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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숲을 걸으며

by 낮달2018 2019.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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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선물, 명징한 깨우침과 서러운 행복감

 

국토의 70%가 산지여서 고개를 돌리면 어디서든 산을 만나는 나라에서 살면서도 정작 우리는 산에 대한 특별한 자의식을 갖지 못하고 사는 건 아닐까. 요즘 거의 날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학교 뒷산을 오르내리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이름난, 높고 깊은 산이 아닌 한, 그저 언덕을 면한 나지막한 ‘앞산’, ‘뒷산’에 둘러싸여 살다 보니 산을 달리 타자(他者)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일까. 산은 땔감을 구하거나 흉년의 주림을 달래주는 갖가지 열매와 뿌리를 내는 구황(救荒)의 땅이었고, 죽어서 그 고단했던 육신을 묻는 공간이었으니 구태여 산을 일상의 삶과 구분할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 뒷산은 안동의 주산(主山)이라는 해발 252.2m의 영남산(映南山)이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산에서 멀어졌던 사람들이 오래고 고단했던 삶에서 놓여나고 선출직 지방 자치단체장들이 그들의 여가를 위해 부지런히 가꾸어 놓은 산행 코스가 여러 갈래다. 대낮인데도 심심찮게 산을 오르내리는 노인들과 중년의 아낙들, 그리고 더러는 아이를 걸리는 젊은 부인들도 만나게 된다.

 

더는 땔감을 구하지 않는 산엔 갖가지 풀과 나무가 다투어 자라면서 빈 데 없이 빽빽한 신록의 물결로 출렁인다. 해마다 옷을 벗으면서 흙으로 돌아가는 나뭇잎으로 땅은 나날이 기름져 가고 그래서인가, 거기 뿌리 내린 나무들의 입성과 때깔은 넉넉하고 싱그럽다.

 

평평한 등성이엔 철봉과 평행봉 등의 간단한 체육 시설과 나무 벤치가 갖추어져 있고, 길가의 크고 작은 평지마다 주민들이 일구어 놓은 밭뙈기들이 점점이 이어진다. 이런 비탈진 땅에서의 경작은, 산사태나 토사의 유실을 우려해 시에서 금하고 있으나 주민들의 ‘바지런’이 놀고 있는 땅을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밭뙈기마다 정성 어린 손길이 가꾸어 놓은 작물도 가지가지다. 고추가 있고, 가지와 땅콩이 있고 도라지와 보리까지 넉넉하다. 조그만 고추밭은 산짐승의 발길을 막느라고 철 지난 현수막을 이어 빙 둘러 울타리를 쳤고 짙푸른 잎이 무성한 도라지밭에는 날아드는 새를 겨냥한 헌 시디(CD)가 햇빛에 반짝였다. 서쪽으로 난 내리막길의 밭에선 시방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리 급할 것도 없는 넉넉한 경사의, 짙은 숲 그늘을 걸으면 숲이 내뿜는 청량한 공기 속에 든 이른바 피톤치드(phytoncide)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 조그만 산이 내뿜는 정화된 대기는 얼마만큼의 시민들이 들이쉬는 숨결이 될까.

 

그리고 이 산이 머금고 있는 빗물과 이 산에 깃들인 야생의 짐승들은 또 얼마일까. 숲이 한 해 동안 베푸는 혜택은 국민 총생산의 10%에 가깝다는 통계는 숲속을 걷는 이들에겐 꼼짝없는 진실이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숲길을 무심히 걷다가 나는 어느 순간, 행복하다고 느꼈다. 일상의 속박과 고단한 삶의 외면할 수 없는 장면과 장면에 깃든 회의와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명징한 깨우침이 정수리를 서늘하게 적시는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격렬하게 목이 메어 왔다.

 

2007. 6.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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