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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고서 몇 권 …, 거기 남은 선친의 자취

by 낮달2018 2023.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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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본과 필사본 고서 몇 권, 그리고 아버지

▲ 집안에 전해져 온 고서는 통풍을 고려하여 베란다 창가의 서가 맨 위 칸에 꽂아두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책은 상하지 않았다.

베란다에 둔 내 서가의 맨 위 칸에 꽂아 놓은 묵은 ‘고서(古書)’을 꺼냈다. 1990년대 중반, 시골집을 팔고 어머니를 모셔 오면서 함께 꾸려온, 집안에 전해져 온 옛 책들이다. 가져와서 얼마나 오래된 책인가 싶어 한 번 훑어보고서 나는 얌전히 그걸 손이 닿지 않는 맨 위 칸에 들여놓아 버렸었다.

 

집안에 전해 온 고서 몇 권을 꺼내보다

 

고서엔 문외한이지만, 책들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었고, 이른바 ‘희귀본’일 가능성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사할 때마다 따로 묶어서 옮겨왔지만, 뒤적여 볼 일이 없을뿐더러 책의 키가 커서 제일 높은 칸에 ‘짱박아 놓은’ 것이었다. 창문에 가까운 쪽을 선택한 것은 혹시 습기 차 상할까 저어해서였다.

 

20년도 넘게 흘렀는데, 새삼 그걸 꺼낸 본 것은 거기 선친이 거칠게 엮어놓은 필사본을 살펴보고 싶어서다. 선친은 어릴 적 서당에서 글을 읽었으나 그 기간이 얼마쯤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16살에 혼인하고 19살쯤에 일본으로 가셨다니 “재주도 있고, 글씨도 잘 썼다”라는 어머니의 전언에도 불구하고 선친의 공부가 그리 길었을 거로 보이지는 않는다.

 

안동에 살 때는 이른바 ‘거풍(擧風 : 쌓아 두었거나 바람이 안 통하는 곳에 두었던 물건을 바람에 쐼)’을 시킨다고 햇볕 드는 베란다에 꺼내 놓기도 하였으나, 이곳으로 온 뒤에는 아주 잊고 지냈었다. 엔간한 한자는 읽는 데 지장이 없지만, 한자를 아는 것과 한문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선친의 필적. 어머니는 당신께서 재주가 있고 글씨를 잘 썼다고 일러 주시곤했다. 왼쪽은 '추풍감별곡', 오른쪽은 '제문'이다.

서가의 고서를 꺼내 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선친의 필적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걸 한 편의 글로 갈무리하고 싶어서다. 살아생전에 여러 차례 아버지께서 세필 붓으로 지방이나 축문을 쓰는 걸 지켜보면서 가느다란 붓으로 그렇게 복잡한 획의 한자를 그려내는 솜씨를 경탄하곤 했다. 글쎄, 선친의 필적을 전문가들은 어떻게 평가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아버지의 필적을 볼 때마다 느꺼운 마음을 금하지 못한다. [관련 글 : ‘아비의 아들’에서 다시 ‘아들의 아비’로]

 

목판 인쇄본 7종 20권, 필사본이 4종 4권

 

서가에서 꺼낸 책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목판 인쇄본으로 보이는 책이 7종 20권, 필사본이 4종 4권이다. <통감> 같은 책이야 이미 잘 알려진 바 있지만, 개인 문집이나, 현대에 들어 간행된 책은 인터넷에서도 관련 정보를 찾기 어려웠다. 확인한 고서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한다.

▲ 송나라 사마광이 편찬한 중국 통사 <자치통감>(왼쪽)과 통감의 속편인 역사서 <속 통감>.

<통감(通鑑)>은 중국 송나라의 사마광이 편찬한 편년체 중국 통사(通史)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줄여서 부르는 책이다. 1436년(세종 18)에 윤회, 권제 등이 교정하고 주석을 붙여 간행한 것으로, 총 294권 중 236권~238권에 해당한다. 집에는 11·13·14·15권 등 4권만 있다. 나머지 권들은 어떻게 됐는지, 언제쯤 인쇄된 책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리 오래된 책은 아닌 듯하다.

 

<속 통감(續通鑑)>은 말 그대로 <통감>의 속편인 편년체 역사서. 북송이 개국한 960년부터 명나라가 건국하는 해인 1368년까지 409년간의 역사를 220권 235만 자로 다루었다. 청나라의 필원이 당대 학자들과 함께 편찬한 책인데, 북송의 역사를 다룬 <속 자치통감장편(長篇)>과는 다른 책이다. 송기(宋紀) 5권, 원기(元紀) 1권, 대명기(大明紀) 2권 등 모두 8권이다.

▲ 집안 선대 학자들의 개인 문집. 중앙의 <만회당선생 문집>과 조선 후기에 나온 <소산집>(왼쪽)과 <창주문집>(오른쪽)

집안의 선대 학자들 문집들

 

나머지 인쇄본은 모두 우리 인동장문(仁同張門)의 선대 학자들의 개인 문집이다. <극명당선생실기목록(克明堂先生實紀目錄)>은 조선 중기의 유생 극명당 장내범(張乃範, 1563~1640)이 남긴 시와 서, 묘갈, 제문 등을 기록한 책이다. 극명당은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예학(禮學)에 밝았다.

