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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 이야기 - 살구꽃, ‘행림(杏林)’과 ‘행화촌(杏花村)’

by 낮달2018 2023.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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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의 계절,  ‘행림(杏林)’과  ‘행화촌(杏花村)’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올해 우리 동네 카페 뒤란 언덕바지에서 새로 만난 살구꽃. 매화에 비기면 훨씬 정갈하고 곱다.

살구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2017년 동네 산책길을 다니면서다. 그해 4월, 박근혜가 파면을 선고받아 구속, 수감되고 가라앉았던 세월호가 뭍으로 돌아온 4월에 동네에는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럴 리가 없지만, 나는 거기 겨워서 ‘살구꽃, 혹은 성찰하는 공민의 봄’이라는 좀 달착지근한 글을 썼다. [관련 글 : 살구꽃, 혹은 성찰하는 공민의 봄]

 

매화가 지고 있었는데, 이웃 동네 골목길에서 상기도 화사하게 남은 매화를 만났다. 그런데, 당연히 매화라고 여겼던 꽃이 살구였다. 그러고 보니, 내겐 살구꽃에 관한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같은 벚나무 속 장미과의 식물인지라 그걸 분간하는 게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기웃거려 매화와 살구가 어떻게 다른지를 확인했지만, 실제로 한눈에 그걸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둘의 차이는 잘 드러나지 않았는데, 결정적 차이는 꽃받침의 형태였다. 매화의 꽃받침이 꽃을 온전히 감싸고 있다면, 살구의 꽃받침은 반대쪽으로 뒤집힌 모습이었다.

▲ 매화(왼쪽)와 살구는 꽃받침의 형태에서 구별된다. 매화는 꽃을 감싸고 있지만, 살구의 꽃받침은 반대쪽으로 뒤집힌 모습이다.

유년의 살구, 살구나무

 

살구는 어릴 적, 이웃에 사는 동무 집 창가에 서 있었다. 커다란 나무여서 꽃도 열매도 아이들 손이 자라지 않아 올려다보기만 하다가 초여름에 살구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한두 개 얻어먹는 게 고작이었다. 손으로 좌우로 벌리면 씨가 간단하게 발라지는 살구 맛은 달콤하고 쌉싸름했다.

 

손재주 있는 아이들은 발라진 씨를 시멘트 바닥에 갈아서 피리를 만들어 불곤 했다. 그러나 그걸 배우지도 못했을뿐더러 그걸 불어보지도 못한 나는 멀거니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서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도회지에서 공부하고 타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나는 살구꽃도 살구도 잊고 살았다. 살구는

예부터 복숭아, 자두와 함께 우리나라 대표적 과일로 꼽힌다. 조선 초기 종묘 제례에 살구를 제물로 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 이미경 펜화 '덕평리에서'.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중에서

살구나무는 서민들이 집 울타리 안팎에 흔히 심어 가꾼 나무다. 정완영의 ‘분이네 살구나무’나 이호우의 ‘살구꽃 핀 마을’ 같은 시조에 소재로 쓰일 만큼 흔해서 정겨운 나무다. 정완영은 마을에서 가장 작은 분이네 집 살구나무가 동네에서 가장 큰 나무인데, 꽃이 피면 대궐보다 덩그렇다고 노래한다. 가장 가난한 오막살이 집에 핀 큰 나무, 꽃이 피어서 대궐보다 더 커 보이는 풍경은 아련하고 슬프다.

 

이호우는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라고 노래하여 살구가 우리네 고향의 일상적 풍경임을 확인한다. 어느 집이라도 들어서면 아니 반길 데가 없으리라고, 그 꽃그늘에 달이 뜨면 술잔을 나누는 정에 나그네는 저무는 날에도 바쁘지 않다고 노래하면서.

 

대중가수 나훈아가 부른 ‘18세 순이’는 “살구꽃이 필 때면 돌아온다던 내 사랑 순이”를 노래한다. 나이 열여덟에 이름은 순이인 큰아기는 이 땅에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화자는 순이를 찾아가야 한다며 누가 그를 본 적이 없느냐고 묻고 있다.

 

살구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소교목으로 꽃은 흰색에서 분홍빛을 띤다. 7월에 맛이 시고 단, 황색 또는 황적색으로 익는 열매를 맺는다. 원산지는 동부 아시아, 우리나라에서 살구가 재배되기 시작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오래전부터 중부 이북 지방의 산야에서 자생해 온 것으로 추측한다.

