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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부음, 궂긴 소식들

‘그’가 가고 30년, ‘그’는 우리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by 낮달2018 2023.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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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영상(1956 ~1993)의 30주기에 부쳐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정영상 30주기 추모식은 그의 시비가 있는 공주대에서 베풀어졌다.
▲ 추모식 제단에 놓은 정영상의 영정과 꽃바구니. 경북복직교사협의회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보낸 꽃바구니다.

정영상, 그가 떠난 지 30년이 흘렀다!

 

월초에 모바일 메신저에 오른 ‘정영상 30주기 추모식’ 소식을 확인하면서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세상에, 그새 삼십 년이 흘렀구나! 황망 중에 그를 보냈는데 어느새 한 세대가 바뀐다는 시간이 흘러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30년 전 포항 연일의 산기슭에 묻은 뒤 다시 그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의 인연은 내 오래된 벗과 함께 내 삶의 한 갈피가 된 ‘안동’과 이어진다. 1984년에 나는 한 절친의 혼인날에 싸락눈이 흩날리던 안동을 처음 찾았는데, 그는 4년 뒤 1988년 1월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금 고향인 임하면 추월리 뒷산에 길안천을 굽어보며 잠들어 있다.

 

그때 나는 그와 같이 안동에 임용된 벗 김헌택과 함께 1정 연수 중이었다. 연수받던 대학에서 김헌택의 소개로 만난 친구가 정영상이었는데, 그게 벗의 부음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는 나와 동갑내기였고, 처가가 내 고향 쪽인 왜관이어서 쉽게 친해져서 이내 말도 텄다.

 

새 학년도에 내가 왜관의 남학교로 학교를 옮기면서 처가를 찾은 그와 간간이 만날 수 있었다. 새 학교의 열등반 아이들과 씨름하며 지쳐갔던 나와, 첫 시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를 발간하면서 제목을 임의로 정한 실천문학사의 ‘상업성’을 못마땅해하는 그는 서로를 위로하며 술잔을 비우곤 했다.

 

1정연수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다

 

이듬해 1989년에 전교조가 출범하면서 우리는 각각 재직 학교에서 해직되었고, 집회와 시위 등에서 간간이 만나면서 안부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가 부인이 근무하는 충북 단양에서 상근하게 되면서 만남은 뜸해졌다. 죽령 너머 신단양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진 그의 부음을 들은 것은 1993년 4월이었다. [관련 글 : 안동에서 10년째 살기

 

우리 나이로 서른일곱 살. 그를 묻으면서 모든 해직 동료들이 숨죽여 울음을 삼켰다. 해직 4년, 전망은 보이지 않았고, 그의 죽음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각성은 통곡과 오열이 되었다. 해직 이듬해 안동에서 배주영 선생을 묻어야 했기에 나는 안동을 매개로 이어진 죽음들 앞에서 망연해졌었다.

 

그는 갔지만, 그가 쓴 시들은 오롯이 살아남아서 유고 시집 <슬픈 눈>(1990)과 <물인 듯 바람인 듯>(1994), 그리고 유고 산문집 <성냥개비에 관한 추억>(1994)이 각각 출간됐다. 그는 1993년 전교조의 참교사상을 받았고 2003년에는 모교 공주대학교에 시비가 세워졌다.

▲ 정영상의 시집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1989) 외의 <슬픈 눈>(1990)과 <물인 듯 불인 듯 바람인 듯>(1994)는 유고시집이다.

교유한 기간이 길지 않아서, 동갑내기로 문학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긴 했지만, 나는 그를 잘 모른다. 그와는 통음 한번 해 본 적 없었으니, 우리는 일상과 속내까지 나눈 사이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단지 나는 그가 남긴 시를 통해서 그를 조금씩 이해해 왔을 뿐이다.

 

시로 만나는 정영상

 

그는 안동 복주여중 수돗가에서 떨어지는 수돗물 소리를 단양의 자기 집에서 들었던(시 ‘환청’), 천생 교사였던 사람이었다. ‘아이들 다 돌아간 후’는 전형적인 교육 시다. 아이들을 하교시킨 후 창밖을 내다보면서 현실을 감당해야 하는 교사의 회한과 성찰의 시다. 그 시는 ‘실천 시선’ 200호 기념 시선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에도 실렸다. [관련 글 : 그 ‘상처’로 오늘이 여물었네]

 

