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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같았던 사람’, 숲사람 김창환 선생 10주기에

by 낮달2018 2023.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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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마음을 나눈 사람’ 김창환 선생

▲ 김창환 선생은 안동시 안기동 천주교 공원 묘지에 사모님과 함께 잠들어 있다.

23일 오전 11시 30분, 경북 안동시 안기동 천주교 공원묘지, 선생의 유택 앞에서 ‘숲사람 고 김창환 선생 10주기 추모식’이 베풀어졌다. 안동을 물론이거니와 대구와 경북의 각 시군에서 달려온 60여 명의 교사,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선생을 추모하며 세월의 덧없음을 되뇌었다.
 

당신의 ‘부드럽고 강한 힘’


추모식에 온 이들은 저마다 다른 기억과 이미지로 선생을 떠올리겠지만, 그가 늘 ‘진심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마음을 나눈 사람’이라는 믿음과 교감을 공유한 이들이었다. ‘숲사람’으로 불리길 원한 선생은 “한 그루의 나무가 되라고 한다면 나는 산봉우리의 낙락장송보다 수많은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속에 서고 싶”다고 한 신영복 선생의 글처럼 산봉우리에 홀로서기보다 숱한 나무들의 합창에 함께하고 싶어 한 이였다.
 
1988년 전국교사협의회 시절에 처음 선생을 만난 이래,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까이에서 살며 그가 말없이 일러주는 훈도(薰陶)를 입었다. 선생은 차분하고 냉철하지 못하고 성급하고 강파른 성정을 벗지 못하는 나를 넉넉한 인품으로 품어주셨던 까닭이다.
 
교육 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 지도자로 우뚝 섰으나 선생이 흔히 말하는 뛰어난 역량의 조직 전문가였다거나 넘치는 카리스마를 갖춘 활동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교조에 눈을 흘기는 사람들도 ‘거기 김창환이 있다’는 점만으로도 경계를 풀게 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가진, 부드럽고 강한 힘이었다.
 
선생은 전교조의 대오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빛나고 자랑스러운 이었다. 그는 대중에게 조직의 전망을 분명하게 제시하지도, 어렵고 힘든 문제를 풀어내는 남다른 지혜를 보여주지도 않았지만, 모두 그를 신뢰했다. 그는 다분히 강하고 거친 방식의 전교조 조직에 부드러움과 합리성을 보탠 이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람에 대한 신뢰, 동료에 대한 믿음을 한 번도 잃지 않았던 이였다. 그는 조직 안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과 인연을 ‘감동’으로 받아들인 이였다. 내가 농조로 ‘선생님의 만남 중에서 감동적이지 않은 만남이 어디 있기나 하냐’라고 했을 정도로 말이다.

▲ 선생의 추모식에는 안동은 물론, 경북 도내 곳곳에서 달려온 60여 명의 교사, 시민단체 회원들이 함께했다.

수십 년 인연을 이어 오다 보면 남자들끼리는 형제의 우애 같은 게 생기기 마련이다. 해직 시기를 같이 겪은 오래된 동료들끼리 ‘형님, 아우’가 보통인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후배는 없었다. 그가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정배처럼 형님이라 부르기에는 그가 너무 맑고 고아한 인품을 지닌 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수십 년을 함께해 왔어도 후배들에게 반말을 거의 하지 않았고, 어떤 경우에도 동지를 비난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관계에서 오는 불협화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그것을 받아 삭임으로써 오히려 함께 힘을 모을 수 있게 하는 여지를 남겨두곤 했다.
 

인간 김창환의 ‘개관사정(蓋棺事定)’


10년 전 장례 때, 끝없이 밀어닥치는 조문객을 지켜보면서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본인의 장례’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온 건 생전 처음 보았노라고 했었다. 장례를 시작하고 마칠 때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진 조문 행렬은 그의 온화한 인품을 기린 이들의 따뜻한 배웅이었다. [관련 글 : 교사들의 스승, 김창환 선생을 보내며]
 
생전에 예천에서 오래 인연을 맺었던 김영식 신부가 장례미사에서 읽어준, 선생이 쓴 글의 한 꼭지를 아직도 통렬한 죽비처럼 떠올린다. 그는 ‘개관사정(蓋棺事定)’을 이르며,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오히려 남은 이들이 뉘우치며 성찰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느려 터지고 미련스럽지만 내가 서야 할 자리에 서고, 내가 해야 할 말이 있다면 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려고 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개관사정(蓋棺事定)을 좌우명 삼아 스스로 경계를 삼고자 합니다. 개관사정이란, 사람의 시신을 관 속에 넣고 뚜껑을 닫고 나서야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내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특히 훼절하기 쉬운 먹물들이 새겨들을 말인가 합니다.”
 
