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세시 풍속·24절기 이야기

⑧ 소만(小滿), 밭에선 보리가 익어가고

by 낮달2018 2023. 5. 20.
728x90

여름의 두 번째 절기 소만(小滿)

▲우리 동네에는 이런 빈 땅에 짓는 농사가 꽤 된다 . 손바닥만 한 땅에 보리를 심어놓았다 .

5월 21일(2024년도는 20일)은 여름의 두 번째 절기 소만이다. ‘작을 소(小), 찰 만(滿)’자를 써서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차다’는 뜻이다. 소만 즈음이면 더위가 시작되고 보리가 익어가며 부엉이가 울어 예기 시작한다. 모내기와 보리 수확 따위가 이어지는 농번기다.
 
<농가월령가>에 ‘4월이라 맹하(孟夏) 소만(小滿) 절기로다.’라 노래했지만 사실 소만은 다른 절기에 비하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절대빈곤 시대의 아픈 상처 ‘보릿고개’[춘궁기(春窮期)]의 때다. 내남없이 지난해 추수한 양식은 바닥나고 올해 지은 보리농사는 미처 여물지 않은 상태 말이다.
 
‘보릿고개’와 자주감자
 
맥령기(麥嶺期)라고도 부른 이 어려운 시기는 특히 식량 수탈에 시달리던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이후 이른바 산업화가 진전되던 1970년대 이전까지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불청객이었다. 이 고통스러운 시기를 가난한 사람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초근목피(草根木皮)]로 끼니를 때우거나 걸식과 빚으로 연명해야 했다.
 
이제 보릿고개는 옛말이 되었지만, 그 시절 소만 무렵이면 남쪽 따뜻한 지방에서부터 감자꽃이 피기 시작한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이 생산되는 곡물인 감자는 조선조 순조 연간(1824~1825)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재배되고 있는 식물 가운데 가장 재배 적응력이 뛰어난 식물로 알려진 감자는 주로 덩이줄기를 식용하는 대표적 구황작물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 어릴 적에는 유난히 감자를 많이 심었다. 거의 농사를 짓지 않은 우리 집에서도 아는 이의 밭을 빌려 몇 년 동안 감자 농사를 짓기도 했다. 네모반듯하게 자른 감자의 씨눈을 심던 어린 시절의 광경이 지금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60년대만 해도 자주감자를 꽤 심었던 것 같다. ‘돼지감자’라 부른 자주감자는 생명력이 왕성해 우리 토질에선 잘 자랐으나 맵고 아린 게 흠이었다. 그때 우리는 권태응(1918~1951)의 동시 ‘감자꽃’을 즐겨 부르며 놀았다.

▲ 선산 오일장에서 할머니가 재에 담아서 파는 씨감자를 사와 심어놓고 우리 내외는 싹이 트기나 할까 싶어 꽤나 마음을 졸였다 .
▲그러나 선배 농사꾼 말대로 감자는 한 달이 채 안 되어 훌륭하게 싹을 내밀었고, 시방 무성한 잎사귀를 늘어뜨리고 익어가고 있다.

노래처럼 하얀 꽃 핀 데선 하얀 감자가 달리고, 자주 꽃 핀 데서는 자주감자가 달렸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시대에는 이 시를 개사하여 ‘조선 꽃’과 ‘조선감자’, ‘왜놈 꽃’과 ‘왜놈 감자’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아마 뜻도 모르고 우리도 그 노래의 한 자락을 따라 부르며 자랐던 것 같다.
 
소만 무렵에 부는 바람이 몹시 차고 쌀쌀하다는 뜻으로 “소만 바람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변덕스러운 날씨는 비슷했던 모양이다. 지난주부터 날씨는 본격적인 여름으로 접어든 듯하다. 봄인가 싶다가 어느새 계절은 그걸 건너뛰어 영상 30도로 치닫기 시작한 것이다.
 
텃밭 농사 10년 만에 올에 처음으로 감자를 심었다. 선산 오일장에서 할머니가 재에 담아서 파는 씨감자를 사와 심어놓고 우리 내외는 꽤나 마음을 졸였다. 그 시든 감자가 싹을 틔울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배 농사꾼 말대로 감자는 한 달이 채 안 되어 훌륭하게 싹을 내밀었고, 지금은 무성한 잎사귀를 늘어뜨리고 익어가고 있다.
 
우리 동네의 군데군데 노는 땅에는 농사가 제법이다. 불과 열 평이 채 되지 않는 자투리땅에 보리를 심기도 하고, 텃밭을 가꾸어 비닐하우스를 세우기도 한다. 산행길에 거치는 골목에는 지금 보리가 한창 익어가고 있다. 글쎄, 밭 주인은 왜, 거기 보리를 심었을까, 하고 나는 늘 궁금해한다.

▲ 시골의 이웃집 비닐하우스에선 지금 참외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 올에는 찔레꽃이 풍년인데다가 매우 곱게 피었다. 산행길 어귀마다 이 하얀꽃의 행렬이 소담스럽다.
▲ 올에는 아까시 꽃도 풍년이다. 산 아래 마을로 들어서면 아까시 향내가 진동하니 양봉 농가에는 희소식일 듯하다.

‘노래마을’이 짓고 부른 동요 ‘감자꽃’을 들으면서 짙어져 가는 마을 뒷산의 녹음을 지켜본다. 널뛰는 날씨와 기온을 탓하긴 하지만 그래도 변함없는 것은 계절의 정직한 순환이라는 것을 거듭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2019. 5. 21. 낮달
 

 

[서(序)] 새로 ‘24절기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여름 절기
입하(立夏), 나날이 녹음(綠陰)은 짙어지고
망종(芒種), 남풍은 때맞추어 맥추(麥秋)를 재촉하고
하지(夏至) - 가장 긴 낮, 여름은 시나브로 깊어가고
소서(小暑), 장마와 함께 무더위가 시작되고
‘염소 뿔도 녹이는’ 더위, 대서(大暑)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