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벚꽃이 지고 없어도 ‘연화지’와 ‘봉황대’는 아름답다

by 낮달2018 2023. 4. 12.
728x90

김천시 교동 연화지(鳶嘩池)와 봉황대(鳳凰臺)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김천시 교동의 연화지. 8500여 평 연못 주변에 심은 벚나무가 꽃을 피울 때는 전국의 나들이객들을 불러 모은다.
▲ 연화지 가운데의 인공섬에 세운 정자 봉황대. 옛 선비들이 이 정자에서 시를 읊고 학문을 논했다.

야간 벚꽃 촬영지로 전국에 널리 알려진 김천시 교동의 연화지(鳶嘩池)에 다녀왔다. 명성은 여러 차례 들었지만, 초행이었다. 올 벚꽃 개화 시기가 일주일쯤 빨라지면서 타이밍을 놓쳤고, 결국 벚꽃이 거의 다 지고 나서야 아내와 주말에 귀향한 아들과 함께 길을 나선 것이다.

 

‘전국적 벚꽃 명소’ 연화지 초행길

 

꽃은 지고 없어도 워낙 명소니 한 번쯤 들러보는 것도 괜찮다고 여겼지만, 차를 대고 호숫가로 들어서면서 나는 이 호반의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금방 눈치챘다. 물은 맑지 않았지만, 수면에 드리운 왕벚나무와 주변의 아파트 등 건물의 그림자가 이채로웠다.

 

언뜻 ‘연화지’라고 하면 ‘연꽃[연화(蓮花)] 연못’쯤으로 여기기 쉽지만, 연화지는 ‘솔개 연(鳶), 시끄러울·바뀔 화(嘩)’ 자의 연화지다. 1707년 김산(金山 김천의 옛 지명)에 부임한 군수 윤택(尹澤)이 솔개(鳶)가 못에서 날아오르다가 봉황(鳳凰)으로 바뀌는 꿈을 꾸고서 ‘연화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 연화지 주변은 아파트와 빌딩이 있는데 이들의 그림자도 물에 비쳐 이채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 벚나무를 비롯한 나무가 우거진 섬에 옮겨진 정자는 읍취헌에서 봉황대, 봉황루 등의 이름으로 불리었다.
▲ 벚나무와 각종 나무에 둘러싸인 봉황대는 이 연화지의 풍경을 몽환적으로 만드는 데에도 일조하는 듯하다.
▲ 연화지의 수면에 비친 나무와 숲. 밪나무이 탐스럽게 벚꽃이 피어 있을 때를 상상하면 이 경치가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 연화지 주변의 아파트도 연화지 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 연화지 수면에 주변의 작은 산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화면을 가로지른 나무는 소나무다.

정자 ‘봉황대’, 군수의 꿈보단 이백의 시에서 따온 듯

 

봉황대(鳳凰臺)는 연화지 안에 있는 정자다. 처음에는 삼락동 마을 북쪽에 있던 낡은 정자로 ‘읍취헌(揖翠軒)’이라고 불리었고,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서 조선조 초기의 문신 유호인(1445~1494) 등 옛 선비들이 이 정자에서 시를 읊고 학문을 논했다. 군수 윤택은 봉황의 꿈을 꾼 뒤 이 정자의 이름을 ‘봉황루(鳳凰樓)’로 바꾸었다.

 

영조 47년(1771)에 군수 김항주가 연화지 북쪽 구화산(九華山)에 있던 정자를 산 밑으로 옮기면서 ‘봉황대’로 바꾸었다. 정조 16년(1792)에 군수 이성순이 개수하였다. 헌종 4년(1838)에는 군수 이능연이 연화지 못 가운데로 옮겼다. 고종 33년(1896)에 중수하였고 1978년 김천시에서 다시 고쳤다.

 

정자 ‘봉황대’는 군수 윤택의 꿈을 유래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중국 이백의 칠언율시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에서 딴 이름으로 추정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연화지 가운데에 인공적으로 산봉우리 3개를 쌓아 만들어서 삼산(三山)이라 하였는데, 이 역시 같은 시에서 따온 것이다.

