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파업 급식 노동자에게 고교생, 공감과 응원의 대자보 지원
지난 31일 <경향신문>에서 “‘학교서 배운 건 공감과 연대…급식 총파업 응원’ 대자보 붙인 고등학생”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31일 오전 경기도 광명시의 한 고등학교에 파업 노동자를 응원하는 내용의 대자보가 붙었다는 기사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임금 체계 개편과 급식실 노동자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하루 총파업에 들어간 뒤다.
고교생의 급식 노동자 응원 대자보
기사로 미루어 추정해 보면, 급식노동자들이 먼저 파업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하는 대자보를 붙였던 모양이다. 이 학교에 다니는 3학년 학생 2명이 작성해 붙인 대자보에 나오는 ‘대자보’는 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대자보 전문은 아래와 같다.
학교 급식 조리 종사자님들을 비롯한 ○○○ 여러분께
안녕하세요. ○○○입니다.
대자보를 읽고 추스르기 힘든 마음을 함께 얹어봅니다.
3년간 저희가 배운 것은 공감과 연대의 중요성이었습니다.
그 당연한 가치들이 정작 우리와 가장 가까운 급식실에서는 부재했습니다. 대자보에 담긴 투박한 이유들에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조리 종사자님들의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급식에는 이분들의 땀과 눈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대자보에 담긴, 학생들에 대한 존중과 정성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온전한 응원과 공감입니다.
파업을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이라는 말로 규정되지 않았으면, 급식노동자분들의 타는 듯한 여름을 생각하는 시간이 지속되었으면, 급식실에 담긴 우리의 가볍고 웃음 섞인 추억들에서, 표면적인 시간들에서 사라진 본질을 다시금 떠올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는 생계를 위해서 돈을 벌어 본 적도 없고, 급식 일을 해본 적도 없고, 노조에 가입해서 싸워본 적도 없고, 부양할 아들, 딸도 없다.
하지만 아주머니들의 한숨, 눈빛, 울먹임이 나에게 소중한 그 누군가의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2021년 12월, 동호지필 3호 칼럼 <오늘의 노동자가 미래의 노동자들에게>
3년간 배운 건 ‘공감과 연대’의 중요성
이들 학생은 대자보에서 “3년간 저희가 배운 것은 공감과 연대의 중요성이었다”라고 하면서 “당연한 가치들이 정작 우리와 가장 가까운 급식실에는 부재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가 먹는 급식에는 조리 종사자님들의 땀과 눈물이 새겨져 있다”라면서 “학생들에 대한 존중과 정성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온전한 응원과 공감”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또 “파업을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이라는 말로 규정되지 않았으면 한다”라며 급식노동자들의 총파업에 연대와 공감을 촉구했다. 대신에 무더위 속에서도 급식을 준비해야 하는 급식노동자들의 ‘타는 여름’을 생각하고 파업으로 급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학생들이 불편해지는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그런 불편이 ‘본질’을 가리지 않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끝부분에는 급식 노동은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지만, 파업 노동자들의 고통이 누군가의 것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어느 칼럼의 한 단락을 인용했다. 파업으로 인한 불편 이전에 급식노동자들의 아픔을 이해하자는 취지로 보인다.
퇴직 전해인가, 근무하던 학교에서도 급식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함으로써 급식이 이루어지지 않은 날이 있었다. 교원의 노조 건설에 참여하고 해직까지 겪었지만, 당시 나는 그들의 파업에 심정적으로만 동조했을 뿐, 특별히 그들을 응원하거나 지지하지는 않았다.
노동교육 없는 학교, 아이들은 스스로 ‘연대를 실천’했다
오랜 조직 활동에서 해방되어 무심히 지내던 때여서이기도 했지만,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따로 하지 못할 만큼 노동자에 대한 내 인식은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뒷날 나는 교원과 그들의 노동을 의식적으로 나눠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오후 수업에 아이들에게 급식을 못 먹게 되어 불편하냐고 물었었다. 아이들은 교사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었는지 나를 멀거니 바라보았지만, 적잖은 아이들은 무심하게 그렇다고 말했고, 몇몇은 짜증 난다며 불평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고 가볍게 학생들의 급식 받을 권리만큼 그들이 노동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얘기를 하고 말았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또 몇몇은 입을 삐죽이는 걸 씁쓸하게 바라보면서. 아이들이 말한 ‘짜증’은 어떤 형식으로도 노동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얼마든지 보일 수 있는 반응일지 모른다.
2023년 광명의 고교생은 급식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자신들이 받을 불편 대신, 그들에게 연대하고 공감하자는 대자보를 써 붙였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아도 이들은 스스로 ‘불편’을 넘어 사회적 연대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한 것이었다. 학생들이 기특하다는 생각보다는 그들 대부분이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노동교육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학교 교육이 서글펐다.
누군가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누군가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게 불가피하다면, 그것을 사회적 보편적 상식과 비용으로 받아들이는 데가 선진 사회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나라에선 늘 ‘시민의 불편’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 권리의 행사를 ‘인질’ 운운하는 방식으로 위협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가, 시민의 불만 뒤에 숨은 서울시 당국의 탄압에 직면한 상황이 그 명백한 사례다.
사소한 불편을 넘는 ‘사회적 연대’는 언제
2019년 7월 인천 서흥초등학교에서는 소속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며 학부모들의 배려를 구하는 내용의 ‘총파업 안내 가정통신문’을 학부모에게 보냈었다. 가정통신문은 “전국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에서 진행하는 총파업에 본교 교육공무직 선생님들이 참여함을 알려 드린다”라고 밝히면서 이들의 파업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고 비정규직 차별 없는 세상을 바라는 것이라고 부연한 것이다. [관련 글 : ‘가정통신문’ 읽고 눈물, 어떤 내용인가 봤더니]
급식노동자들의 파업 참여가 급식을 먹는 학생과 그 학부모에게 불편을 초래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임금 체계 개편과 급식실 노동자 폐암 문제 대책 구체화를 요구하며 벌이는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하루 파업’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면 학교는,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인천의 초등학교가 보여준 배려와 관용의 태도가 학생과 학부모에게로 확산할 수는 없을까. 어떤 교육을 받은 바 없이 아이들은 ‘공감과 연대’를 주장하며 급식노동자들을 응원하고 지지했다. 파업 안내 가정통신문을 받은 학부모가 아이들에게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을 위해 우리가 얼마쯤 불편해질 수 있다고 가르치는 시간은 언제쯤 현실이 될까.
온 도시와 국가가 멈춰버리는 프랑스의 총파업에서 어떤 언론도 노동자의 파업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공권력이 파업에 개입하는 일도 없으며, 시민들은 ‘지지(Support)’와 ‘연대(Solidaritas)’의 의미로 불편을 감수한다고 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이 전장연 투쟁을 ‘한국 사회의 야만을 멈추는 불복종 저항 시위’라며 지지를 표한 것도 사회적 연대다.
급식노동자들은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 폐암 의심 노동자가 일반인의 35배에 이를 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 그들의 권리를 위해, 학교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가 지지하고 연대를 약속하는 시간은 언제쯤이나 가능하게 될까.
2023. 4.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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