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조]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1925~2021) 선생 별세에 부쳐
오늘 새벽 인터넷에서 태평양전쟁 뒤 비시(B·C급) 전범으로 복역했던 한국인 이학래(1925~2021) 동진회(同進會) 회장의 부음을 확인했다. 블로그에 실은 서평 글 <전범이 된 조선 청년>의 조회 수가 부쩍 늘어나는 걸 보고도 무심히 지나쳤는데, 일간지 기사에서 선생의 부음을 확인한 것이다. <마이니찌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선생은 지난 24일 자택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쳤고, 28일 외상성 뇌출혈로 숨졌다고 한다. 향년 96세.
전범이 된 조선 청년 이학래, 96세를 일기로 떠나다
나는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 청년>으로 그를 만났었다. 그가 일본에서 펴낸 이 회고록의 한국어판은 2017년 말에 나왔고, 나는 이 책의 서평을 쓰면서 그가 살아온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청원과 진정, 소송 등으로 일본 정부와 싸워온 61년간의 집념 어린 교섭 투쟁의 기록인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역사와 맞선 한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면서 깊이 감명받았다. (관련 기사 : 60년 넘게 일본 정부와 싸운 92세 ‘BC급 전범’ 이학래)
1942년 열일곱 살에 일제의 포로 감시원에 지원(사실상 강제동원)한 이학래는 타이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어 타이·미얀마 철도 건설 현장에 투입된 연합군 포로감시 업무를 맡았다. 3년간의 포로 감시원으로 일한 그는 1947년 전범 재판의 첫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뒤에 20년으로 감형돼 복역하다가 11년 만인 1956년에 가석방됐다.
전범으로 낙인찍힌 그는 열일곱에 떠나온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타이·미얀마 철도 건설 현장에서 근무한 동료 넷은 처형됐고 셋은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유기형으로 감형됐다. 주로 포로 학대 혐의로 기소된 B·C급 전범 가운데에는 조선인은 148명, 이들 중 23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고, 125명이 유·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가석방된 갓 스물의 전범은 왜 일본의 전쟁 책임을 자신들이 져야 했는지,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위해 전범이 돼야 했는지를 화두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65년 동안 쉬지 않고 싸웠다. “전범이 되어 일본의 책임을 떠안고 죽어 간 동료들의 원한을 다소나마 풀어 주는 것이 살아남은 저의 책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B·C급 전범 모임인 ‘동진회’(東進會) 운동을 하면서 ‘조선인 전범 문제의 해결을 원하는 요청서’를 제출한 일본 총리는 1955년 하토야마 이치로 수상(총리) 이후 아베 신조까지 29명에 이르렀으나, ‘배상과 보상’은 “한일조약으로 이미 해결이 완료됐다”라는 일본 정부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1955년 동료 70명과 함께 ‘한국 출신 전범 동진회’를 설립한 그가 당시 수상 하토야마 이치로에게 요청한 것은 ‘전범의 조기 석방과 생활 보장, 유골 송환 등’이었다. 포로 관리의 책임을 떠안기고 자신들을 방치한 것을 ‘일본에 의해 잠시 쓰이고 버려졌다’고 여긴 그는 일본 정부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한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전 연합국 포로 초빙사업을 벌여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네덜란드 등의 전 포로와 가족 백몇십 명을 초대해 외무장관이 이들을 면담하고 과거를 사죄했다. 그러나 정작 일본은 한국 전범들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지금까지 외면해 왔다.
2005년에 한국 정부가 공개한 한일회담 관련 외교 문서로 ‘일본 전범으로 형을 받은 한국인의 문제는 애당초 한일회담 의제에 올라 있지 않았다’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는 한국인 전범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일본 정부의 답변이 전적으로 궤변이라는 증거라고 이학래는 지적한다.
그가 아무 성과도 없는 일본 정부와의 교섭을 60년 넘게 이어온 힘은 처형된 동료의 유한(遺恨)이었다. 그것은 ‘내일, 내일 하며 사형 집행에 떨며 지낸 8개월, 그사이 떠나보낸 동료의 얼굴, 교수대 발판이 떨어지는 소리, 사형수 감방 벽에 새겨진 글자와 손톱자국’ 같은 것이었다.
