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딱구두'의 근원적 여성성
어릴 적에는 하이힐을 ‘빼딱구두’로 불렀다. ‘빼딱’은 의태어 ‘빼딱하다’의 어근인데 그게 하이힐이란 놈의 좀 요상한 구조를 가리키면서도 그런 구두를 신는 여성 일반을 바라보는 ‘삐딱한’ 태도를 이르기도 하지 않나 싶다. 하이힐을 위태하게 신고 치마 안의 팽팽한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걷는 이른바 ‘하이칼라’ 여성들을 바라보면서 그 시절 사람들은 이 첨단의 유행에 대한 일종의 적의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빼딱구두’의 추억
저런 모양의 신발을 신고 어떻게 걷나 싶을 만큼 독특한 구조를 가진 그 구두를 신고 늠름하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첨단의 유행을 소화해 낼 수 있다는 능력을 의미하는 거였다. 당연히 이들이 하이힐을 신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걸음걸이 자세―무게중심이 발 앞에 쏠리면서 엉덩이는 빠지고 가슴이 앞으로 솟는―는 그런 자부심의 표현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때 앞으로 봉긋 솟은 가슴이 ‘청춘의 상징’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정확하게 기억하기 어렵지만 내가 하이힐을 처음 만난 것은 적어도 초등학교 4학년 때 이후였음은 분명하다. 윤복희였든 아니었든 간에 이 땅에 미니스커트가 들어온 게 1967년께였고 내가 만난 하이힐의 위쪽은 대체로 미니스커트 차림이었으니 말이다.
하이힐보다는 부드러운 손의 감촉으로 기억되는 사람은 4학년 때 잠깐 우리를 가르쳤던 여교사였다. 담임선생님은 따로 있었는데 어떤 연유로 그이가 우리를 가르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짐작건대는 아마 교육실습을 나온 교생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해 본다.
이름도 생생하다. ‘윤정강’이라는 이름의 그 여선생님은 아주 나긋나긋한 서울 말씨를 썼다. 그이는 서울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투박한 우리 지역 말씨가 아닌, 표준어 낱말을 제대로 구사하는 상냥한 말투는 모두 ‘서울말’로 여겼으니까 말이다.
그이는 예뻤던 것 같지는 않다. 큰 키에다 피부가 유난히 희었고 살집이 좋았던 것 같다. 요샛말로 글래머였던 셈인데, 나는 그이의 상냥한 말씨와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던 그이의 부드러운 손길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이가 신었던 구두가 하이힐이었다. 가을이었던 것 같다. 학교 교문 앞 진입로 가녘에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으니까. 그이의 하이힐은 굽이 나지막한 하얀 색 구두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의 큰 키를 고려한 높이였던 듯하다. 하얀 블라우스에다 치마도 무릎이 살짝 드러나는 검정 치마였다. 60년대 여자 대학생들이 흔히 교복으로 입던 것 같은 차림 말이다.
내가 만난 두 번째 하이힐의 주인은 나보다 열한 살 위의 작은누나였다. 일찌감치 도회에 나가 있었던 누나는 어느 날 미니스커트에 꽤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내 앞에 나타났다. 누나의 다리는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어도 좋을 만큼 적당히 날씬했다.
그러나 나는 누나가 빨리 도시로 돌아갔으면 하고 바랐다. 그래서 누나가 언제쯤 집을 떠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다. 나는 가능하면 누나의 모습이 동네의 동무들에게 노출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누나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들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고 어쩐지 아깝기도 한 아주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도회의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나는 일상적으로 하이힐을 신은 여성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일상이 됨으로써 나는 하이힐을 신은 여성을 아련하게 바라보던 시골뜨기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나는 한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고, 두 아이의 아비가 되었다.
내가 하이힐을, 그걸 신은 여성을 초등학교 때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40대에 들어서였다. 어떤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떠난 길 위에서였다. 함께 탄 후배 교사들과 여자를 주제로 한 이야기 끝에 ‘나는 하이힐을 신은 여성이 좋다.’고 말했다. 그 얘길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게 내 정서의 일부였다는 사실의 희미하게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친구들, 그걸 좀 성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듯,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여성들을 향해 ‘저기도 하이힐!’ 어쩌고 하면서 날 놀려댔다.
하이힐, ‘상냥함과 친절’, 여성성의 어떤 징표
물론 포르노그래피에 등장하는 팔등신의 여성들이 굽 높은 킬힐을 신고 도발적으로 서 있는 그림을 적지 않게 보았다. 그리고 그 여성들이 온몸으로 드러내는 ‘섹스 어필’에 대한 내 느낌이 여느 통념과 동떨어진 것도 아니다. 포르노그래피의 범주 가운데 ‘하이힐’이란 영역이 따로 존재하기도 하는 듯하니 말이다.
