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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교사의 ‘격려’와 ‘질책’ 사이

by 낮달2018 2020.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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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격려’와 ‘질책’은 어떻게 학생에게 다가가는가

▲ 아이들과 함께 만든 문집. 제호는 <춘향가>에서 집자한 것이다 .

두어 주일 전에 옛 제자가 안부를 전해 왔다. 인근에 사는 이 군인데 날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제 선배 정 군과 함께 들르겠단다. 정 군은 제자는 아니고, 이 군이 졸업 후 활동했던 지역 풍물 놀이패의 일원이었다. 빗속에 두 친구가 왔다. 나는 이 친구들을 삼겹살을 잘하는 동네 음식점으로 데려갔다.

 

3년, 혹은 20년 만의 해후

 

두어 해만인데도 이 군은 꽤 변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꽤 나이 들어 보이는 데다 고개를 숙이는데 정수리가 훤하다. 동행한 정군도 머리숱은 괜찮은데 역시 정수리 쪽이 듬성듬성하다. 마흔넷과 마흔여섯. 그럴 나이지만, 이 사람들이 벌써 머리가 이리 빠져서 어떡하노, 나는 농을 걸었다.

 

“오랜만이야. 잘 왔어. 잘 지냈지?”
“선생님. 죄송합니다. 자주 연락도 못 드리고…….”
“선생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복직하시고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그새 20년이 흘렀단 말이지……. 반갑네.”

 

이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던 지난 세월을 나는 잠깐 떠올려 보았다. 1988년에 고향 인근의 남학교로 옮긴 뒤, 두 해를 채우지 못하고 나는 타의로 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5년. 힘든 시절이었지만, 이들 제자의 지지와 도움이 큰 힘이 되었다. 해마다 집을 옮겨야 했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이 달려와 수월하게 이사를 거들어주곤 했다.

 

1994년 봄 복직하면서 나는 경북 북부의 낯선 땅으로 옮겨갔다. 그러고 나서 흐른 세월이 어느덧 스무 해가 넘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우리 아이들이 각각 서른을 넘겼고, 까까머리였던 열여덟 살의 머슴애들도 가장이 되고 아비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두 친구의 정수리에 내린 세월과 내 그것은 동질적이다.

 

이 군은 그때, 예의 남학교에서 만난 친구다. 첫 임지였던 여학교에서 4년을 근무하고 남학교에 오니 적응이 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매우 메말라 있다고 생각한 나는 내가 맡았던 2학년 아이들을 중심으로 문예 동아리를 꾸렸다.

 

대도시 인근의 소읍인데, 아이들은 문화적 갈증 같은 걸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자기표현에 대한 열망은 있으나 그걸 드러낼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한 아이들 여남은 명이 긴가민가하면서 모였다. 따로 지도 프로그램이 있는 건 아니어서 어울려 책을 읽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면서 글쓰기를 지도했다.

 

아쉬우나마 써 둔 글을 모아 가을에는 시화전을 열었다. 학교 안이 아니라 읍내의 신협 전시장을 빌린 전시회는 반향이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찍이 지역에선 유례가 없는 행사인데다가 아이들 작품을 모아 묶은 문집도 꽤 인기가 있었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등 잔뜩 고무된 것은 물론이다. 아이들은 눈동냥, 귀동냥으로 문학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이해하게 되면서 스스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이들과 나눈 믿음과 그걸 바탕으로 이루어진 사제관계는 이듬해 내가 학교를 떠난 이후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군도 그 원년 구성원 가운데 하나였다. 단순하고 선량한 아이였고, 쓸데없는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쓴 글이 돋보여 그걸 칭찬해 주었다. 이듬해 아이들은 3학년으로 진급하고 나는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 첫 시화전의 팸플릿 . 아이들은 이 전시회의 성공에 매우 고무되었었다 .

뒤늦게 확인한 일이지만, 내 지도를 받았다는 이유로 동아리의 아이들은 적지 않은 불이익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저마다 대학으로 사회로 나아갔다. 대부분 대학에 진학하는 편이었는데 이 군은 곧장 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나는 그게 그답다고 생각했다.

