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 관련 약속 어기고,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내몰라라 하는 일본의 민낯
새해 들어서도 12·3 내란 관련 수사, 윤석열 탄핵과 서울서부지법 폭동 등의 기사가 날마다 쏟아져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의 핵심을 겉도는 듯한 수사의 추이와 극우 세력의 준동에 편승한, 도저히 상식적인 정당이라고 할 수도 없는 국민의힘의 몽니로 정국은 이어지고 있으니, 지켜보는 국민의 억장은 무너진다.
그중에 일본발 뉴스 두 편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나는 일본이 군함도(하시마 탄광) 후속 조치 보고서를 유네스코에 냈는데, 그 내용이 기막히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1942년 조선인 130여 명이 수몰 사고로 숨진 일본 조세이(長生) 탄광의 유골 발굴 조사에 나섰다는 소식이다.
군함도
군함도는 나가사키반도 옆의 관광지로 유명한 다카시마 밑에 있는 조그마한 섬 2군데 중 하나로 원래 이름은 하시마(端島)이다. 지형이 군함 모양을 닮았다고 군함도(軍艦島)로 불리었다. 1800년경에 미쓰비시가 섬 전체를 사들였는데 1940년대에 조선인을 강제 징용하여 석탄 노동을 시킨 곳이다. 1943년에서 1945년까지 조선인 연인원 약 500명에서 800명이 이곳에 징용되어 노역에 동원됐다.
육지와 철저하게 고립된 이 섬에서 징용자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함께 일본인 사용자의 잔인한 폭력과 사투를 벌여야 했던 하시마는 조선인들에게 가장 끔찍한 작업장이었다. 높다란 제방이 섬을 둘러싸고 있어 도주를 막았지만, 조선인들의 탈출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탈출하려다 바다에 수장되는 죽음의 행렬이 이어진 하시마는 그래서 ‘지옥섬’으로 불리었다. [관련 글 : 다시 불려 나온 군함도, ‘강제 동원’ 역사 왜곡하는 일본]
군함도는 1960년대까지 다카시마와 함께 일본의 근대화를 떠받치는 광업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나 폐광 이후 지금은 무인도가 되었다. 일본은 2015년 자신들의 근대화 상징으로 이 섬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하려 했는데, 한국 정부는 일본이 등재 신청한 규슈(九州)와 야마구치(山口)현에 있는 중화학 산업 시설 23곳 가운데 최소 7곳은 조선인 강제 노동 피해가 발생한 곳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환기하면서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반대했다. [관련 글 : 조선인 강제노동에 대한 대법원 배상 판결과 ‘메이지(明治)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일본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하시마 등 일부 산업 시설에서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되어 ‘강제로 노역’했던 일이 있었다.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정보센터 설치 등의 조치를 하겠다”라고 약속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이러한 약속을 받아들여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었다.
일본은 2017·2019·2022년 세 차례 이행 경과 보고서를 세계유산센터에 제출했지만, ‘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등 후속 조치에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다. 2023년 45차 회의에서 세계유산위원회는 당사국(한국)과 대화 지속, 조선인 노동자 등 전체 역사의 설명 등 조치를 일본에 주문했다. 일본이 2015년 군함도 등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 약속한 조치 이행이 미흡하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에 지난해 12월1일 일본은 군함도 등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따른 후속 조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일본은 이번에도 그간 한국의 요구사항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에 ‘다수의 한국인 등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 아래서 강제로 노역’한 역사와 조선인 강제 동원 피해자 증언의 전시, 진정한 추모 조치 등을 요구해 왔다. [관련 기사 : 일본, ‘군함도’ 세계유산 등재 때 약속도 여전히 안 지켜]
결국 일본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 약속했던 후속 조치를 9년이 넘도록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 측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강제 동원 역사를 제대로 전시하지 않은 데다, 한·일 강제 병합이 합법이라는 내용의 전시물도 철거하지 않았다. 사도 광산 문화유산 등재에 이은 약속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서 우리나라는 사도광산 추도식에 불참하는 것으로 항의했다. [관련 글 :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 ‘강제동원’ 문제 해결에 ‘왕도는 없다’ / 위치도, 내용도, 제목도 흉내만 낸 사도광산 ‘강제동원’ 전시관]
윤석열 정부의 일본 측 선의에 무조건 의존하는 저자세 외교는 일본의 호응은커녕 되려 한국을 더 도발하는 굴욕외교와 외교 참패로 끝나가고 있다. ‘컵의 나머지 반’에 대한 기대는 이미 김칫국 신세가 되었고, 윤석열 본인은 탄핵을 앞두고 있다.
