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버릴 수 없는 꿈, 교사 배주영을 생각한다

by 낮달2018 2019. 5. 27.
728x90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가 창립 30돌을 맞았다. 1989년 5월 28일 창립 이후 1600여 교사가 학교에서 쫓겨났다. 5년여의 해직 기간에 유명을 달리한 이들도 적지 않다. 이듬해 2월, 첫 비보를 남기고 떠난 이가 경북의 배주영 선생이다.

꼭 10년 전이 그의 19주기였으니, 올이 그의 29주기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역산하여 전교조 창립 30주년을 환기한다. 그것은 회한이면서 일종의 부채감이기도 하다. 1993년에는 내 동갑내기 친구 정영상이 갔다. 

복직하고 5년 만에 전교조는 합법노조가 되었다. 그러나 14년 뒤인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전교조에 ‘노조 아님’을 통보하면서 전교조는 다시 법외노조가 되었다. 촛불 혁명을 거쳐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6년째 전교조는 법외노조다.

10년 전, 배주영 19주기에 쓴 글로 떠난 이들을 추모하고, 투쟁으로 함께한 시간을 돌아본다. 지난 25일, 서울에서 베풀어진 30주년 교사대회 소식은 따로 전할 기회가 있을 터이다.

                                                           2019. 5. 27.

 

▲  배주영 선생의 무덤 .  안동시 안기동 천주 교인묘지에 있다 .

모든 과거의 것들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은 허망하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가정만큼 허망한 것이 어디 있을까……. 그이는 살아 있으면 마흔여섯이 된다. 그이가 떠난 지 19년이 흐른 것이다. 1990년 2월 19일 아침, 자취방에서 그녀가 영영 깨어나지 못했을 때 그녀는 스물일곱의 처녀였다.

 

배주영(1963~1990). 그이의 19주기 추모 행사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북지부 주관으로 안동시 안기동 묘지에서 열린 건 지난 19일이다. 예년과는 달리 이날 행사에는 전교조의 원로 교사들이 참석했다. 위원장을 지낸 정해숙, 이영희 선생을 비롯하여 광주지부장을 지낸 임추섭 선생, 돌아가신 윤영규 선생 대신 사모님도 참석하였다.

 

전에 윤영규 선생께서 그러셨다고 한다. 퇴임 후에는 교육운동에 참여하다가 유명을 달리한 교사들의 무덤을 찾아 ‘순례’하고 싶다고. 그러나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다른 원로들이 그 뜻을 이은 셈이다. 정년을 맞아 교직을 떠난 원로들에게 세상을 먼저 버린 후배들이 마음에 밟혔던 것일까.

 

다른 시도는 몰라도 경상북도에서는 해직되었던 105명의 교사 중에서 여섯 명이 세상을 떠났다. 배주영 선생에 이어 1993년에 정영상이, 그리고 복직 후엔 황현자, 지송월, 정관, 장성녕이 그들이다. 심장마비로, 암으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 이는 말이 없고 남은 동료의 가슴엔 회한만 쌓였다.

 

▲  첫 전교조장으로 치러진 배주영 선생의 장례 (1990)

1989년 전교조 창립 후, 첫 전교조장(葬)으로 보낸 이가 배주영 선생이다. 그해, 무려 1600여 명에 이르는 교사들이 교단에서 쫓겨났고, 해직교사들은 본의 아니게 노조 상근자가 되어 지부와 지회 사무실을 지키던 때였다.

 

▲ 고 배주영(1963~1990) 선생

우리 지회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장성녕의 부인이 운영하던 음악학원 한쪽에 곁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2월 20일 오전이었다. 장성녕이 전화를 받았는데 안색이 바뀌었다. 자취방에서 배주영 선생과 함께 자리에 들었다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후송된 해직 여교사의 언니가 우리 지역의 동료였는데 그이에게 연락해 달라는 전갈이었다. 우리는 배주영 선생의 부음을 그렇게 들었다.

 

연락을 받고 바로 장성녕은 그 언니에게 전화를 넣었는데, 평소의 그의 모습에 비기면 얄미울 만큼 침착하고 냉정했던 것 같다. 그 전날 밤, 청송의 자취방에서 자리에 든 두 여교사 중에 한 사람은 목숨을 건졌지만, 배주영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부음을 전했던 장성녕도 지금 이 세상에 없다.

 

▲ 배주영 유고집(1990, 푸른나무)

장성녕은 지난해 2월에 세상을 떠났다. 지난 14일에 밀양에서 우리는 유족들과 만나 식사를 하는 것으로 아쉬운 1주기를 지냈다. 그의 아들 한솔이는 이제야 초등학교를 졸업한다. 기운을 차리고 의연하게 우리를 맞이한 유족들을 만난 것을 우리는 겨우 위안 삼았을 뿐이다.

