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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마다 한 ‘우주’, 그 탄생을 위한 ‘인고’의 시간 …

by 낮달2018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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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시 ‘열매 몇 개’와 ‘그 꽃’

▲ 찔레에 열매가 잔뜩 달렸다. 아침 산책길에 만나는 찔레다.

열매 몇 개

 

1994년 봄, 중학교 3학년 국어 시간에 아이들에게 고은의 시 ‘열매 몇 개’를 가르쳤다. 1989년 해직되어 5년 만에 복직한 경북 북부의 궁벽한 시골 학교에서였다. 모두 7학급의 단설 중학교였는데, 인근에 있는 공군 전투비행단에서 들려오는 항공기 엔진 소음 피해가 심각했지만, 산비탈에 깃들인 교정이 아름다운 학교였다.

 

그 학교에서 이태 동안 근무하면서 만난 순박한 시골 아이들은 지금도 잘 잊히지 않는다. 5년여 만에 복직하긴 했는데, 쉬 적응하지 못해 헤매던 시기였다. 나는 일과가 끝나면 아이들과 어울려 배구와 농구 등 운동을 하면서 시간을 죽이곤 했다.

 

고은의 ‘열매 몇 개’는 처음 만나는 시였지만, 나는 단박에 이 시가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나, 이호우의 시조 ‘개화(開花)’와 비슷한 계열의 시라는 걸 알았다. 한 생명의 탄생을 비유한 국화꽃의 개화를 미당은 ‘천둥’과 ‘소쩍새’의 울음, 그리고 ‘무서리’와 ‘잠도 오지 않’는 밤 등으로 그려냈다. 이호우는 그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의 신비와 긴장을 놀라운 절제의 시어로 드러냈다. [관련 글 : 이호우·이영도 시인의 생가를 찾아서]

국화꽃이든, 꽃이든 그것은 한갓진 화초가 아니라, 한 생명이고, ‘한 하늘’이다. 그 생명 탄생의 과정을 미당은 봄에서 여름으로 가을까지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그 인고의 과정으로 노래했다. 이호우는 생명 탄생의 경이로운 순간에 ‘바람과 햇볕도 숨을 죽이’고 서정적 자아 역시 ‘아려 눈을 감’는다고 노래한 것이다.

 

고은의 찔레 ‘열매’도 마찬가지다. ‘새빨간 찔레 열매 몇 개 이룩’하기 위하여 ‘지난 여름내’ ‘땡볕 불볕’과 ‘어둠’에 맞섰다. 시련과 고난, 그 인고와의 싸움에서 찔레는 강렬한 심상의 ‘새빨간’ 열매로 변신한 것이다. 국화꽃이 그랬던 것처럼 찔레는 ‘새벽까지 시린 귀뚜라미 울음소리 들으며 여물었’다. 그것은 성숙과 완성을 위한 기다림의 과정이다.

 

찔레는 시골에는 흔하디흔한 꽃이다. 지난봄에는 유달리 찔레꽃이 풍년이었다. 길을 가다가도 시선만 돌리면 찔레꽃 군락이 흔히 눈에 띄었고, 그 하얀 꽃 덤불이 청초했다. 나는 장미보다 찔레를 더 아름답게 여겨서 한때 그 꽃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관련 글 : 장미보다, 다시 찔레꽃]

 

그 꽃

 

‘열매 몇 개’와 함께 떠오르는 시는 ‘그 꽃’이다. 이 3행짜리 시는 그 길이와 무관하게 만만찮은 함의를 전해준다. 정상을 향해 줄달음치는 삶에서는 주변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오르는 게 바빠서 길가의 꽃은 물론, 바위와 나무, 숲도 무심히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러나 그게 눈에 띈 것은 내려오면서다. ‘그 꽃’은 목표를 이루고 난 여유로운 눈길에야 비로소 잡힌 것이다. 그 꽃은 단순히 사물이나 풍경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고단한 삶 속에서 돌아보지 못한 벗이나 이웃이기도 하고, 그들을 위해 비워주어야 했던 마음의 배려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은 매정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깨달았을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 곁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산에서 내려오면서야 간신히 그 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내려오면서나마 그 꽃을 발견하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 2007년 5월 소백산 죽계계곡에서 만난 찔레꽃. 이 사진은 중학교 <생활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다.

이 시는 공교롭게도 내가 찍은 찔레꽃 사진과 관계가 있다. 2007년에 내가 쓴 소백산 죽계계곡 답사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실렸다. 2014년도 중학교 3학년 1학기 <생활 국어> 교과서에 고은의 시 ‘그 꽃’을 실으면서 배경 사진으로 내가 찍은 소백산의 찔레꽃이 쓰인 것이다. [관련 글 : 내가 찍은 사진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마치 소품 같은 이 짧은 시 한 편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비록 삼행시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크고 무겁게 우리네 삶의이면을 응축해 제시한다. 그것은 우리네 인생에서 명멸한 숱한 만남과 헤어짐,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을 포괄하면서 마치 하나의 잠언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2022. 10.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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