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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 시기가 일주일이나 일렀던 탓에 내 ‘꽃 삼월’은 좀 허무하게 막을 내린 느낌이다. 산수유, 매화, 살구, 명자꽃이 차례로 피어나 질 무렵에야 벚꽃이 슬슬 피기 시작하던 예년과 달리, 올해는 4월 들면서 벚꽃은 이미 파장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벚꽃 파장에 곳곳에 분홍빛 도화원
먼 산에 희끗희끗 남은 흰 꽃 무리는 뒤늦게 피어난 산벚꽃이다. 이미 사람들을 꾀게 한 벚꽃 단지는 잎을 떨구고 빨간 꽃받침만 남아 허망한 절정의 뒤끝을 보여주고 있다. 그 쓸쓸한 틈새를 메우는 건 예년 같으면 이제 겨우 꽃망울을 터뜨릴 차례인 복사꽃이다.
벌써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가 되었나 싶은데, 하루 이틀 사이에 산책길 주변은 짙어지는 분홍빛 도화원(桃花源)으로 바뀌어 버렸다. 정작 복숭아 과수원은 드물고, 대부분 산기슭이나 밭 주변에 한두 그루씩 서 있는 나무들이다. 살구꽃이 진 뒤의 상실감을 이 녀석들이 아주 충실히 메워주는 것이다.
원산지가 중국인 복숭아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식용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남북조시대의 시인인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도 복숭아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며, 도교의 신화에서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신비한 복숭아가 나타나기도 한다.
복숭아, 이 땅에서 2천년 역사, 나무의 정식 명칭은 ‘복사나무’
한국에서 복숭아가 정확하게 언제, 어떻게 재배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문헌상으로 복숭아가 나타나는 건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 본기(本紀) 온조왕 3년 동(同) 시월(十月) 조다. “겨울에 우레가 일어나고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라는 기록인데 이때가 기원전 16년이니, 재배 역사가 최소한 2천 년이 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금천리에서 3천 년 전의 복숭아 핵이 출토되기도 했다.
구미의 태조산 도리사(桃李寺) 연기 설화에도 복숭아가 등장한다. 아도화상이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서라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걸 보고 거기 절을 지었으니, 이 절이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복숭아가 고려 말에서 조선 개국 초 과일 중 하나로 소개됐다. 허균의 팔도 토산품과 별미음식 소개 개설서 <도문대작(屠門大爵)>(1611)에는 자도(紫桃)·황도(黃桃) 등 5품종, 실학자 서호수의 <해동농서(海東農書)>에는 모도(毛桃) 등 9품종이 각각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에는 다양한 복숭아 재래종이 존재하고 있었다.
복숭아(Prunus persica, peach)는 장미과 벚나무 속에 속하는 복사나무의 열매이다. 원산지는 중국 화북의 산시성과 간쑤성의 해발 600~2,000m 고원 지대다. 생으로 먹는 과일이지만, 과육이 무르고 당도가 높아 벌레가 많이 꼬이는 등 저장성이 떨어져서 저장할 수 있게 만든 정과(正果)나 과편 등으로 만들어 먹었다.
한국 국가표준 식물목록이나 국립수목원에서는 ‘복사나무’가 정명이고, ‘복숭아나무’는 이명으로 처리되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복사’는 “복숭아의 준말”이라고 풀이하여 둘을 동의어로 처리하고 있다. 복숭아꽃이 ‘복사꽃’으로 쓰이는 이유다.
우리는 자라면서 복숭아를 ‘복숭’이라고 불렀는데, 이런 방언을 쓰는 곳은 강원, 경상, 전라, 충청 지방 등이다. “털이 많이 난 사람이나 동물, 물건을 이르는 말”로 우리 지방에선 ‘털복숭이’를 쓴다. 흔히 이를 ‘복숭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 표준말은 ‘털북숭이’이기 때문이다.