 

임진왜란 때 김해(1555~1593)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만년에 반계(磻溪:석적읍 반계리)에 은거하며 스스로 호를 반계거사라 했다. <양생금단계(養生金丹契)>, <가례의절(家禮儀節)>과 <실기(實記)> 2권 등을 남겼고, 옥계사(玉溪祠:인동에 있는 장안세의 사당)에 제향(祭享)되었다.[관련 기록 바로가기]

 

<만회당선생문집(晩悔堂先生文集)>을 남긴 만회당 장경우(張慶遇, 1581∼1656)는 극명당의 아들로 여헌 장현광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자 영남 유생들과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고, 이이첨이 권세를 잡고 국정을 어지럽히자 그를 참수하라는 소를 올렸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의병장이 되어 출정하였으나 강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스승 장현광의 문집인 <여헌문집(旅軒文集)>을 간행하고 후진 교육에 힘썼다. <만회당집(晩悔堂集)>에 ‘법천설(法天說)’, ‘선악적서(善惡籍序)’ 등 철학적으로 중요한 글이 포함되어 있으며 동락서원에 배향되었다.[관련 기록 바로가기

 

<소산집(素山集)>의 내용은 <소산유고(素山遺稿)>다. 조선 후기부터 개항기까지 살았던 학자 소산 장인목(1842~1895)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10년에 간행한 4권 2책 목판본 시문집이다. 이 책이 고서 가운데, 가장 확실하게 발간연대가 밝혀진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록 바로가기

 

<창주문집(蒼州文集)>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장시택(張時澤, 1833~1900)의 필사본 문집이라는 사실만이 ‘한국역대문집 데이터베이스(DB)’에 남아 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집에 있는 책은 인쇄본이니 뒷날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관련 기록 바로가기

▲ <아송>(왼쪽)은 정조가 간행한 시선집, 중앙은 <극명당선생실기목록>, <부문의리일관유몽상식단>(오른쪽)은 금용락이 쓴 책이다.

<부문의리일관유몽상식단(扶文醫理一貫幼蒙常識單)>은 내용을 파악하는 데 꽤 힘이 들었다. 전북 부안의 역사 교사 정 선생의 도움을 받아 확인한 건 이 책이 경북 북부의 봉화 금씨 소산(紹山) 금용락이 편찬한 책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부문(扶文)’, ‘의리일관(醫理一貫)’, ‘유몽상식단(幼蒙常識單)’ 등 세 편을 합본해 1975년에 펴낸 것이다.

 

대체로 살펴보면 부문은 한문 공부를 돕고, 의리일관은 의학의 원리를, 유몽상식단은 유학에 관한 초보적 상식 등을 짧은 한글 현토본(懸吐本 : 중간중간에 한글 토를 달아 문맥을 더 쉽게 한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인터넷 검색에서 연세대 언더우드 기념도서관에 ‘부문록(扶文錄)’을 표제로 한 책의 부록으로 ‘의리일관’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친의 필적이 남은 필사본들

 

나머지는 필사본인데, 모두가 아버지께서 직접 필사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아송(雅訟)>은 조선 후기 제22대 왕 정조가 <주자대전>에서 시와 운문 415수를 선별하여 1799년에 간행한 시선집이다. 건곤(乾坤) 두 권 중 ‘곤’권만이 있는데, 이 책을 나는 아버지께서 벼루와 함께 보관하다 제삿날에 지방이나 축문을 쓰는 한지를 넣어두는 용도로 쓰셨던 걸 기억한다.

▲ 선친이 아니라, 조부나 그 윗대 선조께서 쓴 거로 보이는 한문 필사본 <구운몽>. 책(왼쪽)과 내지

<구운몽(九雲夢)>은 김만중의 소설로 국문본과 한문본 등 숱한 이본이 전하는 고전소설이다. 집에 있는 한문 필사본 <구운몽>은 아버지의 필적은 아닌 듯하다. 아마 조부나, 증조부, 또는 고조부의 필적이거나, 아니면 누군가 다른 이가 필사한 책인지도 모른다. 장정의 상태나 두꺼운 표지에 온갖 한자가 겹쳐 쓰인 것을 보아, 꽤 묵은 책임은 틀림없다.

 

나머지 두 책 <제문(祭文)·오효원시(吳孝媛詩)·회심곡(回心曲)·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과 <제문요초(祭文要抄)>는 선친이 직접 쓰고 엮은 책이다. <제문(祭文)…>은 나일론 끈으로 묶었고, 한번 쓴 한지를 배접하여 표지를 만들었다. 아버지 솜씨임이 분명한 것은 아버지께서 그렇게 책을 묶는 것은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배접(褙接):종이·헝겊 또는 얇은 널조각 따위를 여러 겹 포개서 붙이는 일.