2. 조세이 탄광
조세이(長生) 탄광은 야마구치(山口)현 우베(宇部)시에 있는 우베탄전(宇部炭田)에 속하는 해저 탄광이었다. 조세이 탄광의 숙소에는 조선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어서 당시 조세이 탄광을 ‘조선 탄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세이 탄광은 모집 방식으로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했다. 동원된 조선인들의 수는 1939년 249명, 1940년 483명, 1941년 430명이었다. 1942년 6월 말 현재 총 1,258명의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들은 충청남도, 경상북도 출신이었는데, 약 66%에 해당하는 831명이 경상북도 출신이었다.
조세이 탄광에 강제 동원된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들은 울타리에 둘러싸인 기숙사 생활이 강요되었고, 도리시마리(取締)라고 불리는 감독관에 의해 기숙사 출입이 통제되는 등 열악한 생활을 강요받았다. 조세이 탄광은 노동조건이 열악하고 사고의 위험성이 높았기 때문에 노무자들이 탈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탈출을 시도하다가 발각되면 사무실로 끌려가 심하게 구타당했다.
“어머니, 저는 지금, 일본의 야마구치현이라는 곳에서 탄광 일을 하고 있어요. 바다 밑에 갱도가 지나고 있어서, 바다 위를 다니는 어선들의 통통거리는 소리도 들려올 정도로 매우 위험한 장소입니다. (···) 탈출하기에도 매우 어렵습니다. 울타리는 3m 정도의 두꺼운 소나무 판자로 둘러싸여 있고, 그 바깥쪽은 철조망이 가득 둘러쳐져 있습니다.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숙소는 마치 포로수용소 같은 곳입니다. 경비도 삼엄하고, 일절 자유도 없으며, 외출도 할 수 없는 구속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 어쨌든 반드시 탈출해서, 꼭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겠습니다.”
- 조세이 탄광의 희생자 김원달씨가 가족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시사in> 기사에서 재인용)
1942년 2월 3일 오전에 조세이 탄광이 수몰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제1 갱이 바닷물에 의해 침수가 되어 당시 작업을 하고 있었던 노무자 183명이 사망한 사고였다. 사망자 중 조선인 노무자는 70%에 해당하는 130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관련 자료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누리집 참고]
해저탄전은 수압을 견딜 수 없기에 조업 자체가 ‘위법’이다. 사고 당시의 조세이 탄광 경영자였던 고 라이손 후치노스케 전 회장 스스로, 전후 즉시 ‘보안 기준을 위반한 위법한 조업이었다’라고 증언했다. 실제로 누수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그렇기에 1942년의 수몰 사고는 명백한 ‘인재’였다.
이 사고는 전후에도 오랫동안 숨겨져 왔는데, 이를 세간에 알린 이는 1976년 야마구치 다케노부 씨 등 일본 현지 우베시의 향토사 연구자들이었다. 1991년 시민단체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 출범하여 한국 유족회 결성, 한국 정부 기관인 강제동원피해조사위원회에 의한 조사 추진, 두 재일조선인 단체인 조선 총련과 한국 민단의 협력 등에 의해 진실 규명 조사나 희생자 추모 등이 이어졌다.
지난해, 이 모임은 유골 발굴의 전단계로 본 갱도에 연결된 입구를 찾는 굴착공사를 자력으로 벌이기로 하고 공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9월 25일에 본 갱도의 입구를 발견했고, 10월 26일에는 그 입구 앞에서 갱구를 열었다. 이를 보도한 <시사in>의 기사는 일본 독립 언론 〈슈칸 긴요비(週刊 金曜日)〉에 게재된 것을 번역해 전하고 있다. [관련 기사 : 일본 바닷속 무너진 탄광, 거기 조선인 136명이 있었다]
조세이 탄광에서 희생된 수몰 사고의 진상규명과 유골 발굴 요구와 관련해 일본 정부는 “대응이 가능한 범위를 초과한 것으로 생각된다”라는 입장을 내놓는 데 그쳤다.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다. 일본의 시민단체 ‘새기는 모임’ 공동대표는 유골 발굴의 결단을 ‘한일 정부’에 촉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검색해 보았으나 어떤 기사도 보이지 않는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관련 기사 : 조선인 136명 묻힌 해저탄광…일본 정부 “진상규명, 대응범위 넘어”
2025. 2.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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