, 내 비로소 자유와 예술의 등 굽은 몸뚱아리에 향유를 바를 수 있었노라고, 결국 제주도는 사랑이었다고, 소름 끼치는 그리움이라고…….

      - 정희성,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누리집(http://www.dumoak.co.kr/)에서

▲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제주도. 김영갑은 이 섬의 ‘외로움과 평화’를 사랑했다.

제주를 떠나기 전까지 내내 나는 김영갑과 함께 있었다. 갤러리에 걸린 파노라마 사진 한가운데서, 작업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그리고 권혁재가 찍은 사진 속에서 김영갑은 무심한 시선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해 제주 상공으로 떠올랐을 때 나는 눈 아래 전개되는 제주의 들과 산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짐짓 입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김영갑,
그 섬에 그가 있었네.
영원히.

 

2008. 3. 23. 낮달

 

▲ 김영갑 갤러리 가는 길. ⓒ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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