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설 특집으로 <문화방송(MBC)>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노인들만 사는 마을, 8년의 기록>을 다시 시청했다. 무려 8년 전의 프로그램인데, 출연한 노인들의 곡절과 사연들이 훨씬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때 50대였던 내가 60대 중반, 동병상련의 감정을 피할 수 없게 한 나이가 노인들을 바라보는 내 눈길을 훨씬 더 부드럽게 바꾸어놓은 것이다.
단순히 노화나 죽음에 대한 개인적 두려움이나 연민만은 아니다. 시간이, 더 본질적인 인간의 생로병사를 나의 문제로 돌아볼 수 있게 해 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의 일부라는 사실도 접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8년, 그들 중 또 몇몇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얼굴을 비친 80대 이상의 노인들은 일찌감치 세상을 떴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내 주변의 친지, 후배들 가운데도 몇몇이 서둘러 세상을 떠났다. 오는 순서와 무관하게 가는 순서는 따로 없다는 우스개가 우스개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노인들의 이야기를 공감의 눈으로 지켜보면서 어떻게 늙어갈까를 잠깐 고민해 본다.
2019. 9. 2.
설 특집 MBC 스페셜 <노인들만 사는 마을, 8년의 기록> 시청기
아이들이 꺼리고 피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흥미롭게 들여다보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인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게 뜻밖의 즐거움이라는 걸 깨닫는 것과 노화의 징후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에게로 찾아온다.
농촌 마을과 거기 사는 농민들의 삶을 가공해서 보여주는 KBS의 <6시 내 고향>과 같은 프로그램도 진지하게 시청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이의 힘’이다. 중뿔날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과 거기 등장하는 사람들의 심상한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은 ‘삶이란 구태여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는 깨달음 덕분인 것이다.
전남 고흥 예동마을 노인들의 이야기
우리 내외는 일요일 이른 아침에 방송되는 MBC의 노인 대상 프로그램 <늘 푸른 인생>을 빼놓지 않고 시청하곤 한다. 사회자 이상용이 시골 동네를 찾아가 거기 사는 노인들의 삶과 애환을 아주 맛깔나게 풀어내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깊은 동질감이다.
<늘 푸른 인생>에서 아프면서도 따뜻하게 다가오는 것은 고단하고 기구한 삶을 운명처럼 지고 살아온 안노인들의 이야기다. 모진 가난과 시집살이, 술과 도박, 난봉에 빠진 남편……, 그들의 삶은 이 땅의 고단한 가족사며, 그 질곡을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 그 자체다. 이제 늙고 기운 빠진 남편들은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고 다소곳이 꼬리를 내린다. 어쩌면 슬픈 이야긴데도 폭소가 터져 나오는 것은 그런 ‘부부의 역전’의 주는 카타르시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설 특집 MBC 스페셜 <노인들만 사는 마을, 8년의 기록>을 우리 내외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한 것은 그러니까 지극히 당연한 일인 셈이다. 이 프로그램은 2004년 당시, 37분의 노인이 살고 있었던 전남 고흥군 두원면 예동마을의 이야기이다.
‘여든을 넘기면 남의 나이를 먹는다’고 하는 이 마을에는 80이 넘어 ‘덤 인생’을 살아가는 노인이 열여섯 분이나 된다. 65세 이상이 35명이고 최연소는 58세니 ‘노인들만 사는 마을’이라는 이름이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 마을 노인들의 삶과 죽음을 기록하는 데 든 시간이 2011년까지 8년이다.
널찍한 마을의 고샅길을 오가는 안노인들은 하나같이 허리가 꼬부라졌고 지팡이를 짚거나 유모차를 끌고 다닌다. 바깥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7, 80을 훌쩍 넘겨도 이들은 여전히 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바깥 노인들에 비기면 안노인들의 건강이 훨씬 좋아 보인다. 남자들처럼 술 담배로 찌들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이 노인들이 산 ‘세월의 더께’는 이들이 각각 낫으로, 또는 가위로 잘라내는 발톱으로 드러난다. 손톱깎이의 날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굵고 두툼해진 발톱, 누렇게 변색해 하늘로 치오르는 발톱은 그들이 살아온 고단한 삶의 표지처럼 보인다.