그의 시 가운데 나는 ‘돌 앞에 앉아’를 서늘하게 받아들였다. 특별한 시어를 고르지 않고, 일상의 호흡에다 자신의 정서를 담백하게 서술하는 이 시는 해직된 뒤에 쓴 시로 보인다. 그가 되뇐, ‘울고 싶은 날’과 ‘돌 앞에 이마를 짓찧고 / 피 흘리고 싶은 날’은 문득, 아비의 짐을 깨달은 내 해직 시기의 정서와 다르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이번 추모식이 ‘30주기’라 함은 그간 무심히 보낸 세월을 이름이니, 우리는 저마다 제 몫의 삶을 사느라고 그를 잊고 있었다는 얘기다. 안동과 상주에서 각각 공주로 떠나는 차도 채우지 못할 만큼 추모객도 단출했다. 나는 버스로 상주로 가서 승용차에 오르면서 어쩌면 마지막 추모가 될지도 모르는 행산데, 썰렁하면 어떡하노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추모식장인 공주대학교 사범1관 뒤쪽의 추모공원인 기림 뜰에 모인 이들은 적지 않았다. 참석자는 전교조 경북지부의 10여 명을 비롯하여, 공주대학교 민주동문회와 교육문예창작회 관계자, 제자들, 옛 동료·선후배 교사들 등 30여 명에 이르러 전혀 단출하지 않게 진행되었다.

▲ 시인의 30주기를 추모하고자 모인 동료, 선후배 교사들. 거의 대부분이 70을 전후한 은퇴교사들이다.
▲ 마지막 순서로 '참교육의 함성으로'를 부르는 참석자들.

동료와 제자들이 고인을 눈물로 불러내 한결 따뜻해진 시간 

 

김헌택 선생의 사회로 진행된 의례는 배용한(전 경북지부장), 최교진(세종시 교육감, 전 충남지부장) 선생, 권순긍(교문창), 정형근(공주대민주동문회) 교수의 추모사로 이어졌다. 추모 노래에 이어 조영옥(전 경북지부장) 시인이 자작시를 낭송했고, 충북지부의 동료 해직 교사였던 강성호 선생이 그 자신을 노래한 정영상의 시 ‘오근장역에서’를 읽었다.

 

오근장역은 충북 청주시 오근장동에 있는 충북선의 철도역이다. 정영상은 이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젖먹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같은 해직 교사 강성호를 노래했다. 30년이 지나 그 젖먹이가 이제 31살의 어른이 되었는데도 강성호선생은 그 시를 읽으며 흐느꼈다. 누군들 그러지 않았을까. 30년이 흘렀어도 그날의 슬픔과 아픔을 생생하게 환기하는 시 낭송을 들으며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먼 길 달려온 제자들은 그리움으로 고인을 불러주었다. 오른쪽이 이제경 작가다.

아, 추모식은 쉰이 넘은 제자들이 먼 길을 달려와 그의 시 ‘환청(幻聽)’을 읽으면서 한결 따뜻해졌다. 안동 복주여중에서 그에게 배웠던 두 제자는 목멘 목소리와 눈물로 그를 추억했다. 그중 이제경 작가는 2022년에 ‘환청’이란 주제로 정영상의 시를 그림으로 그린 전시회도 연 화가라고 했다.

 

30년이면 눈물도 메말라 버릴 수 있는 세월이다. 그러나 강성호 선생과 두 제자는 그리움의 눈물로 수십 년을 뛰어넘어 정영상을 소환함으로써 자칫 건조해질 수 있는 추모식 분위기를 따뜻이 적셔 주었다. 그건 내가 정영상이 이 추모를 만족스레 흠향하였으리라고 믿는 이유다.

▲ 사범1관 뒤쪽의 기림 뜰. 동문으로 세월호에서 희생된 두 교사를 기린다.
▲ 정영상 시비는 이제 기림 뜰에서 한 시인의 짧은 삶과 그의 사랑, 그리고 그 시대를 증언하며 낡아갈 것이다 .

벗이여, 이제 우리 함께 늙어가세

 

공주대 기림 뜰은 세월호 사고로 순직한 고 강민규, 김초원 교사를 기리는 추모공원이었다. 정영상의 시비 왼쪽에는 기림 뜰을 알리는 표지가 노란 리본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세월호 9주기인 4월 16일에는 민주동문회에서 두 교사를 기리는 추모식도 베풀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교정에서 두 번이나 옮겨져야 했던 정영상 시비는 이제 기림 뜰에서 한 시인의 짧은 삶과 그의 사랑, 그리고 그 시대를 증언하며 낡아갈 것이다. 살아 있으면, 우리 나이로 예순여덟, 우리는 이태 후 칠순을 맞이할 것이다. 성성한 백발에, 구부정한 허리를 가누며 추모식을 함께 한 은퇴자들은 그렇게 시인 정영상을 만나고 있었다.

 

 

2023. 4.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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