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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척화 대신, 모국어로 ‘망국’을 노래하다

by 낮달2018 2019.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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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시가 기행 ⑤]  청음 김상헌의 ‘가노라 삼각산아…’

▲ 안동 풍산읍 서미리의 빗집바위 위에 세워진  청음 선생 목석거 유허비

아이들에게 우리 문학을 가르치다 가끔 그런 얘길 하곤 한다. 만약, 송강 정철이, 또는 고산 윤선도가 ‘진서(眞書)’가 아닌 ‘언문(諺文)’으로 된 노래를 남기지 않았다면, 혹은 그들이 ‘사미인곡’이나 ‘관동별곡’을, 또 ‘어부사시사’와 ‘오우가’를 우리말 아닌 한시로 남기고 말았다면, 하고 말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문학 유산이 한문투성이의 시부에 그친다면 그게 얼마나 ‘끔찍한 풍경’일 것인지를.

 

조선조 사대부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한문 공부를 시작하여 평생을 이국 문자의 의미망 속에서 갇혀 산 이들이다. 당연히 이들은 한문으로도 완벽한 문자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이 굳이 우리말로 노래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일찍이 김만중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국어로 표현된 문학이 참 문학이라는 국문 문학론’을 전개하면서 “‘학사대부’의 ‘시부’보다 ‘땔나무 하는 아이나 물 긷는 아낙’의 ‘노랫소리’가 훨씬 더 진실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사람의 마음이 입으로 표현된 것이 말이요, 말의 가락에 있는 것이 시부’라고 했으니, ‘진실한 마음’을 그리는 게 ‘나라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퇴계나 율곡 같은 당대의 성리학자들은 물론, 사대부들이 굳이 한글 시가를 지은 뜻은 거기에 있었으리라.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순정(純正)한 마음을 다른 나라의 문자로 노래하는 것은 서포의 지적처럼 ‘설사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한글 시가 문학의 유산은 그리 두텁지 못하다. 고산이나 송강 같은 시인들의 노래를 빼면 작가별로 고작 한두 편의 시조만이 남아서 전할 뿐이니 아쉬움만 더해진다. 경상북도 북부 지역이 낳은 한글 시가를 찾아 떠나는 이 여행이 더디고 썩 여유롭지 못한 까닭도 다르지 않다.

 

풍산 소산리, ‘구김’(舊金), ‘신김’(新金)의 고장

 

이번 기행은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素山里)를 향한다. 이 마을에는 김방경(金方慶, 1212~1300)과 김선평(金宣平, ?~?)의 후예인 두 안동 김씨가 살고 있다. 이른바 ‘선김(先金)’ 혹은 ‘구김(舊金)’으로 불리는 이들이 그 한쪽이고, ‘후김(後金)’, ‘신김(新金)’으로 불리는 이들이 다른 한쪽이다.

 

김방경은 대몽항쟁의 주력인 삼별초를 진압하고 원의 일본정벌 때 고려군을 이끌고 출정했던 무장이다. 그는 ‘선김’(구김)이라 불리는, 신라 경순왕의 후예인 경주 김씨 계열의 안동 김씨의 중시조다. 조선 전기에 큰 세를 떨치던 이들 ‘구 안동 김씨’는 인조 때 영의정 김자점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그 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 ‘구김’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김시민, 숙종 때의 시인 김득신, 독립운동가 백범(白凡) 등이 있다.

 

흔히 ‘후김’(신김)으로 불리는 이들이, 왕건을 도와 ‘안동의 3태사’로 불리는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또 다른 안동 김씨다.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이라고 하여 큰 벼슬을 많이 낸 문중으로 비유되는 이들은 조선 후기의 세도 가문이다.

 

신김은 조선조에 상용(尙容)·상헌(尙憲) 형제가 정승이 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좌의정 상헌의 후손이 세도 가문으로서의 주류를 이루어 이들을 ‘장김(壯洞金氏)’이라고도 한다. 상헌의 후손에서 부자 영의정·형제 영의정·부자 대제학 등 12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 수십 명의 판서를 내, 이른바 벌열(閥閱)로 알려졌다.

