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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2022년 11월, 만추의 장미

by 낮달2018 2022.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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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미의 5월의 여왕으로 불린다. 푸르러지는 산을 배경으로 싱싱하게 피어난 장미가 풍성하다. 2021년 5월 19일.

11월, 곧 겨울인데도 아침 산책길 곳곳에서 장미를 만난다. 집에서 출발하여 한 200m쯤 가면 공립중학교 울타리에서 장미를 만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초등학교 울타리에서도 수줍게 바깥을 내다보는 장미를 만난다. 얼마 전부터 길을 바꾸어 가다가 만난 가정집 정원의 장미도 여전히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꽃, 장미가 흔해졌다

내가 처음 장미를 만난 건 언제였을까. 초등학교 화단에 장미가 있었던가 돌이켜보지만, 전혀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 아마, 대도시로 공부하러 간 중학교 때 처음 장미를 구경했을 것이다. 학교에 장미가 피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가정집 담 밖으로 고개를 내민 장미를 만났던 기억은 유난히 생생하다.

요즘처럼 꽃이 흔하지 않은 시대였다. 요즘은 집을 가꾸면서 꽃과 나무를 심는 게 기본이지만, 먹고사는 게 고단했던 6, 70년대는 집을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시절이었다. 요즘은 지자체에서 거리에다 화단을 조성해 꽃을 심고, 교외에도 길가엔 계절에 따라 꽃길이 이어진다. 거기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집에다 꽃을 기르고, 나무를 심는 것이다.

▲ 아직 6월인데도 시들어 꽃받침만 남은 장미. 2011년 6월 29일.

장미만 해도 그렇다. 안동에 살 때 걸어서 오르는 출퇴근 길목에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서 시야를 흔들곤 했다. 5월이었고, 그때야 비로소 ‘장미가 5월의 여왕’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관련 글 : 장미, 장미, 장미]학교 교사 뒤편의 축대에도 장미가 피었는데, 꽃이 지고 앙상하게 남은 꽃받침을 보면서 신경림의 시를 읽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관련 글 : 신경림 장미에게]

장미는 한때 쉽게 만날 수 없었던 귀한 화초였지만, 어느덧 사람들과 일상을 함께하는 친근한 꽃이 되었다. 안동에서 장미가 흔하다고 생각했는데 구미로 오니 온 도시의 거리마다 장미가 만발해 있었다. 장미는 길가의 화단과 공단 기업체와 가정집의 울타리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 장미는 서리가 내릴 때까지 계속 꽃을 피운다. 2022년 10월 15일, 구미시 봉곡동 가정집 울타리의 장미.
▲ 2022년 11월 7일, 구미시 부곡동 농원의 울타리에서
▲ 잎도 시들고, 꽃받침만 남은 곳도 있지만, 여전히 장미는 봉오리를 맺고 있다. 2022년 11월 9일, 구미 봉곡동.
▲ 주변 사물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장미는 생기가 넘치고, 곱고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2022년 11월 9일, 구미 봉곡동.
▲ 소설이 가까워지는데 여전히 동네 가정집 울타리의 장미는 새로 봉오리를 맺고 있다. 2022년 11월 13일 구미시 봉곡동.

장미(薔薇)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이다. 장미는 일반적으로 세계의 여러 장미를 원종으로 하여 새롭게 인위적으로 만든 원예 품종을 일컫는다. 우리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찔레나무는 장미과 장미속의 우리나라 들장미다.

장미의 역사, 화왕계의 장미

▲ 딸애가 베란다에 기르고 있는 분홍 장미. 막 봉오리를 맺었다.

인류가 장미를 재배한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서기전(B.C) 3000년경에 중동지역에서 다마스크 장미를 관상용으로 재배하였고, 로마 시대에는 장미를 증류해 얻은 향료가 귀족들의 생활필수품으로 애용되었다. 중국 명대(明代)의 약학서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찔레를 장미라고 하며 담장 벽에 의지해서 자란다고 기술되어 있다. ‘화왕계’에 나오는 장미가 찔레꽃 등 야생 장미일 가능성이 있는 이유다.

화왕(花王)께서 처음 이 세상에 나왔을 때, 향기로운 동산에 심고, 푸른 휘장으로 둘러싸 보호하였는데, 삼춘가절(三春佳節)을 맞아 예쁜 꽃을 피우니, 온갖 꽃보다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여러 꽃이 다투어 화왕(花王)을 뵈러 왔다. 깊고 그윽한 골짜기의 맑은 정기를 타고 난 탐스러운 꽃들이 다투어서 모여 왔다.

문득 한 가인(佳人)이 앞으로 나왔다. 붉은 얼굴에 옥 같은 이와 신선하고 탐스러운 감색 나들이옷을 입고 아장거리는 무희(舞姬)처럼 얌전하게 화왕에게 아뢰었다.

“이 몸은 백설의 모래사장을 밟고,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바라보며 자라났습니다. 봄비가 내릴 때는 목욕하여 몸의 먼지를 씻었고, 상쾌하고 맑은 바람 속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지냈습니다. 이름은 장미라 합니다. 임금님의 높으신 덕을 듣고, 꽃다운 침소에 그윽한 향기를 더하여 모시고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께서 이 몸을 받아 주실는지요?”

