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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17세기 ‘후미에’, 21세기 한국에 오다?

by 낮달2018 2020.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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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검증’하라는 어떤 국회의원

▲ 바쿠가 기독교 신자(기리시탄)를 색출해내기 위해 후미에를 밟게 하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이른바 ‘퇴행’이라고 할 만한 일이 하나둘이 아니긴 하다. 2012년 여름, 이 나라 역사는 바야흐로 된통 뒷걸음을 치고 있는 형국이다. 6월 9일 자 <한겨레>의 사설은 새누리당이 연출하는 이른바 ‘매카시즘 광풍’을 빗대어 ‘60년 전’으로 돌아갔다고 질책한다. 1950년대 미국 정가를 휩쓴 ‘매카시즘 광풍과 판박이’라면서 말이다.

 

‘종북’을 후미에 식으로 ‘검증’하자?

 

이 ‘시대착오적 종북몰이’의 한복판에 새누리당의 한기호라는 국회의원이 있다. 그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종북 의원을 가려낼 수 있다”고 하며 “북핵 문제, 3대 세습, 주한미군 철수, 천안함·연평도 사건 등의 문제에 질문을 하면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했단다.

 

그는 그 방법으로 “옛날 천주교가 들어와 (신도를 가려내려고) 십자가를 밟고 가게 한 적이 있지 않으냐”며 일본 바쿠(幕府) 시대에 예수나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성화상(聖畵像, 후미에)을 밟도록 하고, 주저하는 사람을 기독교 신자로 간주해 처형했던 제도를 들었다고.

후미에
후미에(일본어: 踏み絵)란 일본의 에도(江戶) 시대에 바쿠가 금지령을 내렸던 기독교 신자(기리시탄이라고 함)을 색출해내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 또는 거기에 사용했던 목조/금속제의 판을 말한다.

역사
에도 막부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매달린 예수나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목제 또는 금속 성화상을 기독교 신자로 의심되는 사람에게 밟고 지나가게 하여,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밟지 않으면 신자로 간주하여 체포하였다. 1612년 에도 막부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리시탄 금지령이 공포되었고, 1619년 2대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의하여 고사츠(법령을 민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설치한 게시판) 설치 등 거듭되는 기독교 탄압 정책의 맥락에서 1629년 도입되었다. 1856년 나가사키 및 시모다의 개항지에서는 폐지되었으나, 1873년 메이지 정부가 고사츠 철거를 지시할 때까지 기독교 탄압은 계속 이어졌다.

<위키백과>

▲ 엔도 슈사쿠의 장편소설 <침묵>(성바오로출판사, 1989)

그의 발언이 논란이 된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한겨레> 사설은 물론이거니와 새누리당 안에서도 “사실상 모든 의원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고 사상을 검증하자는 것”이라는 비판적 반응이 나왔다고 했다. 글쎄, 그의 매카시적 발상도 발상이지만, 17세기 일본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제도를 인용하는 그의 수준이 놀랍다. 게다가 그가 천주교 신자라니!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가 쓴 장편소설 <침묵>(1966)은 바로 이 후미에와 ‘배교’, 즉 1587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가톨릭 박해를 자세히 그린 작품이다. 내 서가에 있는 <침묵>은 1989년 성바오로 출판사에서 펴낸 16판, 세로쓰기 본이다.

 

일본 바쿠가 자행한 후미에를 통한 ‘배교(背敎)’ 유도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인이 기꺼이 고문을 받으며 죽어갔다. 막부의 관리들은 운젠의 뜨거운 온천물 세례를 퍼붓는 등 온갖 고문을 저질렀지만 ‘그리스도의 영웅들’(<침묵>)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이 무서운 고통을 견디어’ 낸다.

 

신의 ‘침묵’과 ‘보수의 침묵’

 

▲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을 새긴 후미에

바쿠의 관리들은 포르투갈 신부 앞에 여러 명의 가톨릭 신자들을 잡아놓고, 신부가 배교(背敎)하지 않으면 신자들을 다 처형하고 신부를 ‘구덩이 속에 달아매’겠다고 협박하면서 신부의 배교를 강요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인 신부에게 배교는 가장 실존적인 고통이다. 결국, 신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후미에를 밟는다.