 

‘문예 동아리’ 활동, 격려와 질책 사이

 

아마 그는 좋이 20여 년을 자동차 정비 일을 했을 것이다. 대구 등지에서 가게를 열고 있을 때 나는 가끔 그의 가게에 들러 엔진오일을 갈곤 했다. 그러던 그가 가게는 세를 주고 황토 집짓기를 배우겠다고 했을 때도 나는 그의 선택을 지지했다. 그에게는 그런 일이 어울릴 듯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태가 지난 오늘, 이 군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음식점에서 고기를 구워놓고 소주를 마셨는데 두 친구는 부어주는 대로 연신 술잔을 비워냈다. 이 사람들아, 좀 천천히 마시게나. 누가 쫓아오는가. 했더니 친구는 예전에 선생님께서도 이렇게 마셨습니다, 고 한다. 그랬는가, 하고 나는 웃는 수밖에 없었다.

 

이 군은 한동안 황토집 짓는 일을 하다가 지금은 김천 쪽에 땅을 사 농사를 짓고 있고, 정군은 여전히 아이티(IT) 계통의 기술자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황토 집짓기를 접은 이유를 묻자, 이 군은 그걸 생업으로 삼기에는 힘든 일이라고만 했다.

 

술을 마시면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따로 헤아리지는 못한다. 25년 전의 저들 학창 시절 얘기부터 내 해직 시절, 두 친구가 활동했던 지역의 풍물 모임, 그 시절의 친구들과 교사들 이야기까지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랐다가 내려오기를 거듭했다.

 

25년 전의 동아리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다. 아이들의 글을 읽고 평을 겸해 아이들에게 질책과 격려를 하던 때를 떠올리면서 넌지시 물었다. 내가 자네 글을 읽고 했던 이야기 기억나는가? 아마 네겐 정직하게 썼다고 칭찬했던 것 같은데……. 이 군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기억하고 말고요……. 그 말씀 때문에 저는 열심히 책을 읽게 되었었지요.”
“무슨 뜻인가?”

 

내 격려가 그가 늘 책을 가까이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책을 읽는 것으로 이 군은 자신을 갈무리했고, 그 책 읽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나는 단박에 그가 말하는 게 무슨 뜻인가를 눈치챘다.

 

“정말 꾸준히 책을 읽었습니다. 덕분에 서점에 단골손님이 되기도 했지요.”
“그랬던가. 나는 몰랐네. 장하구먼, 고마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진부한 글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술기운에도 나는 잠깐 등허리가 선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교사의 격려 하나가 소년의 삶에 단단한 지표 하나를 새긴 셈이었다고 할까. 나는 정말 고마워서 몇 번이나 ‘그래, 그랬구나’를 되풀이했다.

 

나는 그의 독서 편력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다. 그러나 사춘기 시절 한 교사의 격려로 시작된 그의 책 읽기가 한 청년의 성장에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으리라는 걸 추측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가 겪었을 적지 않은 방황과 좌절의 시간을 넘는 데 그 책 읽기는 얼마만큼 힘이 되었을까.

 

나는 그를 격려했던 것보다 훨씬 무겁게 꾸짖었던 그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글쓰기의 경험이 있어 꽤 그럴듯한 글을 쓰긴 하지만 구체성이 빠진 다소 관념적인 글쓰기를 하는 두 녀석을 좀 심하게 나무랐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충격을 줌으로써 몸에 밴 버릇을 버릴 수 있기를 바랐지만 이 군의 술회를 들으면서 그건 내 희망 사항일 뿐이었을 것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한 군과 박 군을 나무란 거 기억나지? 난 걔들이 내 질책을 충격으로 받아들이라고 그랬지……. 그런데 그건 내 희망 사항이었을 뿐이었어. 걔들은 아마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르겠네…….”

 

이 군은 또 저희가 동아리 활동을 하던 그 시절의 어느 날을 회고했다. 나는 정작 기억에 하나도 없는데 어느 날 내가 저희를 수도원으로 데려갔다고 했다. 천주교 수도원은 관계자가 아니면 쉽게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다. 내가 처음이었듯 그도 거기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저는 정말 난생처음 거기에 들어갔거든요. 거기서 보낸 시간은 오래 잊지 못했습니다.”