개관사정은 두보의 시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 인간에 대한 총체적 평가는 결국 죽고 나서야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선생은 이미 10년 전에 ‘관(棺)’에 몸을 뉘었다. 남은 것은 사람들의 평가지만, 더는 이를 게 없다. 조문을 이어간 선후배 교사들의 발걸음이 그 ‘사정(事定)’이며, 우리들 기억 속에 오롯이 살아 있는 ‘김창환’이 곧 그 사정이었으니 말이다.
 
장례미사에서 김 신부는 선생과 선생의 삶을 일러 ‘바다 같은 사람, 바다 같은 삶’이라고 추모했었다. 바다는 가장 낮은 데서 모든 강물을 넉넉하게 안아낸다. 선생이 우리와 함께하면서 기꺼이 맡은 역할이 ‘바다’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더 애틋하게 그가 바다였음을 새록새록 깨우쳐 가고 있다. 그것은 이날 유택을 찾아 꽃과 잔을 바친 이들 모두가 마음속으로 공감한 일이었을 거였다.
 
어느덧, 그의 길을 좇아 함께한 우리도 예순 넘어 일흔이 가깝다. 하산하면서, 우리는 어쩌면 선생의 20주기를 챙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면서 쓴웃음을 나누었다. 산등성이에 내리는 2월의 햇볕이 선생의 생애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2023. 2. 24. 낮달

 


어쩌다 보니 2013년 장례식에서 선생님을 배웅한 뒤, 그 뒤 드문드문 이어진 추모식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해마다 다른 일이 겹치기도 했지만, 산 사람들이 세상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일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프게 환기하는 걸 무심하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서였다.
 
10주기 추모식 소식을 접하고 나서도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히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교조 본부 편집실장이라는 이의 전화를 받았다. 이름이 낯설지 않아서 혹시나 했는데 그는 30년도 전, 해직 시절에 성주의 한 학교에 근무하던 20대의 아주 젊은 여교사였다. 자주 만나진 않았지만, 10여 년 전, 서울의 집회에서 만났더니 도간(道間) 이동하여 인천인가 수도권에 근무한다고 했다.
 
20년이 넘으면서 나는 퇴직해 조직을 떠났는데, 그는 노동조합 전임으로 본부 편집실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 ‘애리애리했던’ 여교사가 어느덧 노조 전임자로 성장한 거여서 나는 마음이 못내 겨웠다. 10주기 관련 추모글을 청탁에 망설이지 않고 그러마고 한 것은 그렇게 겨운 마음 때문이었다. [교육희망 기사 ]

▲ 인터넷신문으로 바뀐 전교조 기관지 〈교육희망〉에 실린 글.

추모식에 가지도 않고 글을 쓸 수는 없는 일, 나는 차편을 수소문하다 어쩔 수 없이 승용차로 안동을 다녀왔다. 그리고 10년 전에 선생을 배웅하면서 블로그에 올린 글을 손질하여 보냈다. 10년 전에 쓴 글인데도, 따로 감정을 과정하거나 분식하지 않은 듯해서 나는 새삼 그게 선생의 인품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글 끝에 썼듯이 10년 후면 우리도 여든을 눈앞에 두게 된다. 그때까지 선생의 20주기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행여 목숨을 이어가고 있으면, 벗들과 함께 선생의 유택 앞에 한 잔 술을 올리게 되리라.

▲ 배주영 선생 묘소 앞에서 우리는 또 한 잔 술을 올렸다.

같은 묘지에 있는 배주영(1963~1990) 선생의 유택 앞에서도 우리는 한잔 술을 올렸다.  30주기 때 탈상을 했지만, 지나는 걸음에 그럴 수 없는 일 아닌가. 마침 배 선생의 오빠도 참석했다. [관련 글 : 그가 간 지 30년……, 팩스 한 장으로 되돌려진 ‘법외노조’
 
배 선생은 살아 있으면 61세, 올로 회갑을 맞는다. 술을 올리면서 모두들 그런 회한의 감정을 벗기 어려웠으리라. 현직의 젊은 후배들도 있었지만, 일흔을 넘긴 선배들의 마음은 또 달랐을 게 아닌가 말이다. 어쨌든 세월 앞에서 우리는 젊은 날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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