 

이들 권문과는 대조적으로 ‘김삿갓’으로 알려진 김병연, 한말의 정치가 김옥균과 청산리 대첩의 주인공 김좌진도 이 후김의 후예들이다. 한말의 세도정치로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가문에서 항일 무장투쟁의 주역이 나왔다는 점이 한편으로 흥미롭다.

▲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마을 앞에 선 청음의 시비 . '가노라 삼각산아'가 새겨져 있다 .

염천에 소산리를 찾은 것은 순전히 이 ‘신김’의 번성을 이끌었다는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 선생 때문이다. 그는 병자호란(1636) 때, 결사 항전을 주창한 척화파의 거두였다. 청나라로 끌려갈 때 이 강경한 대신은 예순아홉의 노인이었다. 그때 청음은 자신의 비분강개를 한 수의 시조로 남겼다.

 

주전·주화의 대립, 김상헌과 최명길

 

병자호란 때 화의를 둘러싼 역사적 전개는 청음뿐 아니라 또 한 사람의 충신을 조명한다. 그때, 예조판서 김상헌에 맞섰던 이는 호조판서 지천(遲川) 최명길(1586~1647)이었다. 둘은 전혀 다른 방책을 주장했다. 청음은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한 주전파였고 지천은 청나라 진영을 오가며 화의에 앞장선 주화파였다.

▲ 영화 <남한산성>(2017)에서 각각 김상헌, 최명길로 분한 김윤석과 이병헌. ⓒ CJ엔터테인먼트

죽음을 무릅쓰고 온갖 수모를 겪으며 난국을 화의로 건지려 했던 최명길은 눈물을 뿌리며 항복문서를 썼고, 청음은 이를 찢어버린다.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는 청음의 일갈에 최명길은 찢어진 종이를 주워 맞추었다.

 

“대감은 찢으나, 나는 주워 맞추리다.”

 

당시 화의를 둘러싼 대립에 대해 쉬 시비를 가리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것은 명분은 명분대로 실리는 실리대로 한 시대를 넘어서고자 했던 대신들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청음은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낙향해 두문불출했고 최명길은 영의정이 되어 인질로 끌려간 척화 대신과 포로 석방을 교섭하는 등 난국을 수습했다.

 

나라의 위기 앞에서 갈라졌던 두 사람은 그러나 몇 해 후 청나라의 감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김상헌은 1639년, 청이 명을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으로 압송되었고 3년 후, 난후를 수습하던 최명길도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이 밝혀져 그 관련자로 선양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소산리는 안동에서 하회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풍산읍에서 예천으로 가는 곧은길을 버리고 하회로 가는 왼쪽 길로 접어들어 다리 하나를 건너면 오른쪽에 펼쳐진 마을이 소산리다. 마을 입구 길가에 청음이 남긴 시조를 새긴 돌비가 서 있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이 노래는 이른바 ‘우국 충절’의 노래다. 전편에 흐르는 비장미는 이 노래의 배경이 시인의 치욕적 체험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려준다. 작품에는 고국산천에 대한 사랑과 적국으로 끌려가는 비장한 마음, 귀환에 대한 불안의식 등이 뒤섞인 작자의 심경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작자는 담담하다. ‘삼각산’과 ‘한강수’는 조국을 떠나야 하는 신하에게 이미 조국을 상징하는 징표다. 그리움으로 호명되면서 그것은 이미 고국산천의 지위를 얻는다. 저간의 사정을 ‘하 수상’으로 뭉뚱그린 시인의 마음은 어둡고 쓸쓸하다.

 

‘올동말동하다’고 노래한 것은 어떤 예감이 있었던 것일까. 청음이 선양에 억류된 기간은 햇수로 6년이었다. 선양에 끌려온 청음 등은 쇠사슬에 목을 묶인 채 심문을 당하는 등의 굴욕을 강요당했다. 그 감옥에서 주전·주화론의 두 대신은 만난다.

