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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복서 최요삼과 김득구, 두 죽음에 부쳐

by 낮달2018 2023.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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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에서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한 두 프로 복서의 죽음

▲ 프로 복서 최요삼 (1973~ 2008) 선수가 끝내 뇌사 판정을 받고 장기를 이식자에게 기증하고 떠났다.

타이틀을 방어하고 링에서 쓰러졌던 프로 복서 최요삼(34·숭민체육관)이 끝내 뇌사 판정을 받았다. 서울 아산병원은 오늘(2일) 낮 12시 45분 최종적으로 그의 뇌사 판정을 결정했다.

 

병원 측은 유족들의 요청에 따라 그의 법적 사망일을 그의 부친 기일에다 맞추어 주었다. 이는 최 선수에게 제삿밥이라도 차려주기 위한 가족들의 마지막 배려였다고 한다.

 

최 선수와 가족의 뜻에 따라 오늘 저녁 장기 적출이 이뤄지는데 심장, 신장, 간장, 췌장 등 최대 9부분의 장기가 이식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전하게 된다고 한다. 적출 수술이 끝난 다음 인공호흡기를 떼면 그의 삶을 위한 싸움도 모두 끝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최후를 내다보았던 것일까. 최 선수는 일기장에 그렇게 적었다고 한다.

 

“더 이상 맞고 싶지 않다. 피 냄새 맡고 싶지 않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싶다.”

▲ 마지막 경기에서 최요삼 선수. 그는 이 경기 뒤에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제한된 공간, 링 안에서 상대방과 주먹질을 통해 승패를 가르는 권투 선수가 ‘맞기 싫다’고?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는 모든 복서가 남몰래 품는 소원 같은 것인지 모른다. 비록 매 맞아 돈을 번다고 하더라도 맞는 건, 그것도 쓰러질 때까지 맞아야 하는 건 끔찍하지 않겠는가.

 

한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침을 뱉으면 피 섞인 모래(실제는 치석 떨어진 것)를 한 줌씩 뱉어낸다는 권투 선수들. 매 회전 너무 힘들어 상대 선수가 아니라, ‘기권해 버릴까 말까하는 자기 의지’와 싸워야 한다는 그들. 경기가 끝나고 화장실에서 피오줌을 누어야 하는 그들에게 복싱은 버릴 수 없는 천형의 운명 같은 것이다.

 

프로 복싱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다. 이른바 헝그리 스포츠로서 복싱은 한때 맷집과 주먹질 하나로 돈과 인기를 거머쥘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가난한 시골 청년들의 꿈이었다. 그래서 7, 80년대 내내 서너 체급의 세계 챔피언을 내고 있었던 우리나라는 복싱 강국이었다. 복싱은 아시아 경기나 올림픽의 메달박스로 효자 종목이기도 했다.

▲ 링 위에서 쓰러진 김득구 선수 (1982. 11. 13.)

최요삼 선수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는 뉴스를 들으며 나는 1982년 타이틀전이 끝나고 숨진 비운의 복서 김득구를 생각했다. 김득구는 1982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에서 미국의 레이 맨시니에게 14회 KO패하고 의식을 잃은 뒤 나흘 만에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 살.

 

김득구 역시 사인은 뇌사였다. 당시 뇌사 판정 뒤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는 데 가족 동의가 필요하게 되자 그의 어머니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득구는 심장과 신장을 미국인에게 주고 세상을 떠났다.

 

목숨을 걸고 타이틀을 빼앗아 오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모형 관’을 가지고 갔던 이 비운의 선수는 결국 죽어서 돌아와야 했다. 홈그라운드에서 인도네시아 선수를 상대로 타이틀을 방어한 뒤 쓰러진 최요삼과 달리 김득구는 적지에서 너무 강한 적수를 만나 결국 패배했고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관련 글 : 복서 김득구, ‘헝그리 스포츠의 마지막 세대가 될 뻔했다]

 

김득구의 죽음은 주변 사람에게도 충격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자살했으며, 촉망받던 복서였던 상대 선수 레이 맨시니도 곧 권투를 그만두었다. 권투가 위험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퍼져 나갔고 미국 의회에서 이에 대한 청문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후 WBA에서는 세계 타이틀전(15라운드)을 12라운드로 줄이고 휴식 시간도 늘렸고 스탠딩다운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엄청난 투혼에도 불구하고 결국 링에서 쓰러진 권투 선수에 대한 국내의 여론은 상당히 비감한 민족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듯하다. 그의 장례가 권투인 장으로 치러지고, 훈장까지 추서된 것은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 조치였다.

 

1981년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곽재구 시인이 <김득구>를 쓴 것도 이때였다. 시인은 김득구의 도전을 ‘조선낫’과 ‘조선 맷돌’로 표현했고, 가난한 청년의 슬픔과 기다림을, 그리고 무너져 내린 희망을 노래했다. 조선낫을 휘두르는 청년 앞에 선 것은 ‘부와 프런티어 정신’으로 무장한 초강대국, ‘돈이 많은 나라’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득구와 달리 최요삼 선수가 회복되기를, 비록 권투를 계속하지는 못하더라도 말끔히 깨어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그는 깨어나지 못했다. 지금 이 시각, 그의 몸은 마지막 사랑을 베풀기 위해 의사들의 손길 아래 열리고 있을지 모른다.

 

서른네 살. 권투 선수로는 많은 나이다. 그런데도 그를 링에 서게 한 것은 단순한 투혼이 아니라 고단한 삶일지 모르겠다. 그는 떠났지만, 가족들은 보상은커녕 8백여만 원의 치료비부터 걱정해야 할 형편이라 한다. 그는 더 이상 ‘맞지 않아도, 피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게 그가 가는 길의 마지막 위안이라는 게 슬프고 분하다. 최요삼 선수의 명복을 빈다.

 

 

2008. 1. 2. 낮달

 

* 다 옮겼다고 생각했는데 공교롭게 이 글이 빠져서 뒤늦게 새로 블로그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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