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그 ‘만남’과 ‘기다림’의 제의(祭儀)
한가위 연휴가 끝났습니다. 전국의 도로와 수천만 명의 귀성객들이 함께 몸살을 앓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옷자락을 털면서 떠나온 일터로 돌아가겠지요. 9월 하순의 한가위를 지내며 그들은 고단했던 한해살이를 새삼 되돌아보면서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해마다 맞고 보내는 명절이지만, 올 한가위는 제게 퍽이나 남달랐습니다. 따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이번 한가위는 가누기 힘든 ‘설렘’의 모습으로 제게 다가왔던 듯합니다. 그것은 마치 무심한 마음의 여백에 떠오른, 까맣게 잊었다고 믿었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았습니다.
명절이 심드렁하게 여겨지고, 그 연휴의 여유로움이 외려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도 벌써 10년이 가까워져 옵니다. 아마 고향을 떠나면서 어머니를 모셔오고 난 뒤, 홀로된 형수의 작은 집이 더 이상 ‘큰집’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부터였을 것입니다.
부모님과 형님이 살아 계실 적에 우리 가족들은 명절이 다가오면 서둘러 귀향길에 나서곤 했지요. 경주 근방에 살던 때엔 고향에 가자면 무려 네 번이나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야 했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을 업고 걸려야 하는 만만찮은 여정이었지만, 그 시절은 행복했습니다. 돌아가야 할 고향, ‘큰집’이 있었고, 버선발은 아니지만 반가이 맞아주는 가족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올해 한가위, 기다림을 경험하다
그러나 부모님과 형님이 세상을 떠난 이후 우리 가족에게는 '갈 데'가 없어졌습니다. 따로 차례를 모시지 않으니 찾아올 가족도 없는 명절은, 그래도 섭섭하다고 아내가 장만한 부침개 따위나 갖은 나물로 비빈 헛제삿밥에 곁들인 탕국처럼 쓸쓸하고 허전한 날이었습니다.
돌아올 가족에 대한 기다림도, 만남도 준비되지 못한 명절날의 저물녘은 어딘가 기가 죽은 아이들의 두런대는 속삭임으로 쓸쓸하게 깊어져 가곤 했지요.
의례적인 성묫길도 쓸쓸하고 고즈넉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능하면, 고향 마을의 번성한 조 씨나 김 씨 일족들의 요란한 성묫길을 피해 한갓진 시간에 산을 찾지만, 그들이 다녀간 흔적이 역력한 산길로 길어진 제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며 느끼는 것은 꼼짝없는 외로움이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이번 한가위를 앞두고 저는 새삼스레 회복된 설렘의 감정 앞에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연휴가 길어서인가, 아니면 이게 늙는다는 징푠가, 하고 중얼대다가 문득 제 설렘의 까닭이 '기다림'이라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깨우쳤던 것 같습니다.
참, 어이없게도 제가 기다린 건 제대 후 서울로 복학한 아들 녀석이었습니다. 그 애는 일주일 전에 벌초를 돕기 위해 집을 다녀갔습니다. 일주일 만에 되돌아오는 아이를 기다리느라 마음이 설렌다? 저는 근 십여 년 만에 온전히 빠져보는 기다림으로 거짓말처럼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와 함께 그 기다림의 설렘을 나누며, 문득 저는 부모님과 형님이 기다리는 본가로 귀향하는 막내의 자리를, 집 떠난 자식의 귀향을 기다리는 아비의 자리로 바꾸어 낸 스물 몇 해의 세월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세월의 여울마다 엉키고 맺힌, 어버이의 기다림과 조바심을 헤아리며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대학을 나올 때까지 저는 고향을 떠나 도회에서 살았고, 군복무로 역시 세 해 가까이 집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 숱한 시간 속에 저는 성장의 한길만을 달려왔지만, 거기 눈물과 한숨으로 똬리를 튼 것은 부모님의 기다림과 조바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올 한가위를 쇠면서 저는 새삼 이 민족의 명절이 환기해 주는 '가족'과 그 '연대(連帶)'의 의미를 잠깐 생각해 보았습니다. 해마다 한가위와 설날이 가까워져 오면 2천만을 넘는 사람들이 '귀향'을 준비하면서 밤샘 줄을 서고, 길 위에서 십수 시간을 기꺼이 버리는, 이른바 '민족의 대이동'이 벌어집니다.
그 전쟁 같은 귀성길을 거쳐 고향의 삽짝을 밟지만, 그들이 거기 머무는 시간은 기껏해야 이틀이고, 짧으면 한나절에 그칩니다. 차례를 모시고, 성묘를 하고, 친지들과 술잔을 나누고, 다시 도회로 돌아가는 길의 그들 봇짐 속엔 나물이나 과일, 장(醬)류 등속이 무슨 전리품처럼 박혀 있을 터입니다.
단지 차례와 성묘, 그리고 가족들과의 짧은 해후만을 위해 그들이 그 엄청난 전쟁터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였다면 이 '명절 나기'를 위해 족히 수조 원의 비용을 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미치광이나 바보짓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바보도 미치광이도 아닙니다. 그들은 이 귀성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끝나는지를 잘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들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똑같은 절차를 거쳐 또다시 이 귀성 전쟁에 뛰어들 것입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해마다 되풀이되는 민족의 대이동, 이 귀성 전쟁이 차례나 성묘 따위의 형식적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넉넉하게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수천만 명이 똑같은 절차를 밟는 이유
한가위나 설을 쇠기 위해 수천만 명이 고향을 향해 떠나는 원초적 귀소(歸巢)는 이미 그 형식을 넘어 하나의 제의(祭儀)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은 '기다림'과 '만남'이 아닐는지요. '기다림'이란 물론, 떠난 자식들이 돌아오는 날의 마을 어귀나, 고샅길에 머물렀던 눈길에 고스란히 담긴 '어버이들의 마음'입니다.
