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시 ‘장미에게’
몇 해 전부터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는 유난히 장미가 흔하다. 가정집 담 너머로 가지를 뻗은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파트 화단이나 담장, 길가 가드펜스 등에도 붉은 장미가 흐드러졌다. 늘 그렇듯 기억은 혼란스럽다. 예전부터 있던 걸 이제야 발견한 건지, 근년에 시에서 의도적으로 심은 것인지가 애매하다는 말이다.
어쨌든 출퇴근길에 풍성하게 핀 장미꽃을 즐길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 이내 장미는 진다. 꽃 진 자리가 정갈한 꽃이 어디 있겠나만 장미의 뒤끝도 그리 깔끔하지 않다. 학교 교사 뒤편의 축대에 핀 장미도 시나브로 지고 있는 참이어서 앙상한 꽃받침만 남았다.
다섯 잎으로 된 꽃받침은 이름 그대로 꽃을 받쳐주고, 꽃술을 보호한다고 한다. 꽃보다 크기가 훨씬 작아서 꽃이 피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꽃이 지면 비로소 그 참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두어 장 꽃잎을 달고 있는 꽃받침이 주는 느낌은 뭐랄까, 좀 특별한 울림이 있다.
마지막 한 장의 꽃잎을 달고 있으면서 말라가고 있는 꽃받침을 바라보는 마음은 애잔하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5월의 영화를, 그 번성을 냉정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말라 시들고 있는 장미, 이미 소진된 열정과 세월 앞에서 화려하고 오연(傲然)한 모습은 간곳없는 것이다.
신경림 시인의 시 ‘장미에게’를 떠올리는 이유는 비슷하면서 다르다. 시인은 ‘새빨간 / 꽃’, ‘꽃잎에 쏟아지는 달빛과 / 그 그림자’, ‘복사꽃 두 뺨’과 ‘익어 터질 듯한 가슴’을 바라보면서 ‘아름답다고’ 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벌레 먹어 누렇게 바랜 / 잎’과 ‘이웃한 나무들이 / 떠는 소리’ 때문이고, 어디선가 들리는 ‘더럽고 야비한 음모의 수런거림’ 때문이다. ‘아직 아물지 않은 / 시퍼런 상처’ 때문이고 ‘애써 덮어도 곪았던 자욱’ 때문이다.
시인은 황홀한 달빛 속의 장미에서 ‘음모’를 읽고 거기 감추어진 ‘상처’를 눈여겨보았다. 농염한 아름다움 속에 감추어진 가시처럼, 아름다움에도 상처는 있는 법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등 뒤에, 혹은 손등의 곪은 자국을 찾아내는 시인의 웅숭깊은 시선은 그래서 아름답다.
나는 드러난 장미 꽃받침과 남은 꽃잎을 사진으로 찍고 디지털 필터로 파스텔 효과를 주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줄여 대문 사진으로 올렸다. 거기 특별한 의미는 없다. 좀 지겹다 싶어서 바꾸는 것일 뿐이다.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면서 우울한 유월의 끝을 보내고 있다.
2011. 6. 2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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