 

봉황대상봉황유(鳳凰臺上鳳凰遊) 봉황대 위에 봉황이 놀았더니

봉거대공강자류(鳳去臺空江自流) 봉황은 날아간 텅빈 대에 강물만 흐르네.

오궁화초매유경(吳宮花草埋幽徑)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오솔길을 덮었고

진대의관성고구(晉代衣冠成古丘) 진나라 때 의관도 옛 언덕을 이루었네.

삼산반락청천외(三山半落靑天外) 세 봉우리는 청천 밖으로 반쯤 걸려 있고

이수중분백로주(二水中分白鷺洲) 두 갈래의 강은 백로주를 가운데로 나뉘어 흐르네.

총위부운능폐일(總爲浮雲能蔽日) 어쨌든 뜬구름이 해를 가려

장안불견사인수(長安不見使人愁) 장안이 보이지 않아 사람을 시름겹게 하네.

▲ 앞면과 옆면이 각각 3칸인 팔작지붕의 2층 다락집 봉황대의 모습. 누마루에는 올라갈 수 없다.
▲ 조양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 봉황대의 처마에 현판 '봉루관'이 걸려 있다. '봉황대'가 아닌 '봉루관'이 걸린 이유는 모른다.
▲ 봉황대 주변의 단풍나무가 붉고 고운 빛깔의 나뭇잎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 봉황대 현판 대신 걸린 '봉루관' 편액. '루' 자는 흔히 '길들일 서(棲)' 자로 읽히기도 한다.
▲ 봉황대의 누마루 중간 사면에는 분합문(들어열개문)을 달았다. 몇몇 시인 묵객의 시문 편액이 걸려 있다.
▲ 봉황대 쪽에서 바라본 호숫가 풍경. 주변에 카페 등 상업 시설이 들어차 있다.
▲ 조양문을 지나 돌다리를 건너면 나타나는 섬의 봉황대. 숲 속의 정자는 벚꽃이 져도 아름다웠다.

흔히 김천을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을’이라고 하는데 삼산(三山)은 황악산, 금오산, 대덕산을, 이수(二水)는 감천과 직지천을 이른다. 삼산이수는 김천 지역이 ‘금릉(金陵)’으로 불렸던 사실(시군 통합 이전의 김천 군 지역은 ‘금릉군’)과도 관련이 있다. 앞서 든 이백의 시는 ‘금릉의 봉황대에 올라’인 것이다.

 

봉황대 현판이 ‘봉루관’이 된 까닭은?

 

봉황대 입구인 조양문(朝陽門)으로 들어 돌다리를 건너면 앞면과 옆면이 각각 3칸인 팔작지붕의 2층 다락집 봉황대가 나타난다. 3단의 기단 위에 누마루를 올리고 누마루 중간 사면에는 분합문(들어열개문)을 달았는데 누각에는 몇 편의 시문 편액이 걸려 있었다. 봉황대는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정자의 현판은 조양문 쪽 처마 아래 달렸는데, ‘봉황대(鳳凰臺)’가 아니라 ‘봉루관(鳳樓觀)’이다. 그것도 초서라 가운데 글자가 ‘다락 루(樓)’가 아니라 ‘깃들일 서(棲)’라는 주장도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정자에 이름이 아닌 다른 현판이 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지금도 연화지에는 세 개의 산봉우리 대신 인공 섬이 셋이다. 가장 작은 섬에는 소나무와 벚나무 몇 그루가 심겨 있고 나머지 두 섬은 작은 돌다리로 이어져 있다. 이 두 섬 중 못 가와 이어진 섬에 봉황대가 세워져 있다. 물과 꽃나무, 그리고 수면에 비치는 그림자들이 어우러진 연화지의 경치는 입소문이 날 만큼 났다. 