 

김상헌은 최명길의 늠름한 태도에 “공의 주화가 오로지 나라를 위한 충성에서 비롯한 것임”을 비로소 알고 마음으로 탄복하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1645년에야 소현세자와 함께 선양을 떠나니, 청음은 6년, 최명길은 3년 만의 귀국길이었다.

 

청나라는 그들이 풀려날 적에 황제가 있는 쪽을 향해 절을 하라고 강요했다. 최명길은 서쪽을 향해 사배의 예를 올렸지만, 김상헌은 척화파답게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나의 마음은 고리같이 둥글어서 돌아갈 줄을 안다”고 했던 최명길은 외형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믿었다던가.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청음은 소산리로 낙향해 은거하였다. 그는 원래 금산촌(金山村)이었던 마을 이름이 사치스런 느낌이 든다고 검박한 느낌의 소산리로 바꾸었다. 말하자면 소산리는 청음의 꼬장꼬장한 성격이 빚어낸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청원루 ( 淸遠樓 ).  '청을 멀리한다'는 뜻으로 붙인 당호다 .
▲ 청원루 앞 시비에는 그의 시조와 한시 한 편이 새겨졌다 .

마을 한복판에 있는 청원루(淸遠樓)는 청음이 선양에서 돌아온 뒤 풀려난 뒤 중건한 누각이다.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원래 2채의 건물로 41칸이나 되었으나 현재 앞면 7칸짜리의 건물만 남아 있다. 청원루는 기단을 높게 한 단층 다락집 형태로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는 형식의 건물이다.

 

▲은자암에 새겨진 글씨. '해동수양 산남율리'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집은 그 한계가 분명하다. 관리를 한다고 해도 시나브로 퇴락하는 걸 막는 것은 역부족이다. 군데군데 잡풀이 나 있는 마당에 덩그렇게 선 청원루는 다소 위압적으로 보인다. 왼편 날개채 앞 검은 대리석에 예의 시조와 한시 한 수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다.

 

청음은 강직한 선비다. 그는 대사헌 등 여러 관직에 나아갔으나 강직한 언론 활동으로 출사와 사직을 반복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낙향해 소산리에서 소일하였다. 그가 1640년 청으로 압송될 당시에 그는 풍산읍 서미리(西美里)에 거처하고 있었다.

 

서미리는 중앙고속도로 주변 마을이지만, 풍산읍에서 좁은 면도를 거쳐 좋이 이십 분은 달려야 만날 수 있는 오지 마을이다. 서미리에는 ‘청음 선생 목석거 유허비’가 있다. 서미리로 들어가는 산길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나타나는 커다란 바위 ‘은자암(隱者巖)’은 청음에게 서미가 어떤 성격의 공간이었는가를 넌지시 알려준다.

 

海東首陽(해동수양) 山南栗里(삼남율리)

 

바위에 은자암이라는 이름과 글귀를 새긴 이는 청음의 7대손 김학순이다. 당시 안동부사로 있던 김학순이 바위에 글씨를 새겨 선조의 정신을 기렸던 것이다. ‘수양’은 백이 숙제가 절의를 지켜 죽은 산으로 이는 곧 청음의 귀향이 이제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율리’는 도연명의 집이 있던 곳이니 자연으로의 귀의를 이른 것이다.

 

서미리, 혹은 해동의 수양산

 

‘해동의 수양산’이라 불린 서미리-당시는 서미(西薇)-는 학가산 줄기인 보문산 아래 조성된 크지 않은 마을이다. 청음은 낙향하여 소산 청원루에 거처하다 망국의 선비가 사는 곳이 너무 번화하다 하여 여기 서미에 두어 칸 초가를 엮어 옮겨와 스스로 ‘목석거(木石居)’란 편액을 내걸고 살았다.