“아들딸 키워서 남에게 줘 버리고…”
겉으로는 다정한 부부처럼 보이긴 하지만, 안노인들 가운데 다시 태어나 지금 바깥 노인과 살겠다는 이는 아무도 없다. 심지어 죽어서도 같은 골짜기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우기는 할머니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부부생활을 받아들이고 산다. 젊어서 난봉꾼이었다가 늙고 병들어 본처에게 돌아온 남편도 할머니는 어린 자식 돌보듯 보살피며 산다. 그게 삶이라는 걸 그들도 알고 우리도 안다.
65년 수절과부인 복순 할머니의 삶은 기구하다 못해 보는 이들은 죄스럽게 만든다. 스무 살에 만난 남편은 3년을 같이 살았는데 논 서 마지기를 벌어오겠다고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애비 없는 남매를 눈물로 키운 이 할머니의 삶을 하늘인들 헤아려주었으랴.
“애기들 버리고 가라 하데. 내가 버리고 가면 언덕 밑에서 살지, 동냥치가 될지 누가 알아, 자식들이. 그래서 내가 그것들 보고 그냥 살았지.”
“나 죽으면 2층도 말고 3층도 말고 4층에 5층 상여에 날 띄워라.”
고단했던 이승의 삶을 마감하는 이 할머니의 소망은 고작 손자에게 5층 꽃상여를 부탁하는 호사일 뿐이다. 죽기 전에 할머니는 22살에 헤어진 남편을 꼭 한번 만나고 싶다. 그러나 이 할머니의 소망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 사진 한 장 없어 얼굴도 잊어버린 남편, 행여 저승에서 만나도 알아볼 수는 있을까, 할머니는 그것을 근심한다. 할머니가 눈물과 한숨으로 보낸 65년은 얼마나 징그러운 시간이었을까.
몸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대순 할머니. ‘쥐약이라도 산다면 먹을 거’라는 이 할머니는 ‘이 좋은 세상에 죽기가 제일 무섭다.’며 ‘청춘을 돌려다오’ 노래를 부르다 눈물짓는데 이 할머니의 슬픔은 공연히 시청자에게 전염되는 것 같다.
“딸은 낳아서 키워서 남의 아들에게 줘 버리고 아들은 키워서 남의 딸에게 줬다 싶어서 하냥 슬프지.”
그렇게 말하는 할머니 앞에서 우리는, 이 땅의 모든 딸과 아들은 죄인이 된다. 나는 며느리에게 주어버린 아들이고 아내는 사위에게 줘 버린 딸이 아닌가 말이다. ‘새내끼(새끼) 백발은 쓸 데 있어도 사람 백발은 어디에 쓰냐’고 한탄하던 할머니의 삶에 대한 애착과 슬픔은 온갖 가식을 벗은 인간의 순수한 욕망이 아니겠는가.
65년 수절 할머니의 소망, 5층 꽃상여
만발한 벚꽃길에서 벚꽃 한 가지를 꺾어 든 할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천생 여인을 본다. 늙고 병들고 허리가 굽어도 그들은 여인인 것이다. 첫날밤에 언뜻 본 남편의 얼굴, 다음날 시숙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는 남정네들 가운데 누가 내 서방이냐고 묻던 새색시들이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 그게 이 땅의 역사였겠다.
노인들이라 해도 인간적 욕망은 예외가 아니다. 마을회관(동각)에 모여든 할아버지들의 은밀한 대화는 그런 내심을 은근히 드러낸다. ‘백 살 먹어도 짚 토막 하나 들 기운만 있으면 할멈한테 가고 싶다’는 할아버지들은 그러나 아내의 콧바람이 싫으니 ‘마음은 소용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죽기가 두렵다’던 대순 할머니는 나락을 널다 넘어져 다쳐 입원하고 엉치에다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는다. 그러나 천장에서 헛것을 보는 등 예후가 좋지 않았던 할머니는 2005년 12월 ‘이 좋은 세상’을 떠난다. 향년 여든셋. 그이는 가장 먼저 예동마을에서 세상을 떠난 노인이 되었다.
그이를 보내는 하얀 꽃상여는 슬펐다. 삶과 죽음에 익숙한 노인들은 무심히 할머니를 전송했고 마을에는 상여를 멜 사람이 없어 외지사람이 멘 상여에 실려 할머니는 마을을 떠났다. 할머니의 눈물과 슬픔과 조바심은 까닭이 있었던가.
