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칠곡군 가산면 송림사(松林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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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송림사를 찾은 건 이태 전인 2021년 10월이다. 칠곡에 있는 대학병원에 진료받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팔공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으니 자주 절 앞을 지나다녔지만, 정작 거기 제대로 들른 기억이 없다 싶어서였다. 처음 송림사에 들른 건 아마 고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송림사, 고교 때부터 찾은 절집
송림사가 있는 동명은 거기 산 적도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자주 들어본 이름이어서 익숙해진 고장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동명 아저씨’라고 부른 먼 친척이 우리 집에 한동안 머물렀었다. 조그만 아이에게 대나무로 물총을 만들어 줄 만큼 친절한 분이었는데, 그가 동명 사람이었다.
송림사에는 고등학교 때 소풍을 한번 왔었는데, 대구 시내에서 16번 버스를 타면 닿는 종점이어서, 마땅히 갈 데가 없는 무료한 날이면 벗들과 작당하여 송림사를 찾았었다. 근처를 어슬렁대다가 송림사 아래의 저수지에서 멱을 감기도 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일주문에는 ‘팔공산 송림사’라고 씌어 있지만,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가산(架山, 902m)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사찰이라고 돼 있다. 가산은 동명면 구덕리의 가산산성 아래 있는 산으로 동쪽으로 한티재와 연결되어 팔공산과 이어지니 가산 대신 팔공산이라 써도 됨 직하다.
평지 사찰 송림사, 신라 때 불사리 봉안하려 창건한 절
송림사는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인근 동화사(桐華寺)의 말사다. 544년(진흥왕 5)에 진나라에서 귀국한 명관이 중국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 창건하면서 호국안민을 위한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 뒤 1092년(선종 9)에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하였고, 1235년(고종 22)에 몽골의 침입 때 폐허가 되었다. 다시 중창하였으나 1597년(선조 30)에 왜병들의 방화로 불탔다. 1858년(철종 9) 영추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림사는 동명면 소재지에서 팔공산으로 가는 지방도 79호선을 타고 오다가 저수지에서 동쪽 계곡을 따라 2km 정도 오르면 해발 100m 정도의 가산 남쪽 허리 아래 터를 잡아 조성한 사역에 세운 평지 사찰이다. 깊은 산에 자리 잡은 절집들만 보다가 도로 옆에 바투 붙은 절집으로 들어서니 뭔가 하나 빠진 듯하여 새삼 낯설다.
일주문은 양쪽에 돌담을 거느리고 찻길 옆에 바투 붙었는데, 돌담에 쓰인 돌들이 예사롭지 않다. 자연석인데, 길쭉한 사각형으로 다듬은 돌은 마치 석재처럼 빈틈없이 짜였다. 일주문을 지나면 앞을 가로막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전각은 누각 형태의 무설전(無說殿)이고 오른쪽에 2층 누각 범종루가 날아갈 듯 서 있다.
현존 전탑 중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송림사 5층전탑
무설전 앞 오른쪽으로 비켜서 흙으로 구운 벽돌을 이용해 쌓아 올린 탑이 보물 송림사 오층전탑(16.1m)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화강암 1단으로 마련했고, 기단의 4면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은 모두 벽돌인데, 2층 이상의 몸돌은 높이가 거의 줄어들지 않아 전체적으로 높아 보인다. 그러나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이 넓은 편이어서 안정되고 편안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1959년에 해체하여 복원하면서 원형대로 모조한 금동으로 만든 머리 장식이 남아 있는데 모조품이긴 하나, 금동 상륜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탑은 9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며, 보수를 하면서 탑신의 몸돌 내부에서 나무로 만든 불상과 사리장치 등이 발견되어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로 일괄 보물로 지정되었다.
1층 탑신에서는 목불이, 2층 탑신에서는 녹색 유리잔과 그 안에 녹색 유리 사리병이 놓여 있는 금동 전각형 사리기가 발견되었다. 또 5층 옥개석 위 복발에서는 청자 상감원형합과 금동 원륜(圓輪) 두 개가 발견되었다.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시대의 다양한 유물들이 하나의 탑 안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보수가 여러 차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2층에서 발견된 거북 함 속의 금동 사리기와 유리 사리병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물로 사료의 가치가 크다.
조선 후기 불전으로 드문 앞면 5칸의 대웅전
오층전탑 너머 축대와 장대석 기단 위에 올라앉은 대웅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집으로 앞면 칸수 5칸은 현존하는 조선 후기 불전 가운데서 흔치 않은 사례라고 한다. 대웅전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건물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1597년(선조 30)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57년 중창하고 그 후 1755년과 1850년에 중수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사찰의 전각이 지속해 축소되는 경향이 이어지면서 앞면 3칸, 옆면 3칸 전각이 유형화되었다. 이러한 추세 속에 송림사 대웅전이 5칸 규모의 주불전을 재건한 것은 3칸 불전이 주류가 된 여느 절집과는 차별되는 가치로 인정된다고 한다.