 

살구의 씨는 행인(杏仁)이라 하여 한약재로 많이 이용한다. 살구씨의 효능으로는 진해·거담 등이 알려져 있으며, 각종 해소·천식·기관지염·급성간염·인후염 등에 치료제로 사용한다. 또한, 살구씨는 여성의 피부미용에도 좋다고 알려졌는데, ‘살구’라는 이름의 세안 비누도 있을 정도다.

 

 ‘행림(杏林)’은 ‘의원,  행화촌(杏花村)’은 ‘술집

▲ '행인'이라 부르는 살구 씨는 쓰임새와 약효가 많다.

 

살구는 한자로는 ‘행(杏)’으로 쓴다. 은행(銀杏)도 ‘행(杏)’ 자를 쓰는 것은 <본초강목>에 “은행은 송나라 초기에 처음 조공으로 들어왔을 때 은행(銀杏)으로 바꾸어 불렀는데, 이는 모양이 작은 살구[杏]와 같으면서 속씨가 흰[銀]색이었기 때문이다”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의서에서는 살구 열매는 행실(杏實), 씨는 행인(杏仁)으로 쓴다. <본초강목>과 <동의보감> 등에 살구씨를 이용한 치료 방법이 200가지나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쓰임새와 약효가 많아 ‘약방의 살구’라 불리기도 한다. 살구나무가 무성하게 꽉 들어찬 곳을 ‘행림(杏林)’이라 하는데, 이는 ‘의원’을 달리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중국의 삼국시대 오나라에 동봉(董奉)이라는 유명한 의원이 있었다. 동봉은 환자들에게 치료비를 받지 않고 중환자에게는 다섯 그루, 경환자에게는 한 그루씩 살구나무를 심게 하였다. ‘행림’은 이 나무들이 몇 년 뒤에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편, 살구꽃 핀 마을이라는 뜻의 행화촌(杏花村)은 술집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는데 이는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시 ‘청명(淸明)’에서 유래했다. 두목이 청명 무렵의 봄날에 행화촌을 지나다가 지은 시인데 술집을 물으니 목동이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킨다는 내용에서 유래했다.

▲ 내가 사는 아파트를 배경으로 피어난 우리 동네의 살구꽃.
▲ 우리 동네의 살구꽃.

새로 만난 살구나무들

 

여러 해 동안 계속 다니던 산책길 주변에도 살구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매화거니 하고 지나쳤었다. 그런데 살구꽃이 피기를 기다려 오며 가며 사진을 찍곤 하던, 어느 교회 앞 살구나무가 어느 날인가 베어지고 말았다. 거참, 그걸 아쉬워하던 어느 날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어느 농가 앞 고목이 매화가 아니라 살구라는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살구는 꽃도 아름답지만, 풍성하게 달리는 황색의 열매도 소담스럽다. 푸른 잎 사이에 고개를 내민 모습을 꽤 자주 사진으로 찍었는데, 사진만 바라봐도 마음이 넉넉해지곤 했다. 그런데 어저께는 동네 카페 뒤란의 언덕바지에서 아직은 어린 살구나무 두 그루를 발견했다. 갓 피워낸 꽃이 싱싱하고 아름다워서 나는 거기 꽤 오래 머무르며 사진을 찍었었다.

▲ 새로 발견한 이웃 동네의 농가 앞에 서 있는 살구나무. 넓은 잎사귀 사이로 익어가는 살구 빛이 탐스럽고 아름답다. 2022년 6월.

살구는 같은 장미과의 사과나 복숭아, 자두 등과는 달리 시장에서 손쉽게 살 수 있는 과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쩌다 맛보게 되는 살구를 나는 꽤 즐기는 편이다. 높지 않은 당도도 좋고, 씻기만 하면 깎을 필요 없이 간단히 씨를 발라서 먹을 수 있는 점도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지난해에 내가 살구 좋아한다는 걸 아는 경산과 의성의 벗들이 살구를 잔뜩 따주어서 집에 돌아와 먹고 나머지는 살구잼을 만들었다. 식빵을 즐겨 먹는 딸애는 잼 가운데 살구잼이 제일 낫다고 했다. 올 초여름에 살구가 나면 작정하고 사들여서 넉넉하게 잼을 만들어볼까 한다.

 

2023. 3.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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