▲빗집바위에 새겨진 목석거 각자 . 청암의 7 대손 학순의 글씨다 .
▲서간사 강린당 . 청음을 기려 세운 서간사에는 강린당만 잡초 속에 남아 있다 .

지금 서미리에 청음의 ‘목석거’는 물론 남아 있지 않다. 대신 후대에 세운 ‘청음 선생 목석거 유허비’가 남았는데 이 비석은 ‘빗집바위’라는 커다란 바위 위의 비각 속에 모셔지고 있다. 서미리의 언덕길에 들어서면 맨 먼저 앞을 가로막는 것은 학가산의 중대바위고 그다음이 마을 뒤편의 이 ‘빗집바위’인 것이다.

▲ 중대바위.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의 언덕길에 들어서면 맨 먼저 앞을 가로막는 것은 학가산의 이 바위다.

비석은 사방 한 길이 넘는 바위 위 비각에 있으니 아래서 지켜보는 것만 가능하다. 바위 상단 중앙에는 ‘목석거’ 세 글자가 힘차게 가로 새겨져 있다. 은자암을 조성한 학순의 솜씨다. 바위를 한 바퀴 돌아봐도 비석에 접근할 방법은 달리 없어 보인다.

 

바위 아래에 서간사(西磵祠)가 있다. 서간사는 청음 사후, 후인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정조 때, 영남 유생 김제묵 등이 상소하여 청음의 ‘목석거 유허사’를 서원으로 승격하고 편액을 하사해 줄 것을 청했다. 이에 정조가 사호(祠號)를 ‘서간’이라고 내려 주었다고 한다.

 

서간사는 순조 때 사액되었으나 고종 7년(1870)에 이르러 대원군의 훼철령에 따라 철거되었다. 지금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후학들이 세운 강린당(講麟堂)이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는지 건물은 키를 넘는 무성한 잡초 속에서 외롭다. 온 마당 가득 가죽나무 천지다. 잠긴 문을 밀어보다 만다. 문 앞에 선 안내판의 글씨조차 희미해졌다.

 

강린당에 걸린 시판 가운데, 김상헌이 서미에 은거하면서 노래한 칠언절구 ‘중대(中臺)’가 있다. 중대는 마을 뒤편 학가산 꼭대기에 걸린 가파른 바위다. 청음은 매일 중대에 올라 북녘을 바라보며 망국의 설움을 눈물로 달랬다던가.

 

石室先生一角巾(석실선생일각건)   석실 선생 한 번 은거하심에
暮年猿鶴與爲群(모년원학여위군)   늘그막까지 잔나비, 학과 함께하셨다.
秋風落葉無行跡(추풍낙엽무행적)   가을바람 낙엽은 자취마저 없는데
獨上中臺臥白雲(독상중대와백운)   홀로 중대에 올라 구름 위에 누웠다.

▲ 서간사의 담장에 담쟁이만 무성하다 .

서미는 오랑캐라 경멸해 마지않았던 청나라에 항복한 삼전도의 굴욕을 넘어 청음 김상헌이 자신의 절의를 다스린 곳이다. 목석거 유허비를 세운 당대의 안동부사 이정신이 선생을 ‘동방의 백이’로, 학가산을 선생의 ‘수양산’으로 본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해가 설핏 기우는 시간, 마을을 벗어난다. 퇴락한 서간사 옆에는 예배당 하나가 들어섰고, 무심히 지나는 마을 아낙들에게 물어도 500년 전의 선비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그 시절의 비분강개를 기억하기는 더욱 어렵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서미를 떠나는데, 무심코 떠오른 청음의 시조, 그 종장의 울림이 허허롭다. 오직 한 수의 시조만 남겼지만, 청음 김상헌의 목소리는 16세기 중반, 이 땅의 역사와 현실을 아프게 꿰뚫고 있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한 정치가의 문학적 고백이기도 한, 이 모국어 노래를 나직이 읊조리며 나는 서미리를 떠났다.

 

 

2009. 7. 16. 낮달

 

 

척화대신, 모국어로 '망국'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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