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남은 것은 이제 ‘성찰하는 공민’입니다
오늘 아침에야 3월 달력을 떼어냈습니다. 연금공단에서 보내준 달력입니다. 삼월분을 찢어내자 드러나는, 한글로 쓴 ‘사월’이란 글자가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사월이 무거운 이유는 여럿입니다. 그것은 멀리는 이제 기억에서도 까마득해진 사월혁명, 그때 스러져 간 젊은이들의 피를 떠올리는 시간이고, 가까이는 2014년 4월 어느 날을 아픔과 뉘우침으로 기억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새로 사월을 맞으면서 다행스레 생각하는 것은 박근혜가 ‘떠나는’ 날, 마치 역사적 계시처럼 지난 세 해 동안 심해에 잠겨 있던 세월호가 뭍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바다 깊이 가라앉아 있던 세월호가 떠오른 것은 박근혜가 파면되고 2주일 후였습니다. 마침내 주권자로부터 버림받은 이 우매한 권력은 제 무능과 무책임을 감추기 위해 세월호가 다시 바다 위로 떠 오르는 걸 한사코 막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가 구속, 수감 되면서 봄은 나날이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다. 꽃소식도 예년보다 일러졌다더니 어저께 오른 북봉산 등성이에는 진달래가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진달래 건너 산길 양쪽으로 생강나무도 줄지어 꽃을 피우고 있었지요. 산에 생강나무가 이리 지천인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살구꽃도 알아보지 못하고
남 먼저 피어 오는 봄을 알리던 매화는 이제 시들어가고 더러는 지고 있습니다. 이웃 동네 이면도로를 지나다가 골목 안 공터에서 곱게 핀 매화 한 그루를 만났습니다. 멀리서도 화사하고 고운 자태에 끌려서 차를 세웠습니다.
사진을 몇 장 찍으면서 임자인 듯 공터의 텃밭에 나오는 아낙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매화가 꽃이 아주 깨끗하고 좋습니다.”
“매화가 아니고요, 복숭안데요.”
“아니, 복숭아라고요? …… 확실해요? 아닌 것 같은데요.”
“아, 맞다. 이건 살구네요. 옆엣것이 복숭아.”
꽃을 제대로 알아볼 만한 안목이 없는 처지지만, 뜻밖에 일격을 당한 나는 갑자기 야코가 팍 죽는 기분이었습니다. 이 공터의 임자니 그의 말이 틀릴 리는 없겠지요. 살구라고? 당혹스러워 살구꽃이 어땠는지를 생각해 봤지만, 머릿속이 하얘졌을 뿐입니다.
꽃을 유심히 들여다보는데 무어라 할까, 낭패한 느낌이었습니다. 살구꽃은 매화와 거의 달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오히려 매화보다 더 정돈되어 보였는데, 그게 꽃술이 매화보다 적고 그 길이가 짧아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풍성한 꽃 아래 지난가을의 열매가 쪼그라져 달려 있었습니다.
“참, 그동안 난 비슷하면 전부 매화라고 여겨 왔네. 살군데 매화로 오인된 살구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나중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서야 매화와 살구가 같은 장미과 벚나무 속으로 분류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여기에는 벚나무, 앵두, 배, 사과, 자두, 복숭아까지 포함한다는군요. 글쎄요, 인터넷에도 매화와 살구를 구별하지 못해 몇 해 동안 잘못 알아 온 사람들 이야기가 적지 않았습니다.
검색으로 얻은 구별법은 여러 가지지만 그중 확실한 것은 꽃받침의 모양입니다. 매화의 꽃받침이 꽃을 감싸는 데 반해 살구의 꽃받침은 반대쪽으로 발라당 뒤집힌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매화와 살구를 구별 짓는 데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주변에 눈에 띄는 매화가 있으면 가서 일일이 살펴보고, 매화인지 살구인지를 판별해 보곤 했습니다. 오늘도 산을 오르다 중턱에 활짝 핀 꽃나무가 있어 둘러보고 그게 살구인 걸 확인했지요. 비록 나무에 불과할 뿐입니다만 제 이름을 불러주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성찰하는 시민, ‘공민(公民)’의 자격
살구와 매화를 구별하지 못한 일이야 나중에 바로잡으면 됩니다. 문제는 누구 말마따나 ‘춘향인 줄 알고 뽑았더니 향단이’로 드러났다는 그 사람입니다. 지금도 탄핵과 구속을 반대하고 ‘대통령님’에 목을 매고 있는 ‘일편단심 민들레’야 그렇다 치더라도 적지 않은 기대를 걸고 그를 뽑았던 사람들에게 이 한편의 코미디는 어떻게 해명될 수 있을는지요.
비선 실세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시작되어 탄핵과 구속수감으로 이어진 이 불행한 헌정사의 치욕적 역사는 우리에게 국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민의 자격을 성찰하게 합니다. 헌법에서 정하는 모든 권리와 의무가 있지만, 그걸 제대로 행사하지 못함으로써 야기된 상황과 현실에 대한 성찰 말입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은 주권자의 권리와 의무를 아프게 성찰함으로써 탄생한 새로운 공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민주주의는 다시 출발점에 섰습니다. 다가오는 ‘장미 대선’을 거쳐 그 민주주의가 어떤 꽃을 피울지, 기다리는 마음은 누구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마을 앞 버스 종점 근처에 서 있는 키 큰 수양버들 나무에 새잎이 치렁치렁 늘어졌습니다. 그 연록빛 새잎을 바라보며 ‘난만한 민주주의의 봄’을 그립니다. 겨우내 추위를 견뎌낸 연단(鍊鍛)의 시간을 거친 버들처럼 세월호의 아이들도 새로운 시대의 희망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17. 4.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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