2010년 9월 다시 찾아온 제작진 앞에 마을 사람들은 ‘노인들 3분의 1은 가셨다’고 한다. ‘짚 토막’ 이야기를 하신 할아버지도 2004년에 최고령이었던 할머니도 저세상으로 가시고 65년 수절과부 복순 할머니가 최고령이 되었다.
그러나 죽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사람들의 삶은 이어진다. ‘옴마 다리야’를 연발하면서도 경자 할머니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고, 금실 좋은 오복 할아버지 내외분의 넉넉한 노후도 아름답게 이어진다. ‘세상천지에 뜨겁게 불붙는 사랑만 사랑이겠느냐’, ‘오복 할아버지의 밥상엔 할머니의 70년 사랑이 있다’고 해설자는 말한다. 맞다. 그 사랑은 젊은이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다. 그런 사랑이 있다는 걸 젊은이들이 알기나 하랴.
자신을 ‘멍청이’라고 욕하는 남편에게 화가 날 대로 난 야심 할머니의 반란 앞에 할아버지는 눈치를 보면서 꼬리를 사린다. 평생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할머니의 자존심은 이 노년에야 비로소 자신을 회복한 것일까. 반드시 사랑만은 아닌 노인들의 사랑싸움은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노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틀니에 의지해 산다. 이 틀니를 노인들은 ‘남의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틀니는 노인들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음식을 씹어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복 가운데 하나를 잃는 것이니 말이다.
노인들만 사는 마을이다 보니 ‘궁즉통’도 있다. 노인들만 살아 제사를 치르기가 녹록지 않자 일 년에 한 번, 음력 10월 20일에 지내는 마을 기제사로 합친 것이다. 현재 제당에는 106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고 했다. 노인들의 지혜는 누 백 년에 걸친 제례의 형식도 넘어버린 것이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부분은 ‘다은이’다. 다은이(3)는 지난 2006년에 식솔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채주 씨의 둘째 손녀다. 예동마을의 최연소 주민인 이 아이는 예동마을에서 26년 만에 태어난 ‘귀하신 몸’이다. 할아버지에게 또박또박 경어를 쓰는 이 귀여운 아이는 보는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마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 아이들을 자기 손주처럼 예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이들은 이 노인들만 사는 마을의 축복이고 선물이다. 노인들이 이 마을의 현재라면, 고은이, 다은이 자매는 이 마을의 희망, 미래가 될 수는 있을까.
다시 새해, 최고령 복순 할머니는 아직도 이 겨울을 잘 견디고 계신다. 다리를 절면서 유모차를 끌고 동각으로 온 할머니에게 다른 할머니들은 백수를 축수한다. 그리고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면서 ‘닷새만 아프고 죽으라’는 덕담을 나누며 팥죽을 쑤어 나누어 먹는다.
이 거역할 수 없는 '세대의 순환'
오후 1시 반이 넘자, 할머니들은 페트병 하나를 베고 달콤한 오수에 빠지고 바깥에는 눈발이 휘날린다. 해설자는 ‘이 천국에서 할머니들은 몇 번의 겨울을 날 수 있을까’라고 물으며 프로그램은 막을 내린다. 복순 할머니와 오복 할아버지 내외, 그리고 경자, 야심 할머니가 맞이할 새봄은 아직도 저만큼 멀다.
우리 내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랄 것도 없이 시골에 계신 장모님을 생각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린 것이다. 이 노인들의 이야기가 어찌 예동마을만의 이야기겠는가. 젊은이는 떠나고 노인만 남은 이 땅 시골 마을이 무릇 얼마겠는가.
노인들의 고달픈 삶의 역정을 엿보면서 우리는 그들의 고단했던 과거가 우리의 현재를 지었다는 걸, 우리의 현재가 다은이의 미래를 빚는다는 이 거역할 수 없는 세대의 순환을 확인한다. 한 세대의 황혼은 다음 세대의 아침을 깨우면서 깊어가는 것, 노인들의 굽은 어깨, 깊게 팬 주름살 위로 아로새겨지는 것은 결국 ‘인간의 역사’이다.
2011. 2. 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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