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1958 ~ 2024. 5. 19.)
지난 금요일 아침 일찍 군위로 가는 시외버스에서 <한겨레>를 읽다가 김성환(1958~2024)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의 늦은 부음을 들었다. ‘가신 이의 발자취’ 꼭지에 실린 송경동 시인의 김성환 위원장을 추모하는 글을 읽으면서였다. 바로 확인해 보니 김 위원장은 지난 19일 세상을 떠났고, 그의 장례는 22일에 이미 치러졌다. 향년 65.[관련 기사 : 김성환, ‘무노조 삼성’ 맞서 투쟁 멈추지 않은 진짜 노동자]
나는 송경동 시인의 추모 글을 읽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한동안 계속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일면식도 없을뿐더러,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그가 단연 주인공으로 나오는 삼성의 노조 탄압 기사가 고작인 퇴직 교사가 참았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삼성에 포획되지 않은 유일한 노조 삼성일반노조 위원장 김성환
물론, 그것은 값싼 동정이나 연민은 아니다. 나는 교사로 교원노조(전교조) 설립에 참여하면서 해고된 뒤, 20여 년쯤 노조 활동가로서 살았다. 그러나 그런 내 이력 따위는 김성환의 이력과 감히 빗댈 수 없다. 나는 한 차례 해고와 한 차례 기소 외에는 감옥에 가지도 않았고, 감옥에 갈 만큼 중요한 직책을 수행한 일도 없다.
자신을 노동자로 자부할 만큼의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내가 노동자였다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교육 노동자로서 모든 일반 노동자 동료들과 이어져 있다는 연대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기꺼이 그들 편에 쓰려고 애쓰는 이유다.
내가 처음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노동조합을 금기시하고 있는 삼성을, 삼성의 ‘집요한 노무관리 방식’을, 그들이 떠받드는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무관하게’ ‘야만적’이라고 여기면서 삼성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을 응원해 왔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도덕적인 기업이 드문 현실에서 ‘윤리적 소비’의 일부로서 내가 삼성의 상품을 더는 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2007년 무렵이고, 이후 지금까지 그걸 비교적 잘 지켜왔다. [관련 글 : ‘삼성’ 물건 안 쓰고 살기]
나는 김성환을 위원장을 만난 적도, 그와 간접적으로 대화해 본 적도 없다. 나는 단지 노동 관련 기사를 통해 그가 30여 년 가까이 삼성에 노조를 세우기 위해 싸워온 노동운동가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가 수십 년간 ‘무노조 경영’을 고수해 온 삼성에 맞서 벌여온 고단한 투쟁의 일부를 단지 지면으로만 만났다.
김성환은 1993년 이천전기에 입사해 노조를 만들려고 활동하다 1996년 회사가 삼성전자에 인수되는 과정에서 해고되었다. 여기 불복하며 싸움을 시작한 그는 2000년에 다른 삼성 해고자들과 삼성그룹 해고자 복직 투쟁위원회(삼성해복투)를 결성했고, 2003년에는 삼성일반노조를 세웠다. 삼성일반노조는 ‘지역과 업종을 망라한 삼성 관련 노동자들의 조직’이었다. 삼성이 이 노조를 절대 인정하지 않은 건 물론이다.
“삼성일반노조는 2010년대까지 갖은 노조 탄압으로 ‘무노조 경영’을 고수해 온 삼성에 포획되지 않은 유일한 노조였다. 김 위원장은 삼성의 전방위적인 정관계 로비를 드러낸 ‘삼성 X파일’·‘떡값 검사’ 사건(2005년), 삼성의 비자금 비리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2007년), 삼성의 태안 기름유출 사고(2007년), 삼성반도체 노동자 백혈병 사건(2007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성매매 의혹 동영상 뉴스타파 보도(2016년) 등 큼직큼직한 사건 때마다 삼성 비판에 앞장섰다.” [관련 기사 : “세상에 참 드문 사람”… 30년간 삼성과 싸운 ‘양심수’의 조용한 죽음] 중에서
김성환은 삼성의 가공할 노조 탄압과 감시, 미행과 사찰의 가장 큰 희생자였고, 피해자였다. 그는 삼성의 노조 탄압과 관련한 ‘삼성 재벌 노동자 탄압 백서’(2002년)를 펴내고 삼성의 불법 휴대전화 위치추적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 1인 시위로 인한 업무방해 등으로 2005년 2월 구속됐다.
올곧게 자신의 삶을 산 ‘참 드문 사람’, 편히 쉬시라
그러나 수감 중이던 2007년 2월, 국내 노동운동 인사 중 처음으로 국제앰네스티가 선정한 ‘양심수’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수여하는 ‘전태일 노동상’도 옥중 수상했다. 그는 형기를 6개월 앞둔 2007년 12월에 특별사면 됐다. 그가 벌인 삼성과의 싸움은 그가 엮은 책 <골리앗 삼성 재벌에 맞선 다윗의 투쟁>(삶이 보이는 창, 2007)에 기록되어 있다.
“올곧게 자신의 한 생을 살았다. 그래서, 제 남편이지만, 참 드문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는 공적인 모습과 사적인 모습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김성환 씨… 마지막에 참 힘들었지만, 그래도, 하고자 하는 일… 곁눈질 안 하고, 끝까지 그렇게 올곧게, 쭉 이어간 것에 대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당신은 참, 세상에 드문 사람입니다. 잘… 가세요.”
- 위 ‘기사’ 중에서
그의 부인이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남편을 가리켜 이른 말,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더 보태고 뺄 게 없는 평가일 것이다. 투쟁은 몸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싸움이다. 마음이 강건하지 못하면 오랜 싸움에 지쳐 떨어지기 때문이다.
골리앗 재벌 삼성과 맞서 사투를 벌인 강건한 투사 김성환은 결국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1958년생이니 우리와 동년배, 베이비붐 세대다. 그러나 “1500만 원짜리 묫자리 하나 쓸 돈도 없어 민족민주열사·동지 묘역인 마석 모란공원에도 모시지 못하고 가족장 후 수목장을 해야 했”다고 했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오랜 동지였던 송경동 시인의 마지막 인사도 한갓진 치사가 아니라, 마음의 인사일 터이다. 삼성일반노조 김성환을 지면으로만 만났던 동년배의 동료 노동자로서 송 시인의 이별 인사에 눈물 한 방울을 얹고자 한다. 어찌 김성환 한 사람뿐이랴. 지금도 자신을 거두지 않고, 싸우고 있는 숱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생각하며.
“골리앗 삼성에 맞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싸워준 눈물겨운 진짜 노동자, 김성환 다윗. 수고하셨고, 고마웠습니다.”
2024. 6.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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