복숭아, 불사의 과일, 혹은 축사(逐邪)의 힘
살구나무는 어쩌다 동네에 한두 그루 있을 정도였지만, 복사나무는 그보다 훨씬 많이 심어졌다. 산등성이에 자생하는 개복숭아도 적지 않았고 복숭아의 품종도 다양했다. 남진이 부른 대중가요 ‘목화 아가씨’ 가사에 “복사꽃 피던 포구 십 리 포구로 달마중 가던 순이야”라고 노래할 만큼 복사꽃은 흔했다.
이렇듯 널리 재배되는 과일이었지만, 복숭아는 제사상에 올리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축귀(逐鬼)와 벽사초복(辟邪招福)의 힘이 있다고 믿었던 복숭아는 ‘귀신 쫓는 과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도교에서 복숭아를 신선이 먹는 불사의 과일이라 하여 천도(天桃), 선도(仙桃) 등으로 부른 영향도 있었다. [관련 글 : 벗의 도화원(桃花源), 그 연분홍 안개]
<삼국유사>에는 불로장생의 복숭아가 열리는 선도산의 선도 성모 사소(娑蘇)가 혁거세와 알영을 낳았다는 이야기, 가야의 왕비가 된 허황옥이 하늘의 계시에 따라 김수로왕을 만나려고 바다에서 대추를, 하늘에서 반도(蟠桃, 복숭아)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복사나무가 축귀(逐鬼)와 불로장생이라는 두 가지 상징성을 지니게 된 근거는 복숭아가 이른 시기에 봄기운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 잎이 나기도 전에 꽃을 피우는 양기 충만한 나무이기 때문으로 본다. 자연히 복숭아에 음기를 쫓는 힘이 강하다고 여긴 것이다. 또 복숭아의 생김새가 여근(女根), 여체를 연상케 하고 열매가 많아 강한 생산력과 생명력을 지닌 여성성을 상징하게 되어 불로장생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으로 유추하는 것이다.
같은 장미과라도 복사꽃은 매화나 살구꽃처럼 분간이 어렵지는 않다. 분홍이 비치는 꽃 빛은 전체적으로 붉은 기가 강하다. 이 꽃 빛은 복숭아의 형상에서 드러난 성적 상징과 연결, ‘도색(桃色)’이라 하여 남녀 간 색정을 이르기도 한다. 그 왕성한 힘과 생산력을 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 의미로 복숭아의 상징성을 새기는 까닭이다.
산책길에서 돌아오는 길, 언덕바지 산어귀에 누가 심었는지 복사나무 서너 그루가 꽃을 피우고 섰다. 처음 꽃망울을 터뜨릴 때, 흰빛이 두드러져 살구인가 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분홍빛으로 물들면서 복사꽃의 모습을 드러냈다. 복사꽃은 처음엔 흰빛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홍빛이 퍼지면서 붉은빛이 짙어지는 것이다.
복사꽃 무르익는 봄, 그러나 ‘춘래불사춘’
꽃술도 꽃잎이 흰빛일 때는 하얀 꽃술대에 주황빛 수술이 아름답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꽃술대도 붉어지면서 전체적으로 붉은빛이 강해지는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복사꽃이 분홍보다 더 강한 붉은 기를 띠는 이유다.
어저께 의성 초전리에서 복숭아 농사를 짓는 벗과 통화했다. 벌써 거기도 꽃이 피기 시작했다며, 벌도 적은데 개화가 이른 것도 반갑잖은 일이라고 했다. 해마다 4월 중순께에 그의 복숭아밭에서 모여서 무르익은 봄을 즐기곤 했는데 올해는 그 시기가 한 일주일쯤 당겨진 것이다.
일기 예보는 오늘 밤부터 내일모레까지 적잖은 비가 내릴 거라고 했다. 그는 바람도 분다고 하니, 꽃잎이 떨어질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이래저래 농부에게는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다. 공교롭게도 국회에서 통과된 양곡관리법에 대해 대통령이 오늘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일본과의 회담에서 ‘결단’이라며 대 내어주고는 농민들의 생존권과 관련된 요구에는 거부권으로 응답한 것이다. 춘래불사춘, 이래저래 봄 같지 않은 정국이 이어지고 있다.
2023. 4. 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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