▲ 선친이 직접 엮은 책. 왼쪽이 <제문, 오효원시, 회심곡, 추풍감별곡>이고, 오른쪽은 <제문요초>다.

맨 앞에 한문 제문을 기록하고, 그다음 오효원의 한시다. 소파(小坡) 오효원(吳孝媛 1889~ ?)은 일제강점기 신명, 숭신, 공옥 등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교육자이자 문인이다. 의성 사람으로 9세부터 남자의 복장을 하고 글방에 다녔으며 얼마 되지 않아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선친이 몸소 엮은 필사본 두 권

  

1898년(광무 2)에는 의성과 이웃 두 군에서 시행하는 백일장에서 일등을 차지했다. 부친이 공금 관련 비리로 수감되자, 홀로 상경하여 판서 등에게 읍소 신원하여 아버지를 구했다. 시로 이름이 알려져 일본에 가서 머물며 학교 건립 기금을 모아 돌아왔고, 여러 여학교에서 가르쳤다. 1929년에 그의 청으로 그의 부친이 시를 모아 <소파여사시집(小坡女士詩集)>을 발간했다. [관련 기록 바로가기

 

▲ 오효원의 시집 <소파여사시집>(1929)

나도 처음 알게 된 인물인데, 당신께서 어떻게 그를 알았을까. 아마 의성 사람이고, 시로 유명한 여성이어서 그의 한시를 손수 필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책에 오효원 한시는 몇 편 되지 않는다. 뒤에 다산 정약용의 ‘진주의기사기(晉州義妓祠記)’와 ‘한글 제문’, 그리고 ‘회심곡’, ‘추풍감별곡’ 등을 한글로 필사해 놓았다.

 

‘회심곡’은 불교 음악의 한 곡조로 불교의 대중적인 포교를 위해 알아듣기 쉬운 한글 사설을 민요 선율에 얹어 부르는 것이다. ‘추풍감별곡’은 서도소리의 한 종류인 송서(誦書:글을 소리 내어 읽음)의 하나로 곡조보다는 사설 내용에 치중하여 부르는 노래이다.

 

뒤에는 사돈지(査頓紙:혼인할 신부의 부모, 특히 어머니가 신랑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한글 제문, 한글 한자 혼용 제문 등이 실렸다. 이웃의 부탁으로 평생 수백 편의 한글 제문을 지으신 어머니의 필적보다 아버지의 그것이 훨씬 정돈되어 있다. ‘아래 아’도 어머니보다 훨씬 덜 썼는데 균형 잡힌 세로쓰기 글씨는 한문을 쓰시면서 익힌 듯하다.

 

마지막 필사본 <제문요초(祭文要抄)>는 14장짜리 얄팍한 책자다. 역시 표지는 다른 글씨를 쓴 종이를 배접했다. 속 표지에 ‘壬申(임신) 九月(구월) 初(초) 九日(구일)’이라 적혀 있는데, 아버지 살아생전에 임신년은 1932년뿐인데, 그때 아버지는 16세 소년이었을 터,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가끔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아버지의 모습

 

‘요초(要抄)’란 말 그대로 ‘필요한 걸 베끼다’라는 뜻이니 누군가가 엮은 것을 필사한 것이라기보다 당신께서 손수 엮은 책자로 보인다. 필요한 게 있으면 그걸 자신에 맞게 갈무리하는 것은 나도 아버지를 닮았나 보다. 지금은 어디 처박혀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필요한 속담이나 사자성어 사전 같은 걸 직접 만들어 썼고, 고전소설 원문을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인쇄하여 국판의 책으로 엮어 써곤 했었다.

 

스무 살 전에 아버지는 일본에 건너가서 쇠뼈 등으로 젓가락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기술자가 되었고, 해방 전에 귀국해 평양의 같은 공장에 초빙되어 일하기도 하셨다. 해방 이후, 인근 약목면에서 나무젓가락 공장을 운영하다 화재를 잃고 나서 한동안 아버지는 목수 일도 하셨다. [관련 글 : 목수 아버지의 추억

 

한동안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정미소였다. 발동기를 돌려 방아를 찧는 이른바 ‘택택이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살림이 윤택해졌는데 내가 태어난 게 그 무렵이었던 듯하다. 어릴 때 내가 배를 곯지 않고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당신께서 돌아가신 뒤에 방앗간은 맏형님으로 이어졌고, 형님마저 떠난 뒤에는 형수를 도와 내가 방앗간을 돌렸다. [관련 글 : ‘택택이 방앗간’의 추억

▲ 전북 진안군 마령면에 있는 공동체 박물관 계남 정미소. 문 닫은 정미소를 박물관으로 꾸몄다.

나는 가끔 전북 진안군 마령면에 있다는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곤 한다. 그거로 지금은 사라져버린 아버지의 포남정미소를 아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어서다. 이제 고향에 방앗간은 하나나 제대로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방앗간의 추억으로 아버지의 만년과 당신의 삶을 생각하곤 한다.

 

 

2023. 5.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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