아기 울음소리 끊긴 지 오랜 시골을 지키는 이는 홀로된 안노인이나 외로움을 나누며 사는 노부부들입니다. 이들에게 도회로 간 자식들이 아이들을 앞세워 돌아오는 명절은 한 해 중 가장 기꺼운 날이지요.
이른 아침부터 마당을 쓸고 어지러이 널린 농기구 따위를 정리하면서 노인들의 눈길은 내내 낮은 담 너머 고샅길과 한길 모롱이에 머물러 있기 마련입니다.
아침부터 저물녘까지 연방 삽짝을 드나드는 노인들의 조바심과는 달리 도회로부터 오는 낯익은 '손님'들은 느긋하기만 합니다. 콩나물시루 같은 시외버스가 아니라 미끈한 몸피의 승용차를 타고 그들은 마치 개선장군처럼 돌아와 집안 곳곳을 들쑤셔 놓습니다.
노인들은 그 부산 속에서 비로소 자신들이 이룬 일가의 규모와 그 현재를 일별하면서 당신들의 '기다림'의 의미를 새삼스레 새기게 되겠지요.
짧은 휴가와 얄팍한 상여금에 투덜대면서도 새끼들을 앞세워 기세 좋게 고향 집의 사립을 들어선 자식들은 마치 개선장군과도 같습니다. 기껏해야 부모님의 내의류와 고기 두어 근, 청주 병 정도밖에 챙기지 못했을지라도 정겨운 사립을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수십 년 시간의 강을 거슬러 유년 시절을 스스럼없이 넘나들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들이 만나는 게 어찌 오래 못 뵈어 쇠약해지신 어버이와 흩어져 살던 형제자매뿐이겠습니까. 그들은 고향 집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를 만나고 마당 가장자리에 걸린 가마솥을 밝히는 따뜻한 장작불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환기해 주는 것은 고즈넉한 '평화'지요. 그 텅 비어 있는 듯한 방심한 평화 속에서 그들은 저잣거리의 고단한 삶에 밴 화연(火煙)과 피 얼룩을 훔치고 닦는지도 모릅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조화로운 만남의 시간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명절이란 '산 자와 죽은 자의 조화로운 만남의 시간'이라고요. 상 앞에 모셔온 조상 앞에 이승의 자손들이 가족과 사랑의 유대를 확인하는 시간이 곧 차례라는 얘기겠지요. 살아생전에 남긴 망자의 목소리와 몸짓을, 당신의 품성과 일화를 추억하면서 그들은 비로소 피를 나눈 가족의 견고한 유대와 동질성을 확인할 것입니다.
일찌감치 아들 녀석은 귀향했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사람이 없어졌는데도 마음은 새로이 허전해집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젠 아들 녀석의 방이 된, 문간방 방문을 반쯤 열고,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부엌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계십니다. 오랜 치매 탓에 아마 바깥의 풍경이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실 터, 저는 자신이 얼마나 불효한 자식이었던가를 재삼 확인하고 자신을 몹시 꾸짖었습니다.
늘 너무 늦게 깨우치는 게 인간의 비극이라고 했던가요. 그렇게 후회하고 자책하면서, 우리는 늙어갑니다. 우리 기다림 앞에 아이들은 성큼 자라고, 그렇게 한 세대가 막을 내릴 것입니다. 아들이 아비가 되고 아비가 다시 할아비가 되는 이 피와 세월의 정직한 순환, '돌아오는 자식'과 '기다리는 아비'의 기다림과 만남의 제의를 지내며 문득 저는 세월 앞에 '인간의 몫'이란 결코 많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일시 그 '피의 둥지'로 귀환했던 자식들은 올 때와는 달리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죽이며 고향을 떠나가게 마련입니다. 일상의 낯익은 적막과 다시 만나는 노인들의 명절 끝은 쓸쓸하기만 합니다. 자식들이 떠난 빈집에 외로이 남겨진 노인들은 늦은 저녁상을 물리고 다시 익숙한 기다림으로 하루를 여밀 것입니다.
노인의 쇠약이 맘에 걸렸든가, 아들 녀석은 외가를 다녀오면서 외할머니의 연세를 물었겠지요. 내일모레면 여든이야……. 순간, 세월의 압도적인 무게를 문득 깨우치고 아이 어른 모두가 잠깐 침묵에 빠졌습니다. 아이 외조부의 유골을 선산에 뿌린 게 지난해 1월이었던 것입니다. 십 년쯤 뒤에, 가정을 이루어 아비가 된 아이는 성년의 어느 길목에서 만난 시간의 중력을 떠올리게 될까요.
하룻밤을 더 묵고 아이는 집을 떠나겠지요. 며칠간 머물렀던 제 방에 고인 아이의 자취는 얼마간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며칠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이가 빠진, '난 자리'는 더 크고 허전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한가위 날 밤을 보내며 저는 아내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건네는 말로 올 '팔월'의 기다림을 닫습니다.
“금방 방학인 걸 뭐……, 또 곧 설이 될 테고……. ”
2007. 9. 26. 낮달
12년 전, 한가위를 앞두고 쓴 글이다. 왜 명절마다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원초적 귀소를 위해 다툼을 벌이는 것일까, 하는 의문의 뿌리를 찾아본 글이다. 그 '만남과 기다림의 제의'가 가족의 견고한 유대와 피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데로 이어지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세월이 하 수상하여 가족의 정의도 그 친연성도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이 원초적 귀소는 이어지고, 우리는 거기서 일용할 양식뿐 아니라,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한국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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