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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 종사의 ‘소신공양’, ‘생명의 강’ 되살릴까

by 낮달2018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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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4대강 반대 주장하며 소신공양한 문수(1963~2010) 스님 13주기 추모식

▲ 5월 31일 11시 지보사 앞 문수 스님 승탑 앞에서 스님의 13주기추모식이 베풀어졌다.

지난 5월 31일 11시부터 경북 군위군 군위읍 상곡리 지보사 입구 문수 스님(1963~2010) 승탑(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 앞에서 환경운동단체와 15명의 추모객이 뜻을 모은 스님의 소신공양(燒身供養) 13주기 추모식이 간소하게 베풀어졌다. 문수(文殊) 스님은 2010년 5월 31일 오후 3시에 낙동강의 지천인 위천 둑에서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 폐기하라’는 등의 뜻을 남기고 소신공양을 결행하여 입적했다. 세납 49세, 법랍 25년. [관련 기사 : “4대강 중단하라” 조계종 스님 분신 사망

 

당시 나는 4대강 사업에 반대하며 관련 집회 등에 기웃거리고 있었지만, 승려가 같은 뜻을 표명하고 분신하였다는 사실을 좀처럼 실감할 수 없었다. 불교계에서도 환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자기 몸을 불살라 주장을 표명할 만큼 격렬하고 절박한 것이었다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대강에서 죽어가는 만 생명을 살리기 위한 원력이므로 소신공양이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은 제 몸을 불살라 부처에게 바치는 것이다. <법화경(法華經)>엔 약왕보살이 향유를 몸에 바르고 자기 몸을 불사른 것이 ‘참된 공양’이고 ‘정진’이며 ‘높은 보시(布施)’라고 칭송한다. 고승들이 소신공양을 실행한 사례도 드물지 않아, 1960년대 베트남에선 전쟁 중에 정부가 비판적이란 이유로 불교를 탄압하자 승려 36명이 사이공 거리에서 잇따라 분신하기도 했다.

 

김동리의 단편소설 ‘등신불(等身佛)’에서 등신불은 소신공양으로 마침내 성불한 만적 스님의 타다 굳어진 몸에 그대로 금물을 입힌 특유한 내력의 불상이다. 소설은 이 등신불을 소재로 “소신공양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의식을 통해서 어머니라는 인간과, 모성에 대한 도덕적인 악을 대행하여 죽는 한 인간의 승화된 고뇌와 비원을 형상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했다.

 

살생을 물론이거니와 자살을 금지하는 종교인 불교에서 소신공양을 찬양하고 있긴 하지만, <법화경>의 문언은 자신을 희생하는 정신을 가리킨 것일 뿐, 실제로 자기 몸을 태우는 분신자살로 보지는 않는다. 자기 몸을 불사르는 극단의 희생으로 얻으려는 것은 깨달음이니, 소신공양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치열한 구도의 정신이라는 얘기다.

▲ 지보사 앞에 세워진 문수 스님의 승탑 앞에 꽃과 차를 드렸다.

문수 스님은 군위읍 사직리 위천 잠수교 앞 하천 둔치에서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 폐기하라,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해 목숨을 끊었다.

 

당시에 그의 분신은 불교계에도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소속 교단인 조계종은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의장 퇴휴 스님과 불교환경연대 집행위원장 현각 스님을 현장으로 급파했다. 문수 스님은 1998년 중앙승가대 학생회장을 지내는 등 상당한 사회의식을 갖고 사회와 불교의 개혁을 주장했던 인물이었으나 4대강 반대 운동에 표면적으로 나선 적은  없었다고 한다.

 

2010년 6월 4일 10시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 교구장으로 스님의 다비식이 치러졌다. 어쨌든 불교계에선 그의 분신을 “4대강에서 죽어가는 만 생명을 살리기 위한 원력으로 소신”한 바, 소신공양으로 보고, 종단 차원에서 장례를 치른 것이었다.