▲ 봉황대가 있는 섬과 이어진 또 다른 섬에도 철쭉꽃이 한참 피어나고 있었다.
▲ 위의 섬에서 봉황대가 있는 섬과 이어지는 돌다리. 봉황교라는 이름이었다.
▲ 봉황대 쪽에서 바라본 이웃 섬과 호숫가 풍경. 연둣빛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 세 섬 중 가자 작은 섬은 따로 떨어져 있다. 섬 둘레에 철쭉이 무성하게 피어나고 있다.

김천8경의 으뜸 ‘연화지 벚꽃’, 지고 없어도 아름답다

 

2020년 10월 관광객 유치와 홍보를 위해 김천시는 시민과 관광객의 추천을 받아 여덟 곳의 관광 명소를 선정했다. 이른바 김천팔경이다. 8천5백 평(2만 9천372㎡)에 이르는 연화지 벚꽃을 으뜸으로 오봉저수지 둘레길, 난함산 일출·일몰, 사명대사 공원 평화의 탑 야경, 직지사 단풍나무길, 부항댐 출렁다리, 청암사 인현왕후길, 수도산 자작나무숲 등이 그것이다.

 

평일인데도 단체 나들이객들이 줄을 이었다. 최근 2주간에 걸쳐 연화지를 찾은 이들이 18만 명이 넘었다니 연화지 주변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덩달아 사진 촬영 명소가 된 인접 아파트 옥상도 개방되면서 벚꽃 철이 되면 전국에서 모여든 사진작가들로 북적이게 되었다고 한다. 벚꽃 야경은 김천시가 설치한 조명으로 환상적인 야경을 연출하기도 했단다.

 

벚꽃이 지고 난 뒤의 연화지도 괜찮다. 꽃이 지고 빨간 꽃대만 남은 가지에 푸른 잎이 듬성듬성 나는 벚나무도 꽃이 만개할 때만큼은 아니지만, 마음에 살갑게 다가오는 풍경으로 어우러진다. 작은 섬에 만발한 붉은 철쭉꽃, 벚나무 사이에 꽃을 떨구고 잎이 우거지고 있는 개나리의 푸른 빛도 산뜻하고 새롭다. 무엇보다도 연둣빛으로 아스라한 나무 그림자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연화지 인근에 있는 김산 향교는 1896년 3월 여영소, 여중룡 등이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이들에다 상주와 선산의 이기찬, 허위가 의병을 이끌고 합류하면서 김산 향교에서 김산 의진(義陣)을 결성한 것이다. 비록 금방 관군에 패퇴하고 말았지만, 이 을미의병은 임진왜란 이래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 의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 1896년 김산의병의 창의지였던 김산 향교의 강당인 명륜당.
▲ 김산 향교 명륜당 뒤편 뜰. 계단 위에 대성전의 내삼문, 오른쪽은 서재다.

김산 향교는 조선 태조 1년(1392) 처음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인조 12년(1634) 대성전과 명륜당을 다시 지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그 당시의 것이다. 제향 공간인 5칸의 대성전과 동무,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7칸의 명륜당,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 남아 있었다.

 

향교는 적요에 잠겨 있었는데, 서재에서 쉬던 여성 문화해설사와 잠깐 봉황대의 현판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초서라서 해득할 수 없었던 가운데 글자가 ‘루’ 또는 ‘서’로 읽는다는 것도 그에게서 들었다. 언제 조용할 때 다시 들르겠다고 하고 서둘러 나왔다.

 

문화해설사는 부근에 있는 김천예술고 근처에 그 학교 출신의 대중가수 김호중을 기념한 김호중 소리길을 들러보시라고 했다. 그러나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굳이 거길 들르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서둘러 직지사 근처에 있다는 시조 시인 정완영 선생을 기려 세운 백수문학관 쪽으로 다시 차를 몰았다. 

 

 

2023. 4. 12. 낮달

 

연화지 전경과 야경 사진은 <미디어인천신문>의 ‘[포토] 김천 연화지(鳶嘩池)’가 좋다. 링크를 따라가면 아래 사진의 대형 이미지를 볼 수 있다. https://www.mediaic.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46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