그러나 하이힐을 바라보는 내 정서는 초등학교 시절의 여선생님을 바라보는 내 눈길과 그리 멀지 않다. 그것은 상냥하고 친절한 여성성의 어떤 징표로, 내면의 성숙을 갈무리하는 여성적 아름다움의 일부로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작 가운데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는 노동조합과 회사의 대표들이 협의하는 대목이 나온다. 노동자를 대표하는 노동조합 지부장으로 영이가 회의에 참석하는데 그녀를 묘사하는 두 개의 문장은 조세희 문체를 대표하는 단문이다.
“영이는 흰 원피스에 흰 구두를 신었다. 영이는 예뻤다.”
나는 군 복무 중이었던 70년대 말에 그 책을 읽었다. 나는 영이가 신은 흰 구두가 하이힐일 거라고 제멋대로 생각해 버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예의 대목이 자꾸 ‘하얀색 굽 높은 구두’로 읽히곤 하니까.
그걸 그렇게 읽히도록 하는 것은 어린 여성 노동자 영이의 분노와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그녀의 안간힘이다. “무슨 돈으로 그렇게 예쁘게 차려입었느냐?”라고 묻는 사용자 대표의 질문에 답하는 영이의 당당한 모습은 슬프고도 아름답다.
“저는 혼자 살아요. 부모님도 안 계시고, 학비를 대줘야 할 동생들도 없습니다. 저는 많이 먹지도 못하고, 맛있는 것을 골라 군것질도 하지 않습니다.
일하지 않는 시간엔 피로해서 잠만 잤습니다. 옷도 깨끗이, 오래 입으려고 늘 신경을 썼습니다. 이 옷과 구두는 저축한 돈으로 산 것입니다. 지금은 종업원을 대표하는 입장이라 깨끗이 입고 나오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차려입기 위해 저는 3급 근로자의 한 달 임금보다 더 많은 돈을 썼습니다.”
‘물건이나 특정 신체 부위 등에서 성적 만족감을 얻는 것’을 뜻하는 페티시즘(fetishism) 또는 페티시로 하이힐을 이해하는 이에겐 그건 성적 욕망을 보조하는 사물에 그칠 터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 그것은 힘을 부드러움으로 견인하는 가장 근원적인 여성성의 징표다. 그것은 여성적 아름다움의 일부이면서 모든 갈등과 모순을 녹여내는 근원적인 힘이다.
남자 못잖게 강단 있는 주변의 여성 활동가들이 하이힐을 신은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어떤 안정감, 그들이 감추고 있는 포용력과 순수한 인간에 대한 사랑의 힘을 깨닫고 놀라워한다. 그렇다. 그이는 여성이었지…….
내가 처음 만난 하이힐은 미니스커트와 짝을 이루고 있었지만, 하이힐은 바지에도 잘 어울린다. 나는 여성들이 바지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모습도 신선하게 바라본다. 치마에다 하이힐이 제격이긴 하지만 바지와 맞춘 하이힐도 앞서 말한 여성성으로 충만해 있는 것이다.
젊은 연예인들이 즐겨 신는 이른바 킬힐(kill heel)은 같은 하이힐이면서도 주는 느낌이 매우 다르다. 당사자가 느낄 불편함도 마음에 걸리지만 어쩐지 외국산 포르노그래피를 보는 듯한 천박한 느낌이 짙은 까닭이다. 10cm가 넘는 굽의 구두를 신고서 엉덩이와 지체를 흔들며 위태롭게 춤추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은 매력적이기보다는 안쓰럽고 불편해 보이는 것이다.
아내도 젊은 시절엔 하이힐을 즐겨 신었다. 그러나 요즘은 격식을 갖추어야 할 자리에 나갈 때만 하이힐을 신는다. 몇 해째인지 모르는 낡은 구두를 보면서 새 구두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딸애는 여러 켤레의 구두가 모두 하이힐이다.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은 발의 불편과 고통쯤은 너끈히 넘게 하는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하이힐을 신은 모습을 전신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기상캐스터가 대표적이다. 채널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들은 대체로 짧은 치마에 하이힐을 신고 나와 기상 예보를 한다. 본인들은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나는 혹시 방송 중에 다리가 접질리지나 않을까 저어하기도 한다.
홈쇼핑 채널에서 열심히 상품을 팔고 있는 쇼핑호스트들도 기본으로 하이힐을 착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치마든 바지든 상관없이 하이힐을 신고 일하는 것 같다. 채널을 돌리다가 이들의 모습을 스쳐 지나면서 나는 잠깐씩 어린 시절 내 마음에 상냥하게 다가왔던 여선생님, 그이의 따뜻한 체온과 함께 하이힐을 떠올리곤 한다.
2012. 8.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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