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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부음, 궂긴 소식들

‘고별’과 ‘석별’의 중저음 가수 홍민 떠나다

by 낮달2018 2023.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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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 가수 홍민(1947~2023.11.2.)

▲ 2일 별세한 원로가수 홍민. KBS에서 지난 1월 9일 방영된 '가요무대' 장면 갈무리

아침에 식탁에서 태블릿을 보다가 가수 홍민 씨의 부음 기사를 보았다. ‘1970년대 인기를 끈 원로가수 홍민이 지난 2일 대장암으로 별세’했다는 기산데, ‘원로가수’라는 칭호가 어쩐지 낯설었다. 그러나 뒤의, 76세라는 향년을 보고서야 머리를 끄덕였다. [관련 기사 : 고별’·‘고향초70년대 풍미한 포크 가수 홍민 별세]

 

1974년 고교 졸업반 시절에 만난 가수 홍민

 

그가 나보다 8년이나 위였던가. 나 역시 일흔이 내일모레지만, 그는 내게 19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초반의 2, 30대 젊은 가수로만 환기된다. 1970년대 초만 해도 텔레비전이 막 대중적으로 보급되던 때여서 나는 TV 화면에서 그의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고, 단지 목소리만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에 따르면 1947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1971년 장미라와 듀엣으로 발표한 김동주 작곡 ‘그리운 사람’으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이듬해인 1972년 이탈리아 번안곡 ‘고별’과 박시춘 작곡 ‘고향초’를 다시 불러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1974년 나는 고3이었고, 큰누나 댁 가까운 데 셋방을 얻어 지내며 밥은 누나한테서 얻어먹었다. 가끔 저녁을 먹고 쉬면서 TV를 보다가 내친김에 연속극도 보고 올 때도 있었는데, 당시 밤 9시부터 방영한 김수현의 드라마 ‘강남 가족’이 샐러리맨의 귀가를 앞당길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었다.

 

표재순 연출의 이 20분짜리 드라마에는 최불암과 김혜자가 부부로, 홍세미와 송재호가 각각 자녀로 등장했다. 가족 드라만데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 대신, 당시 신인 가수였던 홍민의 번안곡 ‘고별’이 거기 삽입곡으로 빈번히 나온 걸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그 노래를 익힌 것은 그 드라마에서였다.

▲ 홍민의 히트곡 '고별'과 '석별'의 가사

“눈물을 닦아요, 그리고 날 봐요 / 우는 마음 아프지만 내 마음도 아프다오”로 시작하여 “운다고 사랑이 다시 찾아줄까요”로 끝나는 가사도 감미로웠지만, 무엇보다도 중저음의 목소리에 나는 단박에 매료되었다. 뒤이어 나온 그의 노래 ‘석별’도 나는 이내 익혀서 부를 수 있었다.

 

드라마 강남 가족’의 삽입곡 고별’과 애창곡이 된 석별

 

부음 기사는 홍민이 “부드러운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앞세운 노래들로 1970년대를 풍미했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글쎄, 나는 당시 그의 인기가 ‘풍미’ 수준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요즘처럼 각종 매체로 대중가요나 가수가 각종 매체로 대중들과 접촉이 쉽던 시절이 아니라, 고작 <선데이 서울> 같은 주간지로 연예계 소식을 전해 듣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당시 홍민의 인기를 지켜본 가수 김도향이 “그가 오빠 부대의 원조”라고 말했다니 그의 인기가 보통 수준 이상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고별(告別)’이 ‘헤어지면 작별을 알림’의 뜻이라면 ‘석별’은 ‘애틋하게 이별함’의 의미인데 나는 어쩐지 ‘석별’의 가사가 더 마음에 다가왔다. 아마 거듭되는 후렴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의 울림을 남다르게 느껴서였을 것이다.

 

나는 1980년대 초에 대학 동기의 결혼식 뒤풀이에서 그 노래를 열창했던 걸 기억한다. 요즘처럼 노래방이 따로 없던 시절이라, 사람들이 모이면 반주 없이 노래를 청하고 듣곤 하던 시절인데,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였다. 지금도 나는 ‘석별’을 혼자서 흥얼거리곤 하는데, 역시 ‘사랑했노라’를 되풀이하는 그 의고체의 문장이 마음에 감겨서다.

▲ 홍민이 발매한 디스크들

1948년 이전에 발표된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의 ‘고향초’도 나는 즐겨 불렀다. ‘고향초’도 나는 ‘정든 바다 정든 땅을 잊었단 말인가’로 불렀는데 오늘 확인하니 그 가사는 ‘‘정든 고향 정든 사람’이다. 왜 나는 고향과 사람을 ‘바다와 땅’으로 바꾸어 불렀을까.

 

이념과 분단이 할퀸 그의 아픈 가족사

 

1980년대 이후, 대중가요와는 멀어진 나는 그를 까맣게 잊었다. 가끔 그의 노래를 부를 때만 반짝 그를 생각했다. 기사에 따르면 그는 충북 제천에서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며 노래 활동을 이어가다, 건강이 악화하며 사업을 접었다고 한다. 올 7월 KBS 1TV ‘가요무대’에 나와 기타를 메고 ‘행복의 나라로’를 부른 것이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됐는데, 그는 당시에도 몸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KBS에 출연을 자청했다고 한다.

 

홍민은 2019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부친이 어릴 적 월북했고, 아버지를 찾으러 나간 어머니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가족사를 공개하기도 했단다. 그와 그의 가족도 이념과 분단이 할퀴고 간 상처를 피하지 못했던가. 그의 부음은 그의 아프고 고달픈 가족사의 끝이 된 것일까.

 

대중가수는 자신의 노래로 대중의 애환을 대신하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살다가 간다. 그가 단지 생계의 수단으로 노래했다고 하더라도, 대중은 그와 함께 삶과 사랑, 이별의 아픔 따위로 공유하는 동시대인의 연대를 이어간다. 백수도 드물지 않은 시대, 병마로 말미암은 그의 부음은 안타깝다.

 

스물이 되기 전에 그를 알았고, 20대에 그의 노래를 불렀던 팬으로, 중저음의 매력적인 가수 홍민을 보낸다. 저세상에서나마 그가 잃어버린 어버이를 다시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23. 11. 3. 낮달

 

홍민 - 석별 [가요무대/Music Stage] | KBS 221107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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