 

13주기 추모식 소식은 대구의 벗 박으로부터 들었다. 그가 이번 추모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하면서 거기서 만나 밥이라도 먹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러잖아도 5월 말께 얼굴이나 보자고 하던 참이어서 망설이지 않고 군위로 갔다. 목숨을 살라 원력을 내보인 한 승려의 넋을 기리면서 벗들도 만나니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선방산 기슭의 옛 가람 군위 지보사(持寶寺)는 의상이 창건한 절이다. ‘보물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보사(持寶寺)라 했는데, 보물은 아무리 갈아도 닳지 않는 맷돌, 사람 열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가마솥, 단청의 물감으로 사용되는 오색의 흙(이 대신 청동 향로를 치기도 한다.) 등, 세 가지다. 그러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통일 신라 시대 때 축조된 3층 석탑(보물)과 삼존불만 남아 있다. [관련 글 : 군위 선방산 기슭의 옛 가람, 지보사(持寶寺)]

▲ 승탑 옆에 세운 무경당 문사종사 비

주차장 오른쪽 구석에 석종형 승탑과 빗돌 하나가 있었는데 문수 스님의 승탑은 그 왼편에 세워져 있었다. 화강암 재질의 승탑은 기단 위에 1.5m 높이의 석종형이다. 그 오른쪽에는 스님의 행장과 유서 내용을 담은 높이 2m의 비석이다. 추모식에서 나는 무심히 여겼던 문수의 삶과 죽음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수행으로 살아온 학승, 4대강을 막아야 한다는 원력으로 자신을 불사르다

 

문수는 1986년 시현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사미계( 출가는 하였지만 아직 스님이 되지 않은 남자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열가지 계율)와 구족계(만 20세가 되면 이 계를 받아 비구가 됨)를 받았고, 2006∼2007년 경북 청도 대산사 주지를 역임했다.

 

살아생전의 마지막 날들을 지보사 선방에서 보낸 그는 3년 가까이 선방에서 나오지 않고 수행했다. 사흘에 한 번 총무 스님이 방에 신문을 넣었다. 신자들도 문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의 수행은 엄격했다. 하루 한 끼만 먹었는데 그것도 떡 한쪽이 전부였다.

 

승가대 동기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학문 수양과 내실을 꾀하는 데 몰두했던 학생회장이었다. 그는 동기 가운데 두 번째로 출가가 빠른 사람이었고, 입학 전에도 수행에 정진하는 승려로 유명했다. 그가 굳이 대학을 찾은 이유는 승가대 도서관이 크고 좋아서 경전이나 부처님 말씀에 관련된 것을 마음대로 볼 수 있어서였다고 한다. 도반들은 그가 도서관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과묵했지만 그는 행동이 필요할 땐 망설이지 않았다. 조계종의 종단 개혁 때 범 종단 개혁추진위원회 활동을 하기도 했다. 수행에 전념하기 위해 지보사를 찾은 2007년 이후, 그는 수행에 정진하면서도 ‘4대강 사업’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걱정했다. 지보사의 승려들과 대화하면서 누군가 나서 4대강 사업을 막아야 하는 건 아닌지 묻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13년 전 오늘, 자신의 믿음과 원력(願力)에 따라 그는 자기 생명을 내던졌다.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작은 상처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아파하는 게 인간이다. 더구나 자신의 생명을 불사르며 내던지는 일은 아무도 함부로 흉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실행해 산화했다. 그가 결행한 죽음의 선택을 삿된 인간의 잣대로 평가할 일은 아니지만, ‘소신공양’으로 기릴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 문수스님이 소신한 자리 근처에 2020년 불교환경연대가 세운 표지석.
▲ 문수 스님의 표지석 근처에 흐르고 있는 위천. 멀리 보이는 다리가 못골교다.

반복되는 역사, 언제 4대강은 생명의 강으로 되살아날까

 

지보사에서 추모식을 마친 우리는 위천으로 이동하여 불교환경연대에서 2020년에 세운 스님의 표지석 앞에서 다시 한번 차 한 잔을 올렸다. 스님이 소신한 위천 주변에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못골교 아래로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문수가 가고 13년이 지났지만, 역사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 복원의 기미가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 현 정부 들면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게 강과 생명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이해 득실에 따라 4대강 사업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사회, 우리 정치의 민낯이다. 한 토건업자 출신의 권력자가 개발 논리로 망가뜨린 4대강이 생명의 강으로 되살아날 날은 언제쯤일까.

 

 

2023. 6.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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