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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목계나루와 신경림의 ‘목계장터’

by 낮달2018 2020.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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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남한강 강변의 내륙 포구 목계리

▲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에 있는 목계나루 . 오른쪽에 보이는 콘크리트 다리가 목계대교다 .

어제 우연히 목계 나루터를 다녀왔다. 원주의 토지문학공원을 거쳐 법천사·거돈사 등 절터를 돌아오던 귀갓길에서였다. 원주도 초행이었고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들어간 충주 쪽도 낯설기는 매일반이었다. 오후 내내 날씨는 찌푸린 채였고, 네 시가 넘으면서 비가 찔끔찔끔 뿌려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강변을 끼고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남한강이었던가. 오른쪽으로 제법 큰 다리 하나를 흘낏 스쳐보았다고 느꼈는데, 눈앞에 ‘목계나루터’라 새긴 거대한 돌비가 튀어 들어왔다. ‘목계’라……, 저게 신경림의 시 “목계장터”의 그 ‘목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내 짐작이 맞았다. 목계(牧溪)는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남한강 강변에 있는 내륙 포구마을이다. 이 마을은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큰 포구 장시(場市)가 서 1800년대에는 충주보다 인구가 많았던 곳이라 한다.

 

남한강은 상류의 가흥창, 목계, 충주, 청풍, 매포, 영월 등에서 거둔 세곡(稅穀)이 한성으로 올라가는 수운(水運)이 이루어지던 강이다. 경제 규모가 보잘것없던 시절에는 물물교환 형식의 상거래에 그쳤지만 조선 후기에 인구가 늘고 상거래가 늘어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상설시장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따라 목계나루는 남한강의 내항으로 크게 발달하였다. 목계 위쪽의 남한강 상류는 봄가을의 갈수기에 수심이 얕아 수백 섬을 싣는 큰 배(장삿배)가 운행할 수 없었던 반면, 목계나루에는 수십 척이 선착할 수 있는 넓고 깊은 강과 백사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계나루는 영월과 제천 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고 충북, 강원, 경북 등 중부 내륙지방 육로 중심지였다. 또 서울과 가까워 한성의 문물을 빨리 받아들인 지역이라 남한강 수운 물류 교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목계의 옛 이름이 ‘전국에서 다섯째 안에 드는 포구’라는 뜻의 오목계(五牧溪)였던 이유가 충분히 있었던 셈이다.

 

▲ 신경림(1936~   ) 시인

목계는 과거에 세미(稅米)를 운반하던 가흥창(충북 중원군 가금면 가흥리 남한강 강변에 있었던 조선 시대의 창고)을 끼고 내륙항으로 발전했다. 당시에는 충청도는 물론 경상도 북부 지방의 세곡까지 받았으므로 가흥과 목계 두 마을에는 큰 상가를 형성하여 충주에 버금가는 성시(盛市)를 이루었다고 한다.

 

남한강 상류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서해에서 생산된 소금과 어물이 모여 활발하게 교역된 목계나루에선 자연 동제(洞祭)가 성했다. 조선 사람의 단합을 꾀하는 미신이라 하여 일제가 금지하자 자취를 감추었던 이 동제는 70년대 재현된 이래 목계별신제라는 이름으로 매년 열린다.

 

목계별신제는 목계나루와 남한강을 통해 이어지는 뱃길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고 나루터 시장의 번영과 주민의 안녕, 그리고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별신굿과 줄다리기, 난장 등이 어우러지는 행사로 현재는 10월의 우륵문화제 때에 지낸다고 한다.

 

중원 태생의 신경림(74) 시인은 목계나루와 관련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이렇게 술회한다. 지난해 목계나루에서 경부대운하 건설에 반대하는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순례단과 만난 자리에서다. (한겨레 기사 보기)

 

“제 어릴 때는 열 척에서 스무 척에 이르는 뗏목이 강을 따라 내려가는 광경이 정말 장관이었어요. 뗏목꾼들이 주거니 받거니 부르는 노래도 일품이었고요. 서울에서 배로 사흘거리인 목계나루는 남한강의 물산이 집결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장이 서면 길게는 닷새까지 흥정이 계속되고, 그동안 씨름이며 줄다리기 같은 놀이가 진행되고 술 파는 집에서는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해요. 운하가 건설되고 댐이 생기면 그런 삶의 흔적이 다 물에 잠기지 않겠습니까?”

