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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텃밭일기

[2017 텃밭 일기 5] 따, 말아? 감나무 꼭대기의 호박

by 낮달2018 2021.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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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꼭대기까지 오른 호박

▲ 지난주에 심은 배추 모종은 뿌리를 내렸고, 그 전주에 뿌린 쪽파도 싹이 올라왔다.

바람 온도가 심상찮다. 한여름이 고비를 넘겼다 싶었는데 어느덧 계절은 가을로 곧장 들어서 버린 것이다. 갈아엎은 묵은 텃밭에 쪽파를 심은 게 지난달 말이다. 그다음 주에는 쪽파 옆에다 배추 모종을 심고 무씨를 뿌렸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건 정한 이치지만, 얼치기 농부는 제가 한 파종도 미덥지 못하다. 심긴 심었는데 쪽파가 싹이 트기나 할까, 배추 모종 심은 건 죽지 않고 뿌리를 내릴까 하고 지레 걱정이 늘어진 것이다.

▲ 고추밭 가녘의 가지는 햇볕을 독점한 덕분에 실한 열매를 여럿 매달고 있다.
▲ 전깃줄에 앉은 제비들. 참 오랜만에 만나는 낯익은 풍경이다.

어제 아침 텃밭에 들러 우리 내외는 새삼 감격했다. 쪽파는 쪽파대로 듬성듬성 싹을 내밀었고, 뿌리를 내릴까 저어했던 배추도 늠름하게 자라 있었기 때문이다. 밭 귀퉁이 한구석에서 볕도 제대로 쬐지 못하던 가지는 쏟아지는 햇볕을 독점한 덕분인지 튼실해져 팔뚝만 한 열매를 여럿 매달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새 밭의 고추는 참담하다. 이제 탄저는 성한 푸른 열매에까지 번졌다. 말라 죽고 있는 고추 가운데 기적처럼 성한 몸을 지키고 있는 열매를 만날 때의 기분은 남다르다. 간단없는 병충해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제 몸을 건사한 놈은 사람으로 치면 효자 중에 상 효자인 셈이다.

새 밭 가녘을 어지럽게 덮고 있는 호박 덩굴을 차근차근 살펴보다 발견한 몇 개의 애호박을 따고는 아내는 흥감해 한다. 요즘 요만 한 호박도 2천 원이 넘는다우. 서울에선 5천 원까지 한다지, 아마. 단순히 몇 푼의 돈으로 환산할 수 없지만 우리는 우정 그런 셈속에 익숙하다.

 

지난번에 늙은 호박으로 기르자며 따지 않은 호박은 그새 물러서 썩어버렸다. 볕을 보라고 일부러 잎을 헤쳐 주었는데도 녀석은 제 몸을 건사하지 못한 것이다. 담장 위에 올라앉은 호박도 마찬가지다. 겉만 멀쩡하지, 밑 부분은 물러서 주저앉아 버렸다. 아쉽지만 하는 수가 없다.

▲ 감나무 가지 사이에 박 한 덩이가 끼어 있었다. 따 보니 사진처럼 박 한쪽 면이 찌그러져 있었다.

아내는 고추밭에서 성한 푸른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더 이상 방치했다간 성한 풋고추도 건지지 못한다고 여긴 것이다. 담장과 이어진 감나무를 살피던 아내가 나무 허리께 갈라진 가지를 가리켰다. 박 하나가 그 갈라진 가지에 박혀 있었다. 나는 담장에 올라 조심스럽게 그놈을 땄다. 오래 거기 박혀 있었는지 한쪽 면이 납작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돌아오려고 짐을 챙기다가 손차양(遮陽)을 하고 감나무를 기웃거리던 아내가 빙그레 웃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호박이 감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네!”

“어디, 어디?”

“저어기 있잖우. 꼭대기 아래. 어, 이쪽에도 또 한 개 있네.”

 

정말이었다. 따고 챙긴 호박 셋에 박 하나가 다가 아니었다. 감나무 가지와 잎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정말 꽤 묵직해 보이는 호박 두 개가 감나무 꼭대기 근처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호박순은 어느 틈엔가 감나무 가지로 뻗은 것이다. 어림잡아도 거긴 박처럼 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감나무 꼭대기에 걸린 호박

▲ 감나무 가지와 잎 사이로 꽤 묵직해 보이는 호박 두 개가 감나무 꼭대기 근처에 나란히 걸려 있다.

“올라가서 딸까?”

“아서요. 괜히 떨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냥 놔두자고? 더 굵어지면 무게를 못 이겨 떨어질 텐데?”

“그래도 하는 수 없지, 뭐. 챙겨 가는 거만으로도 우린 부자유.”

 

그렇다. 비닐봉지 두 개에 나누어 담은 풋고추와 가지 여섯 개, 호박과 박에 아내는 고춧잎도 훑어서 한 봉지를 땄다. 집에 돌아와서야 새 밭의 어린 감나무 아래 심었던 고구마 캔 것, 대여섯 개를 챙기지 못하고 온 것을 알았다.

▲ 아직 제대로 익지 않은 박인데, 바가지가 되기는 할까. 베란다에서 말리고 있는 바가지.

오늘 점심때 아내는 식탁에 박나물을 내놓았다. 나는 박나물을 즐기지 않지만, 아내는 그 독특한 풍미를 즐긴다. 속을 알뜰하게 긁어낸 박을 아내는 베란다에 내놓았다. 아직 덜 여문 것 같긴 하지만, 마르면 바가지로 써도 된다며.

 

“그늘에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몰라요. 일단 말려보지 뭐. 되면 좋고 안 되면 하는 수 없는 거고…….”

 

다음 주중에 들르면 새 밭의 고추도 뽑을 참이다. 한가위 전에 고구마를 캐면 올 전반기 농사는 일단 마무리다. 지금 자라고 있는 배추와 무는 말하자면 후반기 농사인 셈이다. 벌써 배춧잎에 벌레가 꾄다며 아내는 혀를 차지만 그 역시 이겨낼 놈은 이기고 질 놈은 질 수밖에 더하겠는가.

 

 

2017. 9.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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