 

배주영 선생의 부음을 듣고도 우리는 여전히 그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한창 혈기 방장한 나이여서 죽음이라는 게 너무 멀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그 전해 9월께 구룡포의 어느 대학 수련원에서 열린 해직교사 연수회에서 만난 화장하지 않은 얼굴에 홍조가 아름다웠던 한 여교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 연수회는 아주 정겨우면서도 비장하게 진행되었다. 마침 그이와 나는 같은 모둠이어서 해직에 이르기까지의 쉽지 않은 과정과 이후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하인데도 참 반듯하고 단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삼십 대 초반의 어정쩡한 늦깎이로 교육운동에 입문한 우리에 비기면 그녀는 너무 분명한 자기 전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난 너희들을 사랑한 죄로 너희에게 옳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다 떠난다. 내 비록 지금 떠난다만 반드시 돌아온다. 언제나 너희를 위해 기도 올린다. 진정 사람을 사랑하며 나보다 약자인 그들을 위해 사는 진정 인간다운 사람이 되어라.”

 

8월 12일, 4년 6개월간의 교직경력을 마감하고 배주영은 아이들을 남기고 학교를 떠났다. 정작 마음은 담담하고 차분했던 모양이다. 그날 치 일기에서 그는 그렇게 썼다.

 

삶과 생활의 기본원칙
① 비굴하지 말 것 : 어떤 일에도 치사한 감정이나 자신의 이익을 내세워 비겁해지지 말 것이며 의지를 굽히지 말자.
② 당당한 태도와 바른 생각을 가지도록 노력할 것 : 늘 생활을 정리․반성하여 생각을 바르게 하고 상대에 대해 너그러울 것.
③ 공부―학습을 열심히 할 것.

 

해직 이후 그녀는 지회 상근자로 일했다. <전교조신문>과 참교육 물품 등이 든 배낭을 메고 청송과 영양의 각급 학교를 방문하며 이른바 ‘참교육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누구 없이 해고자로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그녀는 마지막 일기에서 자신의 번민을 토로하고, 헤어진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되뇌었다.

 

2월 3일 흙날
감정이 예민해지고 어려지는 요즘이다. 무슨 일에든 조그마한 자극만 받아도 눈물을 흘린다. 서럽고, 애틋하고, 그립고, 막막하고…….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이며, 하고 있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중 략>…
철현이, 명수, 병화, 정보, 명호, 종석, 경보, 원섭이, 희식이, 정길이, 용신이, 종철이, 상년이, 영걸이, 철순이, 경자, 남숙, 남희, 현주, 명순, 미정, 또 미정이, 명숙이, 수경이, 경숙이, 미숙이, 순향이, 영이, 송자, 윤희, 춘연, 정화, 은화, 연수, 순이, 순영이, 경희, 은정, 또 은정이, 상정, 경미, 금순, 태순, 현주…….

 

그이의 장례는 온 나라에서 달려온 교사들의 애도 속에 전교조장으로 거행되었다. 그날 궂은 눈비가 흩날렸던가. 배주영 세실리아는 안동 외곽의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해마다 기일이면 안동과 인근의 동료들이 그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19년. 그것은 고인이 하나씩 이름을 떠올린 아이들이 불혹을 앞둔 장년이 되게 한 시간이다. 지난해 연말부터 시작된 일제고사 관련 징계로 모두 열두 명의 교사가 교단을 잃었다. 1989년 교사 대학살로부터 치면 꼭 20년 만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인데도 역사는 시치미를 뗀 채 헛되이 돌고 있는가.

배주영의 묘비에는 ‘민주교사 배주영(세실리아)의 묘’라 새겨져 있다. 묘비 옆면은 ‘1963년 7월 27일 나서 1990년 2월 19일 잠들다’, 뒷면은 ‘행복하여라. 참교육 위하여 온몸을 던지신 임이여! 하늘나라가 임의 것이니.’다.

 

▲ 고 정영상(1956~1993) 선생

추모의식은 간단히 진행되었다. 정년 퇴임한 지 여러 해가 지난 백발의 선배 교사들이, 술잔을 올리며 회한을 가누지 못했다. 몇 잔의 술과 몇 점의 제물로 어찌 그 잃은 목숨, 그 생명의 꿈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 바람 부는 천주교인 묘지에 엎드려 산 자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행사가 끝나고 음복을 하면서 참석자들은 안부를 나누고 불현듯 이삼십 년 전으로 퇴행해 버린 현실을 새삼 확인했다. 그러나 스물일곱 맑고 고운 여교사가 꿈꾸었던 배움과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희망과 꿈은 여전히 우리의 과제다.

 

님은 스물일곱이었습니다.
님은 스물일곱 샛별 같은 선생님이었습니다.
님은 전교조의 새벽이었습니다.
1990년대의 문을 여는
전교조의 첫새벽, 스물일곱이었습니다.
1990년 2월 19일 새벽,
마침내 새벽을 온몸으로 열어놓고
그 새벽을 안고 눈을 감다니

     - 정영상(1956~1993)의 추모 시 ‘님은 스물일곱이었습니다’ 중에서

 

 

배주영을 보내면서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메었던 정영상도 갔다. 배주영이 가고 3년 뒤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포항의 정관도 갔다. 백발 순례자의 다음 목적지는 정관이 잠든 만불사와 정영상이 지친 몸을 뉘고 있는 포항의 어느 바닷가 산이다.

 

죽음만큼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없다. 그것은 모든 것을 무화하는 가장 분명한 실재다. 분명한 것은 또 있다. 그것은 배주영이, 정영상이, 황현자와 지송월이, 정관과 장성녕이 결코 버릴 수 없었던 꿈이다. 20년 세월에도 변하지 않고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우리의 꿈, 우리의 희망이다.

 

 

2009. 2. 23.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