-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설총 조(條)’에 실려 전하는 단편 산문 ‘화왕계(花王戒)’ 중에서

‘화왕계’ 속 화왕(花王)은 꽃 중 왕인 모란이고, 장미는 아첨하는 미인으로 나온다. 화왕에 충간(忠諫)하려 베옷에 가죽띠를 두른 차림으로 찾아온 백두옹(白頭翁)은 할미꽃이다.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하는 걸 두고 망설이는 화왕은 백두옹의 간언을 받아들이게 된다.

 

조선시대 강희안(1417~1465)이 꽃과 나무의 특성을 정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원예서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도 장미는 자태가 아리땁고 아담하다고 평하였으며, ‘가우(佳友 : 아름다운 벗)’라 부르면서 화목(花木) 구등품제 중 5등으로 매기고 있다.

▲ 우리나라의 장미속 식물들. 이들도 향기가 좋고, 아름답지만, 대부분 농가에서 재배되는 장미는 외국 품종이라고 한다.
▲ 찔레의 열매는 '영실'이라고 부른다.

‘영실(營實)’이라고도 하는 찔레나무는 열매가 이뇨와 해독 작용 약재로 쓰기도 하였다. 옛사람들은 장미 열매나 꽃잎을 모아 방향제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이를 베갯속에 넣어 두기도 하였다. 또한, 꽃을 증류시켜 만든 화로(花露)를 세안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봄날에 장미꽃을 따다가 떡을 만들어 기름에 지져 먹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의 장미는 장미 속 식물 중 꽃이 큰 수종, 즉 중국산 야생 장미 속 식물이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산 야생 장미 속 식물 사이에 잡종을 만들어내어 육종되어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현대 장미는 20세기 초에 일본을 거쳐 유입되었고, 1950년 이후에 많은 품종이 도입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장미는 일찍부터 관상용으로 재배되어온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의 장미 속 식물에는 찔레나무·돌가시나무·해당화·붉은인가목 등이 있는데, 모두 다 향기가 좋고 아름다워서 관상용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 농가에서 재배되고 있는 신품종 대부분은 외국 품종이라고 한다.

▲ 가을이 성큼 깊었다. 지난 여름의 무성했던 풀과 나무는 단풍으로 물들고, 낙엽으로 지고 있다. 이제 장미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 여성 노동운동가 로즈 슈나이더만

장미는 꽃이 크게 겹꽃으로 피며, 가시가 많고, 향기가 강하고 한 줄기에서 여러 차례 꽃이 피고 빛깔은 흰색, 분홍, 노랑, 빨강, 보라 등 다양하다. 꽃은 늦은 봄에 피기 시작하여 첫서리가 올 때까지 계속 핀다. 입동을 지났는데도 아직 싱싱하게 핀 장미를 볼 수 있는 이유다.

로즈데이와 ‘여성의 날’의 장미

모르긴 해도 장미는 전 세계에 가장 널리 그리고 대중적으로 보급된 꽃이 아닐까 싶다. 물론 화려한 빛깔과 향기가 풍기는 역동적인 아름다움에 힘입어서다. 한국의 대중문화에서 5월 14일이 ‘로즈 데이(Rose Day)’라는 비공식 기념일이 될 정도다.

장미의 꽃말은 빛깔에 따라 다양하다.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마다 사람들의 소망이 담긴 꽃말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빨강 장미가 ‘열렬한 사랑, 불타는 사랑, 아름다움, 사랑의 비밀’, 노랑 장미는 ‘질투, 시기, 완벽한 성취’, 흰색 장미는 ‘존경, 순결, 순진, 매력’을 뜻한다고 하니, 이는 모두 호사가들의 꽃 사랑의 결과다.

▲ 여성의 날의 장미

꽃 선물과는 익숙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나도 가끔 아내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아내에게 장미를 선물하곤 했다. 요즘은 장미 한 송이도 값이 만만치 않아서, 아내는 장미 선물에 겨워하다가도 몇 송이만으로 충분하니 과용하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장미는 ‘사랑’과 연관되는 꽃말로만 기억되는 건 아니다. 장미는 1912년 여성 노동운동가인 로즈 슈나이더만(Rose Schneiderman)이 “노동자는 빵뿐 아니라 장미도 가져야 한다”라고 연설하면서 여성의 날의 상징이 되었다. ‘빵’이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의미한다면 ‘장미’는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 권리’를 뜻한다.[관련 글 : ‘세계 여성의 날’과 노회찬의 장미, 마거릿 생어와 낙태죄 논란]

다음 절기인 소설(小雪)이 오는 22일이니 그때부터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될 터이다. 그때가 되면 마지막으로 핀 장미도 시들고, 2022년도 저물 것이다. 사진 파일 속 시들어 꽃받침만 남은 말라버린 11년 전의 장미를 바라보면서 한 해의 남은 날들을 헤아려본다.


2022. 11.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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