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1951~2024.7.21.)
소극장 학전을 이끈 김민기 대표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 나보다 5년 위일 뿐인데, 병마로 그는 서둘러 먼 길을 떠난 것이다. 오늘 오후에 그 부음을 뉴스로 읽고 나는 우정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작 일흔셋에 세상을 떠나면 어떡하노……. [관련 기사 : 학전 이끈 ‘아침이슬’ 김민기 별세…향년 73]
김민기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인사지만, 나는 단지 노래 몇 곡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 노래는 그가 대학 신입생이던 1971년에 냈다는 ‘아침이슬’과 ‘상록수’(1979) 등이다. 그를 음악인으로 규정하는 데는 더 많은 노래와 그가 소극장 학전을 운영하며 이끈 뮤지컬 등이 넘칠 테지만 말이다.
‘아침이슬’과 ‘상록수’로 기억되는 사람, 김민기
그러나 나는 소극장 학전에도 가보지 못했고, 뮤지컬 <지하철 1호선>도 모른다. 그러나 교사 초년생 시절에 아이들과 나눈 ‘아침이슬’과 ‘상록수’를 잊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한 곡의 노래로서가 아니라, 그 노래에 깃든 시대와 저항, 청년의 열망 때문이다.
1970년에 나온 ‘아침이슬’을 내가 익혀 부르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뒷날, 고교를 다니던 197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만 해도 나는 그 노래에 숨은 의미들은 물론, 김민기의 존재도 이해하지 못한 어수룩한 시골뜨기였다. 나는 ‘아침이슬’을 가수 양희은의 노래로만, 송창식·윤형주·김세환 등 젊은 대중가수로 대표되는 청년 문화의 일부로만 이해했을 뿐이었다. [관련 글 : 그 새벽의 노래, ‘아침이슬’ 세상에 나오다]
정작 그 의미를 새기면서 그의 노래를 이해하게 된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다. 초임 여학교를 거쳐 고향의 남학교로 옮겨 문예 동아리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기였다. 그 무렵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지던 평교사회와 지역 교사협의회를 꾸리며 나는 교육운동에 입문했었다.
‘아침이슬’과 ‘늙은 군인의 노래’를 개사한 ‘늙은 교사의 노래’ 따위를 부르면서 우리는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깨우쳤다. 그의 노래와 함께 민중가요를 목 놓아 부르면서 우리는 변혁의 열망과 뜨거운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의 교육적 분노가 운동으로 집약될 수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 게 그 노래들이었다. [관련 글 :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이 노래가 서른 살이 됐다]
김민기와 김호철 같은 이들이 만든 노래 몇 곡을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목청껏 부른 게 다지만, 어찌 우리가 나눈 게 고작 몇 곡의 노래뿐이었겠는가. 우리는 그들이 묘사한 세상,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현실에서 공유한 동시대인이었다. 우리는 공동의 적을 향해 같이 분노했고, 세상의 진보와 변화를 위해 함께 싸운 것이었다.
해직 무렵, 아이들과 함께한 김민기의 노래
그 무렵 나는 서울교사협의회에선가 만든 노래 테이프를 하나 갖고 있었는데, 그걸 아이들이 빌려 갔고, 어느 날 이 녀석들은 점심시간에 학교 방송에 거기 담긴 노래를 틀어버린 것이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조그만 소동이 빚어졌다. 방송으로 나간 노래는 ‘아침이슬’ 등 몇 곡이었고 아이들은 줄줄이 학생과장에게 불려 갔다. 아이들을 닦달하던 학생과장에게 내가 항의하는 과정에서 잠깐 충돌이 있었고, 나는 교감과도 실랑이를 벌어야 했다.
교감은 아침이슬의 ‘묘지에 붉게 타오르는 태양’ 등의 가사에 시비를 걸었고, 단호하게 맞서려 했던 나는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교장이 관련 경위를 문서로 쓰라고 요구했는데, 그걸 썼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에 없다. 1980년대였는데도 아침이슬은 그런 식의 불온한 노래를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상록수’는 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김민기가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에 부를 축가로 만든 노래였단다. 전두환 독재정권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금지곡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아침이슬’과 더불어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 가요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
‘상록수’는 언젠가 아이들에게 불러준 노래였는데, 아이들은 그걸 이내 익혀서 즐겨 부르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보니, 아이들은 3절의 마지막 소절인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를 가슴팍에 인쇄한 단체 티셔츠를 만들어 입고 다녀서 교사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곤 했다.
그때의 아이들이 올해 우리 나이로 쉰넷이 되었으니, 그간 흐른 세월도 적지 않다. 아이들은 내 퇴임 모임에도 함께해 주었고 지금도 안부를 나누고 있다. 김민기 대표에게는 그가 쓴 숱한 노래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그걸 부르고 한 시대를 함께한 이들에게 그 노래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관련 글 : 30년, 제자들과 함께 늙어가기]
학전 이후, 그는 ‘예술가들의 디딤돌’이 되고자 했다
2000년 이후에 나는 운동과 운동가요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었고 김민기도 시나브로 잊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기실 그는 1991년 소극장 학전을 세우고 1994년에는 극단 학전을 창단하면서 ‘예술가들의 디딤돌’ 구실을 다했던 모양이다.
학전에서는 동물원·들국화·장필순·박학기·권진원·유리상자 등이 노래했고, 김광석은 1천 회를 공연했다.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5천여 회에 가까운 장기 공연을 하면서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 등 여러 배우가 거쳐 갔다. 올 3월, 학전 폐관을 앞두고 열린 ‘학전 어게인 콘서트’에는 가수·배우·예술가 50여 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시대를 앞서간 한 위대한 예술가의 부음 앞에 그가 쓴 노래에 얽힌 사소한 개인적 기억들만 주절댄 듯하여 민망하다. 그러나 그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시골 사람이 그의 노래로 애틋한 한 시대를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노래가 가진 힘이고, 그의 문화적 영향력을 반증하는 것일 터이다.
다시 먼 길 떠나는 그, 영면하길
멀리서나마 이제 먼 길 떠나는 그를 마음으로 배웅하고자 한다.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떠나는 위대한 예술가, 김민기의 영면을 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두 아들이 있다고 한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으며, 발인은 24일 오전 8시다. <한겨레>에 실린 그의 약력을 싣는다.
2024. 7. 2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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