 

이 군은 수도원이라는 낯설고 이국적인 공간이 준 충격을 이야기했다. 모르긴 해도 그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내가 처음 기차를 타기 위해 역사의 플랫폼에 들어섰을 때 느꼈던 충격이나 이질감과 비슷한 어떤 감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 내가 우리 교육의 속살을 제대로 배운 학교. 아이들이 내 스승이었던 곳이다.
▲ 학교 건너편에 있는 가톨릭 수도원. 여기서 열린 징계위원회에서 나는 해임되었다. ⓒ 칠곡군청

이들을 만났을 때 나는 서른셋, 혈기 방장한 초짜 교사였다. 열여덟 사내아이들과 함께했던 그 일 년 반 동안 나는 우리 교육의 속살을 온전하게 겪으면서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교육운동에 뛰어들었고 그로 말미암아 마침내 학교를 떠나야 했다. 일찍이 나는 그때 나를 가르친 것은 ‘체벌의 진실’을 가르쳐 준 ‘열등반’ 아이들이었다는 걸 고백한 바 있다. [관련 글 : 문제아는 발길질과 따귀로…내가 왜 이러지?]

 

수도원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나는 지난 5월, 수도원의 초청을 받았고, 거기서 재단 이사장인 현직 아빠스로부터 1989년의 징계 건에 대한 사과를 받았다고 말해 주었다. 천주교 신자인 정군은 뜻밖이지만 잘된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직 후 ‘거리의 교사’로 살던 시절을 이 친구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관련 글 : 나의 전교조 25년, 그 옹이와 매듭]

 

해직 5년, 스승의 날이 되면 집 앞에 와서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주던 아이들과 함께한 5년은 힘들긴 했지만 아련한 그리움으로 내게 남아 있다. 타의로 학교를 떠난 게 첫사랑과의 이별의 아픔과도 같았다면, 아이들과 함께한 그 시절은 그 치유의 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2차로 술집 한 군데를 더 거쳐서 마지막 시간은 노래방에서 끝냈다. 노래방에서 나는 이 군이 부르는 정태춘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의 가창력이 정태춘과 닮아 있었다는 걸 가까스로 기억해냈다. 우리는 자정이 겨워서 아쉽게 헤어졌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 명퇴 신청

 

이튿날, 간밤에 전화를 넣었다가 통화하지 못한 여제자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자정 넘어서 문자를 확인하는 바람에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는 아이의 전언이었다. 죄송해요. 가까이 살면서 연락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나는 바로 그 애(라고 하지만 두 아이의 엄마가 된 40대 주부다.)에게 전화를 넣었다.

 

우리는 일상과 이 군과 관련된 안부를 주고받았다. 여제자는 내게서 배워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시화전을 통해서 나와 연을 맺게 된 사이다. 그는 대학 생활 내내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지금도 여전히 지역 시민운동에서 자기 몫을 다하고 있는 건실한 일꾼이다.

 

내 칭찬은 이 군의 책 읽기를 격려했지만 내 질책은 다른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걸 깨닫는데 꼭 20년쯤의 세월이 필요했다고 나는 말했고 아이는 차분하게 내 얘기를 경청했다. 나는 곧 내게 시간이 많이 생길 것 같다며, 그때 만나서 옛이야기를 나누자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얼마 전 나는 2015년 2월에 실시되는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아이들과 함께 한 저 다섯 해의 시간을 경력으로 인정받지 못해 나는 다른 신청자에 비기면 경력이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신청 자격 문제로 지난 2, 3년간 미루어온 숙제를 해치우는 기분으로 신청서를 쓰면서 나는 내년이 이 ‘혹성’을 탈출하기에 적당한 시기라고 썼다.

 

“나이 들면서 체력의 한계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게
노력과 열정만으로 되는 게 아님을
절감해 교직을 떠나고자 함.”

 

새봄이 오기 전에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내 뜻이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예측은 희망적인데 또 어떤 추측은 매우 비관적이다. 연금제도 개혁 논의가 가파르게 전개되면서 희망자가 넘치기 때문이다. 청년 시절에 그렸던 꿈 덕분에 스스로 선택한 시기에 교단을 떠나기도 쉽지 않은 이 아이러니 앞에 나는 애써 담담하다.

 

나이 들면서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 때문에 속 썩일 일은 없어졌다. 열망하지도 않고 애타지도 않고 나는 습관적으로 문학을 가르치고 아이들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다만 내 쇠잔한 열망 때문에 행여 아이들에게 소홀해지지 않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

 

내게서 뜻하지 않은 질책을 받았던 두 친구 가운데 한 군은 교사가 되었다. 경남에서 열심히 사는 그와는 두어 달 전에 전화로 안부를 나누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도 격려와 질책의 의미를 하나씩 차분하게 깨닫고 있을지 모르겠다. 기회가 되면 그와, 멀리 서울에 사는 박 군에게 안부 전화라도 넣어야겠다.

 

 

2014. 11.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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