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사도(佐渡)광산 세계유산 등재 신청과 강제동원 문제
일본의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신청 강행
지난해(2022) 2월,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사도(佐渡)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강행했다. 그러나 추천서에 미흡한 부분이 있어 유네스코의 심사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등재는 실패했다. 유네스코는 사도광산을 구성하는 유적 중 하나인 니시미카와(西三川) 사금산에서 과거에 사금을 채취할 때 사용된 도수로(導水路 물을 끌어들이는 길) 중 끊겨 있는 부분에 관한 설명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지난해 9월, 도수로에 대한 설명을 충실히 담아 이번 다시 잠정 추천서를 제출했다. 그간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놓고 한일 정부는 각각 전담 조직(TF)을 만들어 대응하는 등 첨예하게 맞서왔다. 우리 외교부는 “일본 정부가 한국인 강제노역의 아픈 역사를 외면한 채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것에 깊은 실망과 함께 항의의 뜻을 표한다”라고 밝혔었다.
일본 정부는 1467년부터 1989년(폐광)까지라는 사도광산의 전체 역사 중 에도시대(1603~1867)로 평가 기간을 좁혀, 이 시기에 이뤄진 전통적인 수공업 방식의 금 생산 체제만 한정해 등재를 추진한다는 구상이다. 조선인 강제동원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던 1939~1942년은 제외한 것이다.
이에 앞서 2015년 유네스코는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 철강, 조선 및 탄광(Sites of Japan’s Meiji Industrial Revolution: Iron and Steel, Shipbuilding and Coal Mining)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였다. 일본이 이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하였을 때, 한국 정부는 등재 신청한 규슈(九州)와 야마구치(山口)현에 있는 중화학 산업 시설 23곳 가운데 최소 7곳은 조선인 강제 노동 피해가 발생한 곳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환기하면서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반대했다. [관련 글 : 조선인 강제노동에 대한 대법원 배상 판결과 ‘메이지(明治)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세계유산 등재(2015) 후 일본의 약속 위반
그러나 일본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하시마 등 일부 산업 시설에서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되어 ‘강제로 노역’했던 일이 있었다.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정보센터 설치 등의 조치를 하겠다”라고 약속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이러한 약속을 받아들여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개관하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그치지 않고 ‘조선인이 섬에서 좋은 환경에서 살았다’라는 왜곡된 내용으로 전시물을 구성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에 세계유산위원회는 2021년 7월 온라인으로 진행한 제44차 회의에서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에 관해 설명하는 도쿄의 산업유산정보센터를 개선하라고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결정문을 컨센서스(의견일치)로 채택했다. [관련 글 : 다시 불려 나온 군함도, 강제동원 역사 왜곡하는 일본]
그러나 여전히 문제를 개선하지 않은 채 일본은 사도광산도 세계유산에 등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근 발표된 한일 시민 공동 조사에 따르면 사도광산에 동원된 한국인은 1,500명이 넘고, 이들은 엄격한 감시와 민족 차별에 의한 통제 아래 중노동을 감수해야 했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되었는데도 말이다.
사도광산도 강제징용 배상판결 받은 일본의 전범 기업 미쓰비시가 운영
민족문제연구소 회보 <민족사랑> 2022년 11월 ‘강제동원 특별호’에 따르면 사도광산도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받은 일본의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三菱)가 운영한 광산이었다. 일본 니가타(新潟)현 사도섬에 있는 사도광산은 강제동원 초기 사도광산은 니가타현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이 일하는 사업장이었다.(이하 <민족사랑> 2022.11.참고)
1940년 2월에 시행된 첫 집단 동원 이후 1942년 3월까지 충청남도 논산, 부여, 공주, 연기, 청양 등지에서 1,005명을 동원했다. 그러나 중노동에 도망치거나 귀국하는 이가 많아졌고 이를 막고자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금 채굴은 중지되었지만, 구리 생산으로 전환했던 사도광산은 1944년과 1945년에도 514명을 동원했다. 이렇게 밝혀진 동원자 수만 해도 1,500명이 넘는 것이다.
일본은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전통 수공업으로 도달한 최고의 금 생산 시스템’이라는 가치를 강조한다. 하지만 사도광산은 가혹한 노동과 거듭된 산업재해로 인해 일본 노동자의 저항이 있었고,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식민지 한국인들을 강제노동시킨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동원된 한국인들 주로 갱내작업에 집중투입돼 중노동 시달려
1990년대에 니가타현 시민과 연구자들은 한국인 강제동원 관련 사료를 조사·발굴하였고, 충청남도 논산을 방문하여 피해자를 직접 만나 피해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사도광산에 동원된 한국인들은 갱내 작업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어 갱내 노동자의 75%가 한국인이었고, 이들은 한국인 동원자의 82%에 이르렀다.
광산 현장에 익숙하지 않았던 농민들이 중노동의 현장에 배치된 것이었는데, 사도광산의 노무 동원 담당자는 이에 대해 “일본인 갱내 노동자에게 규폐(진폐) 환자가 많아서 광산 채굴 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일본의 청년들이 차례로 군대에 가야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징병으로 부족해진 노동력 문제도 있지만 건강에 치명적인 규폐증을 유발하는 갱내 노동을 한국인의 노무 동원으로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줄 때는 주고 고삐를 조일 때는 조인다.”
“근무 상황이나 품행이 불량한 자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중한 태도로 임하라.”
사도광산이 한국인을 대하는 태도는 위와 같았다. 진정한 일본인화를 목적으로 ‘부모의 마음’으로 지도하되 훈련 태도가 나쁘면 금강숙(金剛宿)에 수용해 ‘특별 훈육’을 했는데, 여기서 ‘훈육’이란 폭력적 수단을 포함한 통제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사도광산은 집단 동원된 한국인들 가운데 도망자가 계속 발생하자 가족을 불러들여 광산 생활에 안착시키려고 했다. 또한 동원 당시 계약 기간 만료가 다가오자 동원된 3분의 2에 현장에 남기를 강요했다. 피해자 윤재옥이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기증한 자료 중 사도에서 출생한 자녀의 사진이 그를 입증한다.
기로에 선 정부의 강제동원 ‘선 해결 방식’
최근 우리 정부는 일제 강제동원(징용) 문제를 풀고자 과감한 ‘선(先) 해결’ 방식을 택했다. 우리가 피해자들에게 배상 판결금을 대신 변제하고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을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발 기류가 확산하면서 정부의 징용 해법은 진퇴양난에 처했다.
이 와중에 만약 사도광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치명적으로 바뀔 수 있다. 사도광산이 명백하게 한국인 1500명 이상을 중노동에 동원한 역사적 현장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피해자의 동의 없이, 대법원판결에 반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 한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 될 거로 보인다.
전임 정부를 호기롭게 비난하면서 한일관계를 풀어가겠다는 의지는 좋았지만, 정작 해법은 ‘일본의 성의’에 기대는 모양새다. 문제가 풀릴 여지는 없으면서 오히려 회의만 가중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이 해법이 성과 없이 좌초한다면 후폭풍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리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현 정부(윤석열 대통령)가 관계 정상화를 호언장담할 때만 해도 국민은 그가 비장의 ‘절대반지’를 갖고 있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조만간 정부는 한일관계에 있어서 ‘왕도는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될 것이다. 강제동원과 식민 지배에 대한 진솔한 사죄와 그에 따르는 ‘배상’이라는 원칙이 전제되지 않는 한 해법 따위는 없다는 게 지난 역사의 교훈이니 말이다.
2023. 1.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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