그간 이들이 한국 정부에 문제 해결을 요청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했다는 자책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 데다가 전범의 멍에를 뒤집어썼고, 거기에다 조국의 전후 부흥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일 교섭 초기부터 한국인 전범 피해 문제는 청구권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분노와 비애를 가누지 못했다.
2006년 한국 정부는 한국인 BC급 전범자를 ‘강제동원 피해자’라고 인정하고, 보상책에 따라 사망자와 행방불명자에 대한 위로금과 생존자 의료비를 지원했다. 비록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그는 이를 조국이 인정하는 명예 회복으로 여겼다고 술회했다.
1991년, 이학래는 동료 일곱 명과 함께 한국·조선인 B·C급 전범자 국가 보상 등 청구 사건을 도쿄지방법원에 제소했다. 그해에 그들은 군무원으로 3년, 전범으로 6년, 정신병원에서 무려 40년을 보낸 이영길을 보냈다. 여름의 불꽃놀이를 함포 사격으로 착각해 겁에 질리곤 했던 그를 보내며 그들은 그의 잃어버린 삶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의 책임을 추궁을 이어가자고 결의했다.
그러나 이 소송은 1996년 도쿄지방법원이, 1998년에는 도쿄고등법원이 각각 청구를 기각했다. 1999년에는 최고재판소가 피해를 인정하고 입법부에 입법 조치를 촉구하는 판시를 했지만 역시 청구를 기각했다. 이후 동진회원들은 ‘한국·조선인 B·C급 전범자 보상 입법’ 운동을 이어왔지만, 여전히 입법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1991년 제기했던 소송의 원고 7명 가운데, 전범 출신으로 살아남은 이는 그뿐이었다. 그는 지난해에도 중의원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숨진 동료들 명예 회복을 위한 입법을 호소했지만, 끝내 아무 답도 듣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싸움은 아직 끝낼 수 없다
그의 죽음으로 ‘한국·조선인 BC급 전범자 보상 입법’ 운동은 중단될지도 모른다. 또, 65년 동안이나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싸워온 그의 부재로 형식적으로 일본 정부는 성가신 ‘조선인 전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해방 후 70년이 넘도록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배상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현안인 것처럼 비록 전범으로 살아야 했던 한국인들이 하나둘 숨진다고 해서 한국인 전범에 대한 사죄와 보상 문제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 전범의 무고한 희생을 방관해 온 한국과 한국 사회의 무책임 문제도 지워질 수 없다.
식민지 조국 탓에 역사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이학래와 그의 동료들은 그 역사에 맞서 65년 동안이나 기약 없는 싸움을 이어 왔다. 그 싸움은 본국 정부의 어떤 도움도 없이, 오직 자신의 보편적 상식과 정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의 죽음 앞에 한국과 한국 사회가 이 전후 청산을 새롭게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그는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 청년>에서 “일본 정부는 자신의 부조리를 시정하고, 입법을 촉구하는 사법부의 견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입법 조치를 조속히 강구”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요구가 불합리하다면 요구를 취하하겠다고 덧붙였다.
비록 자신의 고단한 삶을 마감했지만, 태평양전쟁 B·C급 전범 이학래가 “일본인의 정의와 도의심”에 호소하며 일본 사회에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정체성에 관한 물음’으로 거기 답하는 것이 진실의 확인이며 도덕과 정의의 추인이 되리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1942년 열일곱에 일본군에 강제 동원되었던 전남 보성 청년 이학래, 포로 감시원으로 3년, 전범으로 11년을 복역한 뒤, 이후 65년 동안 그가 벌인 인간의 존재 증명을 위한 싸움도 마땅히 기려져야 하는 이유다.
마침내 긴 싸움을 내려놓고 떠난 선생이, 전쟁도 싸움도 없는 세상에서 영면하시길 빈다.
2021. 3. 2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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