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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텃밭일기

[2023 텃밭 농사] ⑯고추 농사에 좌절한 얼치기 농부, 박으로 위로받다

by 낮달2018 2023.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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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라병으로 망가진 고추’, 그러나 올핸 ‘박’이 효자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우리 고추밭.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고 다닥다닥 붙은고추와 익어가는 고추가 좋아 보이지만, 기실은 칼라병의 습격을 받았다.

 

고추 농사는 올해까지다

 

지난번에 홍고추 첫 수확을 이야기했지만, 사실상 내용은 그리 개운한 게 아니다. 수확에 대한 기대가 10근에서 3근으로 짜부라든 것은 이런저런 정황을 고려한 셈속이었다. 26일에 이어 어제(70.31.) 다시 텃밭에 들러 익은 고추를 좀 땄다. [관련 글 : 첫 홍고추를 따다]

 

일단 곁에서 바라보면 밭의 고추는 장해 보인다. 검푸른 잎사귀에다 가지에 다닥다닥 붙은 고추가 실팍하고, 거기다 빨갛게 익은 놈은 풍기는 분위기는 가히 풍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작업 방석을 깔고 앉아 홍고추를 따면서 우리 내외는 이미 맥을 놓고 있었다.

▲ 우리가 따낸 고추. 보기에도 울긋불근하고, 몸통에 상처가 난 것도 적지 않다. 이들 중 성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플라스틱 그릇 두 개에 좀 모자란 듯 딴 고추는 얼핏 보면 괜찮아 보인다. 그러나 고추를 딸 때 다 익었다 싶어서 따고 보면 반대쪽은 아직 덜 익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얼룩덜룩하다. 이른바 ‘칼라병’이다. 칼라병은 총채벌레가 옮기는 토마토반점위조(TSWV) 바이러스로, 감염되면 고추 과실과 잎 표면에 얼룩덜룩한 자국이 생기는 병이다.

 

칼라병에는 현재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서 발병한 고추는 생육이 급격히 떨어져 과실 수확을 할 수 없는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고 한다. 육묘기에 초기방제가 중요하다는데 우린 그걸 놓친 걸까. 피해를 지켜보는 것 외에 마땅히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집에 가져와 다시 살펴보면서 아내는 성한 게 거의 없다고 맥을 놓았다. 누군들 기분이 상하지 않겠는가. 그래, 하는 수 없어. 올해로 고추 농사는 접고 더는 짓지 말자고 위로하는 게 고작이었다. 정말이다. 해마다 병충해로 골머리를 앓는 것은 같은 밭에서 너무 오래 고추를 연작(連作)한 탓일 터이다.

▲ 방울토마토는 많이 달리는데, 제대로 익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시장에 나오는 방토와 조금 다른 종인지도 모른다.
▲ 우리 토마토는 금방 굵어지는 것 같기는 한데, 익는 게 더딘 것처럼 느껴진다.
▲ 대파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 마늘을 캐어낸 밭에 멀칭 비닐을 그대로 둔 채 심은 콩이 자라고 있다. 콩잎을 따먹는 게 목표다. 비가 잦아 풀이 많다.
▲ 들깨도 잘 자라고 있다. 아직 잎이 성한 건 방제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병충해로 속을 썩이면서도 농사를 이어온 것은 그걸 이기고 튼튼하게 자란 고추가 주는 감동 때문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수확 초기에 병충해가 전체 판을 완전히 뒤엎어버린 것이다. 아내에게 되는 놈만 따서 말리고, 마음을 다치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렇게 진이 빠진 마음은 호박과 박 때문에 반은 풀렸다. 늙은 호박으로 키우자고 버려둔 놈은 누렇게 익어가고 있고, 열매 맺은 놈도 여럿인데, 어제는 애호박으로 두 덩이를 땄다. 아내는 밥 위에 쪄서 쌈으로 먹겠다고 호박잎도 한 움큼 땄다.

 

마늘 캔 자리에 심은 대파도 쑥쑥 잘 자라고 있고, 들깨와 지난번에 심은 콩도 예쁘게 새잎이 나기 시작했다. 빈 자리에 오늘은 쪽파를 심었다. 잦은 비로 성큼 자란 부추도 베었다. 방울토마토와 토마토도 소담스럽게 열렸으나, 뭔가 익는 것 같지가 않았다. 자라기는 잘 자라는데, 뭐가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박과 호박의 위로

▲ 묵은 밭가에 심은 호박은 담을 타고 올라가 호박을 맺었다. 올해는 호박이 효자 노릇을 한다.
▲ 박을 한 포기 심은 장독대 주변, 박의 덩굴과 잡초로 빽빽한데 줄기를 뒤져 호박을 찾는 것도 재미있다.
▲ 장독대 시멘트 위의 박. 이놈은 따지 않고 키워서 나중에 바가지를 만들어 볼까 한다.
▲ 박의 덤불을 뒤집어가며 찾아낸 호박. 이 중 3개는 땄다. 이 중 가장 작은 녀석도 마트에 가니까 7천원쯤 받고 있다고 했다.

장독대(경상도 말로는 ‘장꼬방’이라고 한다) 옆에 딱 한 포기 심은 박이 올해는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그간 박은 두 개를 따서 나물로 볶아 먹었었다. 박은 호박과 마찬가지로 잎에 덮여서 줄기를 뒤적여 열매를 확인하지 않으면 애호박이나 박나물로 먹을 시기를 놓치게 된다. 어제는 내가 일일이 줄기와 덤불을 뒤적여 세 덩이를 땄고, 아내는 나중에 바가지로 만들어 쓰자고 해서 한 덩이는 남겨두었다.

 

2017년에는 한동안 밭에 들르지 않았다가 가보니 박과 호박 덤불이 각각 담 옆에 선 감나무를 타고 올라간 적도 있었다. 사다리를 받치고 나무에 올라가 땄더니 박은 가지에 눌려 납작해져 있었다. 그때, 박 속을 긁어내고 말려서 바가지로 쓰려고 했지만, 제대로 말리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었다. [관련 글 : , 말아? 감나무 꼭대기의 호박]

 

박이나 호박은 논밭의 비탈진 자투리땅에 심어서 거두는 작물이다. 특히 박은 밭, 인가의 담이나 지붕에 올리어 재배했지만, 요즘은 지붕 위에서 익어가는 박이나 담에 올린 박은 구경하기 쉽지 않다. 박은 식용으로도 유용했고, 속을 파낸 껍질은 바가지로도 쓸모가 그만이었다. [관련 글 : 박과 바가지, 그리고 뒤웅박 이야기]

 

어쨌거나 박은 전근대의 시간에 민중과 가장 가까이 있는 작물이었다. 흥부전의 주요 소재와 배경으로 쓰였고, 바가지는 무속과 민간요법에서 상징적으로,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속담으로까지 쓰였다. 그러나 플라스틱이 등장하면서 박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 집에 가져온 박 세 덩이와 호박 두 덩이. 호박은 찌개와 부침개로 박은 나물로 만들어 먹을 것이다.

곤궁하던 시절엔 식용으로도 유용했던 박은 이제 박나물과 탕국 등의 별식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 집에서도 박나물을 즐겨 먹는다. 박속의 씨는 긁어내고 속살을 잘라내어 이를 홍고추와 마늘을 넣고 기름에다 볶아낸 박나물은 담백하면서 달착지근하다. 박 탕국은 어떤가. 딸애도 어릴 적부터 이를 즐겨 먹는 걸 보고 나는 미각도 유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관련 글 : 박과 박나물, 혹은 유전하는 미각]

 

 

2023. 8.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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