조선조의 억불 정책으로 쇠퇴하던 불교 건축은 17세기부터 서서히 회생하여 17세기 후반에 맞배지붕의 다포 주불전 건물이 일반화되었다. 17세기 중엽에 중창한 송림사 대웅전이 이를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로 공포의 형식, 불단의 조각 수법 등은 당시의 건축 및 장엄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 석가삼존 좌상은 17세기 기념비적 작품
대웅전의 편액은 숙종의 글씨고 내부에는 보물로 지정된 향나무로 만든 목조 석가삼존 좌상이 있다. 수미단 위에 봉안된 이 삼존상은 석가여래와 문수·보현보살로 구성된 석가삼존 형식으로 본존불(277cm)의 높이가 3m에 육박하는 거대한 목조불상이다.
이 삼존상은 조선 후기 17세기를 대표할 만한 대작으로 석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등의 복장(腹藏)에서 발견된 발원문에서 정확한 조성연대와 발원자, 조각승을 알 수 있다. 삼존상 제작에는 17세기 전반에 활약했던 18명의 조각승이 참여하여 17세기 전반과 후반을 잇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이나 일제 강점기의 <한국사찰전서>에도 등장하지 않을 만큼 사세가 미약한 송림사에 이러한 불사가 있었던 사실은 뜻밖이다.
대웅전과 무설전 사이 오층전탑을 바라보며 좌우에서 마주 보고 있는 전각이 삼천불전과 명부전이다. 말 그대로 ‘삼천 부처’를 모신 삼천불전 안에는 보물 석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을 모시고 있다. 이 좌상은 경주지역에서 채석되는 연질의 석재인 ‘불석’(Zeolite, 沸石)으로 제작된 아미타여래와 관음·지장보살로 구성된 아미타삼존 형식의 불상이다.
전국에서 가장 큰 명부전, 송림사가 ‘지장 도량’으로 손꼽히는 이유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주불로 봉안한 법당으로 죽은 사람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곳이다. 송림사 명부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주심포 계, 홑처마에 맞배집으로 전국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명부전에는 천장(天藏)보살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로 지지(持地)보살과 지장(地藏)보살을 봉안하고 있으며, 이는 국내 유일의 조선 후기 석조삼장보살상(경북 문화재자료)으로 송림사가 우리나라 제일의 ‘지장 도량’으로 손꼽히는 이유다.
대웅전 뒤편 오른쪽에는 산신각과 응진전이, 왼쪽에는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 뒤쪽은 제2 부도전이 그 옆으로 선불장, 승방, 야외공양간, 수각 들이 늘어섰다. 굳이 들르지 않았지만, 이는 모두 송림사가 규모가 커지면서 이루어진 불사의 결과일 것이다.
처음 송림사를 들른 때의 기억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아도 예전과 달라진 게 무엇인지 눈에 보이는 이유는 그런 불사 덕분이다. 그런데 중창 불사로 새로 지었을 전각들이 생뚱맞지 않고, 경내의 경관을 해치지 않음은 점수를 줄 만했다.
송림사가 불사에도 ‘위화감’을 주지 않는 이유
규모가 예사롭지 않은 건물도 그게 위화감을 주지 않는 이유는 돌아와 사진을 살펴보면서 깨달았다. 그건 일차적으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꽉 짜인 틀 안에 오층전탑과 전각들이 정교하게 배치되지 않고 느슨한 구도를 유지하고 있어서인 듯했다.
대체로 절집의 대웅전 중심의 구도는 높다란 축대 위에 대웅전이 자리하고 그 아래 입구(口) 자 형태의 전각들과 탑이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평지 사찰 송림사는 대웅전만 그리 높지 않은 축대에 올렸을 뿐이고, 주변의 전각과 요사채 등이 널찍하게 자리 잡으면서 풍경 자체가 갇히기보다는 개방된 것처럼 시원한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대웅전 주변뿐 아니라, 송림사 경내에는 가지런하다고 할 수 없는 형태로 여기저기 단풍나무와 배롱나무가 심겨 있었다. 송림사 주변의 1500년 솔숲과 함께 그 나무들이 연출하는 풍경 속에 절집은 무심하면서도 살갑게 녹아 있었던 것이다.
사진만 찍고 서둘러 돌아섰지만, 이태나 지나 다시 가을 송림사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새삼 송림사가 아름다운 절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집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 명성이나, 소장 문화재에만 달렸겠는가. 절집을 구성하는 전각과 탑 들은 절집이 깃들인 땅의 숲과 나무 등 주변 풍경을 거스르지 않고 어우러져야만 비로소 승속(僧俗)의 경계를 넘어 그 아름다움을 기릴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2023. 8.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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