 

성화가 있는 나무판은 이제 그의 발 가에 있었다. 물결 같은 무늬가 나 있는 약간 더럽혀진 목판에다 조잡한 구리로 된 메달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가느다란 팔을 벌리고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의 흉한 얼굴이었다. 노랗게 혼탁한 눈으로 신부는 이 나라에 와서 처음으로 접하는 그분의 얼굴을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중략]

 

주여, 오랫동안 저는 셀 수 없을 만큼 당신의 얼굴을 생각했습니다. 특히 이 나라에 온 후로 몇십 번, 저는 그렇게 했는지 모릅니다. 도모기 산속에 숨어 있었을 때, 바다를 작은 배로 건널 때, 산속을 헤맬 때, 저 옥사에서의 밤. 당신의 기도하는 얼굴을 기도드릴 때마다 생각하고, 당신이 축복하고 있는 얼굴을 고독할 때 떠올리고, 당신이 십자가를 지신 때의 얼굴을 붙잡힌 날에 되새기고, 그리고 그 얼굴은 저의 영혼 속에 깊이 새겨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고귀한 것이 되어 저의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것을 이제 저는 이 발로 밟으려고 합니다.

 

새벽의 희미한 빛. 빛은 노출된 신부의 닭처럼 가느다란 목과 쇄골이 드러나 있는 어깨에 비쳤다. 신부는 두 손으로 성화를 들어 올려 얼굴에다 갖다 댔다. 수많은 사람의 발에 짓밟힌 그 얼굴에 자기 얼굴을 대고 싶었다. 목판 속의 그분은 수많은 사람에게 짓밟혔기 때문에 마멸되고 오그라든 채 신부를 슬픈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그 눈에서는 진정,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 떨어질 것만 같았다. [중략]

 

신부는 발을 올렸다. 발에 둔중한 아픔을 느꼈다. 그것은 형식만의 것이 아니었다. 자기는 지금 자기 생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온 것,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온 것, 가장 인간의 이상과 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밟는다. 이 발의 아픔. 이때 밟아도 좋다고 목판 속의 그분은 신부를 향해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은 바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다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먼 곳에서 울었다.

 

     -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 <침묵>(1966) 중에서

 

지금은 17세기가 아니라 21세기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권리다. 한기호 의원은 말하자면 그런 민주주의 핵심을 부정한 셈이다. 그것도 17세기, 봉건시대의 가장 극악한 제도를 끌어와서. 그는 사상검증 대상자로 “지금 약 30명 정도가 법을 위반한 전력자들이다. 그럼 이들이 이후에 사면되거나 복권됐다 하더라도 그거에 대한 전향 확인을 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했다.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인 ‘전향’ 운운도 우습지만, 사면·복권된 사람을 검증하겠다는 것도 억지다. 정치적 목적의 사면은 좀 다르지만 사면·복권이란 어느 개인의 알량한 자선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한때는 법에 어긋났던 일도 시대의 변화와 추이에 따라 공동선을 위한 행위로 추인됨을 법적 제도적으로 허용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한심스러운 일은 졸지에 ‘헌법기관’이라는 국회의원들의 사상과 국가관을 검증하라는 ‘코미디’ 앞에 선 보수 언론과 정치인들의 계속되는 침묵이다. 그 침묵은 엔도 슈사쿠가 소설을 통해서 제기한 ‘신의 침묵’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말할 것도 없다.

 

 

2012. 6. 10. 낮달

 


2020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후미에’는 형태를 달리하면서 남아 있다.

 

· 국가직 공무원 5급 공채(행정고시) 최종 면접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밀어붙이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국민 자격이 없는 자 등을 물었다. (<한겨레> 2015.11012.)

 

· 박근혜 정부 때 국가정보원이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 간부의 승진 심사 때 현미경식 ‘사상검증’을 한 정황이 10일 드러났다. 국정원은 방통위에 보낸 승진 대상자 ‘신원조사 회보서’에서 ‘방송 정상화’에 역행하는 정책을 만든 간부를 긍정 평가하는가 하면,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국정원 업무 옹호 여부까지도 평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겨레> 2017.10.10.)

 

·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에서도 사상검증은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2011년 당시 야당이 추천한 조용환 후보가 결국 낙마한 사례도 있다. 이 밖에도 비슷한 형식의 사상검증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데, 이는 애국심이라는 주관적 잣대로 저지르는 후보자의 양심과 신념에 대한 폭력이다.

 

· 195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의 횡포 못지않은 시대착오적 사상검증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한 한국 사회는 여전히 전근대사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지 모른다.

 

2020.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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