 

오래된 개발 시대에 대한 권력의 집착이 강을 따라 흐르던 역사와 문화는 물론, 그 삶의 흔적마저도 위협할 수 있다는 뜻이다. “목계장터”를 노래했던 시인이 목계나루에서 무한개발의 광풍을 걱정해야 하는 세월이다.

 

소공원처럼 꾸며 놓은 나루터의 돌비 옆에 ‘목계장터’를 새긴 시비가 서 있다. 나루터 돌비와는 달리 나지막한 돌에다 새긴 한글 시비는 소박해 보인다. 시비 뒤편으로 강물의 끝자락과 꽤 길이가 긴 다리 하나가 보였다.

▲ 신경림 시비. '목계장터'가 새겨져 있다 .

‘목계장터’는 떠돌이 장사꾼들의 삶의 공간인 목계장터를 배경으로 떠돌이 장사꾼들의 삶과 애환을 토속적 언어로 담담하게 그려낸 시다. 민중들의 억센 생명력은 고도의 상징과 비유를 통해 형상화되고, ‘구름’과 ‘바람’, ‘방물장수’로 표상된 ‘유랑’의 이미지와 ‘들꽃’과 ‘잔돌’로 표상된 ‘정착’의 이미지가 맞부딪친다.

 

작품에서 ‘목계장터’는 근대화 과정에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농촌 공동체로서 민중들의 삶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비록 정착하거나 안주할 곳이 아니라 잠깐 쉬어 가는 곳이지만, 넉넉한 인심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시적 자아는 방랑의 삶과 정착의 삶에 대한 욕구를 동시에 갖고 있다. 맵찬 ‘산서리’와 모진 ‘물여울’을 피해가지만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앞에서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고 싶기도 하다.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구속에서 벗어나, 삶의 고달픔을 잊고자 하는 것이다.

 

이 떠돌이 장돌뱅이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건 민중의 애환이고, 한편으로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난 초연한 삶의 자세다. 3년에 한 번쯤은 천치가 되어 세속을 벗어난, 본연의 삶으로 돌아와도 좋지 않겠냐고 시인은 말한다. 물론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하늘’과 ‘땅’, ‘산’으로 표상되는 ‘자연’이다.

 

시비 너머에 남한강이 흐른다. 수량은 많아 보이지 않지만 물은 푸르다. 오른쪽에 강을 가로지른 콘크리트 다리 목계대교의 촘촘한 교각이 답답하다. 돛 없이 돛대만 단 조그만 나룻배 한 척이 나루터 쪽에 매여 있다. 물론 저 나룻배는 축제 때나 쓰는 소품이리라.

 

그러나 유장한 강의 흐름 이편에 정물처럼 닻을 내린 나룻배는 외로워 보인다.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는 공연한 정서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나루와 배는 ‘떠남’과 ‘이별’, 그 슬픔의 정서를 환기하는 소재인 것이다.

 

나는 우리 시대의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뗏목을 본 적이 없다. 따라서 그걸 상상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나는 시인이 증언했던 대로 뗏목으로 온갖 문물이 실려 내려가고 황포돛배가 오가는 저 전근대의 풍경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인의 시를 통하여, 그 시절을 살았던 낮은 사람들의 숨결은 희미하게 그릴 수 있다. 고단한 삶을 누일 ‘지상의 방 한 칸’을 그리워하면서도 유랑의 삶을 벗지 못하는 이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무하는 것일 터이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대규모 토목사업을 통해 ‘경제’를 살리겠다는 현 정권은 4대 강 주변을 파헤치고 거기서 장밋빛 미래를 노래하고 있지만, 늘 그렇듯 눈먼 개발의 바람은 거기 누대를 살아온 사람의 온기를 빼앗을 뿐이다. 남한강 줄기 목계나루에 당도할 개발의 은전(恩典)을 우울하게 상상해 보며 나는 서둘러 목계나루를 떠났다.

 

 

2009. 4.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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