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신경림(1935 ~ 2024. 5. 22.)
시인 신경림(1935~2024) 선생이 돌아가셨다. 별세 소식은 어젯밤 텔레비전 뉴스에서 들었지만, 정식 부음 기사는 오늘 아침에 확인했다. 보도에 따르면, 선생은 22일 오전 8시17분께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 89라는 숫자에 잠깐 눈길이 머물렀다. [관련 기사 : ‘농무’ 신경림 시인 별세…민중시로 우리의 마음 울리고]
지난 4월 초에 벗의 모친이 89세로 세상을 버리셨고, 2002년 가을에는 나는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그때 어머니의 향년이 89였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가신 지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향년이 89라면 장수했다고 할 수도 있긴 한데, 요즘은 워낙 구순을 넘기는 이가 많으니 아쉬워하는 마음도 적지 않은 듯하다.
신경림 선생을 나는 만나 뵌 적도, 그의 훈도를 받은 일도 없다. 습작 시조차 한 편 쓴 적이 없으나, 그의 시를 읽었고, 중고등학교에서 교과서나 교재에 나오는 그의 시를 가르치면서 그와 ‘연’이라면 연을 맺었다. 선생은 울림이 적지 않지만, 어렵지 않게 사람들의 마음에 닿아오는 시를 썼다, 고 나는 생각한다.
교과서에서 처음 가르친 시가 중3 국어 교과서에 실린 ‘가난한 사랑 노래’(1988)였고, 정작 대표작이랄 수 있는 ‘농무’(1975) 등의 시는 2000년대 이후에 가르친 듯하다. 모르긴 해도 그의 시는 비교적 교과서나 교재에 많이 실리지 않았나 싶은데, 이는 그의 시가 사변적이지 않으면서 보편적 정서에 다가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분명친 않지만, 내가 처음 가르친 그의 시는 부교재에 실린 ‘갈대’(1956)였다. 시를 건성으로 읽던 때여서인지, 나는 별로 유념하지 않은 채 아이들에게 그 시를 풀어주었다. 두 번째 시편이 ‘가난한 사랑 노래’(1988)였는데, 절제된 ‘갈대’에 비기면 시가 만들어진 서사가 남달라서일까, 좀 감성적으로 가르쳤던 것 같다.
이 시는 당시 노동운동을 하다가 수배를 받던 어느 청년의 조촐한 결혼식에 주례를 섰던 시인이 신혼부부의 결혼을 축하해 주는 뜻으로 쓴 시라고 한다. 1980년대 한국 도시 노동자들의 가슴 아픈 현실을 풀어낸 이 시에는 시대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며 싸운 청년들의 사랑과 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현실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으로 가득하다. (* 이 일화는 널리 알려진 것이긴 하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는데, 원로 소설가 이경자 선생의 증언이 가장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셨지만, 술 마실 돈은 없어서 어떻게 하면 공짜 술을 마실 수 있을까, 궁리하고 찾아가고 만나고. 그래도 얻어 마신 술이 성에 차지 않아 맨정신이 남아 있으면 돈암동에서 내려 미아리고개를 걸어서 넘어와 길음동 시장 끝자락에 간판도 못 단 술집에서 외상술을 마시고 또 외상값을 갚는다고 가서 다시 외상술을 마시던 집이 있었죠. 그 집의 딸이 결혼할 때 지어준 시.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신경림은 몰라도 이 시의 한 구절은 누구나 알 것.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 이경자, “선생님을 추억하는 죄 용서하지 마셔요”(한겨레, 5월 23일 자) 중에서
선생이 1956년 <문학예술> 지에 발표한 등단작 ‘갈대’는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읽혔다. 1956년은 내가 태어난 해인데, 그는 우리 나이로 스물한 살의 청년이었다. 등단작이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시와 소설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시인의 예사롭지 않은 시력(詩歷)에도 불구하고 입문기 작품이 꼽히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순수한 열정으로 빚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명상적, 철학적 서정시로 자리매김하는 이 시는 유약한 인간 존재의 표상인 ‘갈대’를 통해 인간 실존의 고독과 비애를 형상화하고, 비극적인 삶의 인식에 이르고 있는데, 이는 시인의 초기 시 경향을 대표한다. 그러나 시인은 1970년대 이후 농촌의 암담한 현실에서 빚어지는 농민의 아픔에 주목하면서 이른바 ‘민중시’ 계열의 시로 이른바 ‘참여 시’의 대열에 참여한다.
‘농무(農舞)’는 “풍물놀이에 맞추어 추는 춤”이라는 흥겨운 소재를 시상으로 삼아 역설적으로 산업화·도시화로 말미암아 점점 황폐해져 가는 1960~70년대의 비극적 농촌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시다. 겉으로는 흥겨움을 내세우지만, 속내엔 자조의 정서가 짙다. 그러나 시는 농민들이 한과 울분을 춤과 신명으로 승화하면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표출한다.
“과장(科場), 백일장, 시장(市場) 따위가 끝남. 또는 그런 때.”를 뜻하는 ‘파장(罷場)’ 같은 시도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시골 장터의 정취와 농민들 삶의 애환을 노래했다. 시는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못난 놈들”의 공동체인 농촌이 마침내는 “절뚝이는 파장”으로 끝나는 현실은 농촌의 비극을 아프게 형상화한다.
‘정착하고 싶으나 떠돌이로 살 수밖에 없는 민중의 삶’을 보여주는 시 ‘목계장터’(1999)는 남한강의 나루터 가운데 가장 번잡했던 목계 나루가 배경이다. 이 나루를 중심으로 사람들의 억센 생명력을 상징과 비유로 형상화하면서 민중의 삶과 애환을 토속적 언어로 담담하게 그려냈다. [관련 글 : 목계나루와 신경림의 ‘목계장터’]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라는 책을 사서 읽었던 거 같은데, 서가를 뒤져도 보이지 않는다. 한 권쯤은 있으리라고 여기고 찾아보았으나, 내 서가엔 선생의 시집이 한 권도 없다. 아마, 그건 내가 선생을 교과서에 실린 원로 시인이라고 여기는 데서 그쳤기 때문일 것이나, 문학 교사로서 가난한 서가는 부끄럽다. 우연히 5월의 장미 이야기를 쓰면서 그의 시 ‘장미에게’를 인용한 적이 있는데, 새삼스레 그 시를 되짚어 읽어본다. [관련 글 : 신경림 ‘장미에게’]
나는 선생을 한 번도 뵌 적은 없으나 친구 정영상(1956~1993) 시인이 전해 준 선생의 일화 하나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선생이 ‘라면도 먹을 만하더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에 어떤 라면 회사에서 선생에게 거액의 출연료를 제의하면서 광고를 하나 찍자고 제의했더란다. 물론 선생이 이를 단박에 거절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야기를 전해 준 벗은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났지만, 나는 선생의 인품이 그러고도 남았으리라고 다시 머리를 끄덕인다.
온라인 서점에서 확인해 보니 2004년에 선생의 시 전집(신경림 시 전집)이 두 권으로 나와 있다. 창비에서 나온 <농무>는 아직도 팔리고 있다. 나중에라도 선생의 시집을 꼭 한 권 서가에 들일까 한다. 멀리서, 선생의 시를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문학 교사로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선생의 영면을 빈다.
2024. 5. 2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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