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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다시 읽기

‘아비의 아들’에서 다시 ‘아들의 아비’로

by 낮달2018 2023.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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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과 세대의 순환 앞에서

 

마지막 겨울방학을 마치고 아들 녀석이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졸업반, 사회에 첫발을 디디는 시기가 하필이면 이렇게 어려운 때냐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항변하던 녀석은 다소 심란한 얼굴로 집을 떠났다.

 

군 복무를 마쳤고, 졸업반이 되었으니 더는 ‘품 안의 새’가 아니다.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일찌감치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부모의 품을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위의 딸애도 그렇고 녀석도 마찬가지다. 애당초 공부로 스트레스를 준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저들의 고교 시절은 결코 가볍지 않았을 터이다.

 

아들은 아비를 닮았다

 

녀석은 외모부터 나를 빼닮았다. 못난 점만 골라 닮은 듯해 속이 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라는 위인의 종족보존이 성공한 경우니 어쩌겠는가. 외모만이 아니라, 속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심약한 데다 소심한 것까지 그대로다.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쑥스러워하다 보니 사람과의 관계가 남처럼 엽렵하지 못하고 어수룩한 것까지 어릴 적의 나를 그대로 닮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녀석을 목욕탕에 데리고 다녔다. 처음에는 사우나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더니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주 익숙하게 아비를 따라 사우나에서 땀을 뺀다. 사우나의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땀을 내면서 부자는 정겹게 대화를 나누곤 한다. 물론 교대로 등을 밀어주는 차례도 빠뜨릴 수 없다.

 

평균적인 의미에서라면 나도 우리 아이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안다. 녀석은 아주 맑고 순했다. 다섯 살 때 유아원에 보냈더니 몇 날 며칠을 유아원 앞에서 망설이다가 울며 돌아온 숙맥이었다. 아이의 홀로서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심약해서 낯선 데에 쉬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애는 초등학교 세 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그게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따위는 내 고려 속에 없었던 듯하다. 물론 아이가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았던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내가 집안의 크고 작은 결정을 순전히 자기 위주로 결정한 편이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그런 부분에 대해 불평을 가졌던 것 같지도 않다. 나는 으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을 아이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장의 길목에서 겪어야 했던 잦은 전학이 어찌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랴.

 

나는 아이들에게 매를 대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아이들을 길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내 기분이고 정작 아이들의 느낌은 다를 수 있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은 날 어려워했다. 학교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엄하게 구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날 두려워했다. 아이들이 저희 엄마와 달리 일찌감치 내게 존댓말을 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 대학졸업식에서의 아버지. 아버지께선 이듬해 돌아가셨다.

한번은 아들 녀석에게 빈 병을 가게에 가져다주라고 했는데, 회수금 받아오는 게 자신이 없어 우물쭈물하는 녀석을 바보 같은 녀석이라며 꾸짖은 적이 있었다. 아이는 눈물을 찔끔거리고 말았는데, 뒷날 저희 엄마에게 그날 입은 상처를 고백하였던 모양이었다.

 

무어 그만 일로……, 하고 나는 눙치긴 했지만, 속이 뜨끔했다. 아, 녀석은 그걸 그렇게 받아들였구나……. 이제 자랄 만큼 자란 아이는 저희 엄마더러 어릴 적에 아버지가 몹시 두려웠다는 얘길 편하게 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까 고심하기도 했다고 한다. 글쎄, 내가 그런 잔소리꾼이었던가.

 

아마 소심하고 심약했던 탓이었으리라. 녀석은 자신에 대한 아비의 평가가 늘 두려웠던 게다. 나는 아이가 스쳐온 성장의 길목에 내가 아비라는 이름의 완고한 판관이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아이에게는 ‘억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우울한 기분을 금하지 못했다.

 

요즘은 딸애는 물론이거니와 녀석은 나와 스스럼없이 농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여전히 같이 목욕탕 사우나에 들어앉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눈다. 귀향할 때마다 시간을 내서 아이와 목욕탕에 가는 게 무척 기다려지는 일이 되었다. 벌거벗고 나란히 앉아서 나누는 대화 속에 우리는 피의 동질성 같은 것을 막연히 느끼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버지가 두려웠다는 아들의 고백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물론 목욕탕 사우나에서였다. 나도 그랬다. 할아버지가 너무 두려웠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을 거야. 한번은 무슨 일인가로 호되게 꾸중을 들었는데, 너무 놀라고 겁이 난 나머지 오줌을 지리기도 했으니까…….

 

후덕하신 선친의 기억

 

나는 선친을 이 세상에서 가장 후덕한 사람의 전형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 다정다감한, 돌아가시는 날까지 가족을 위한 배려,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으셨던 분이 아버지였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외출에서 돌아오시면 아버지께선 어머니께 외출의 전 과정을 상세하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구성지게 들려주시곤 했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어릴 적엔 왜 그리 두려웠던가. 부모님께서 신작로 가의 방앗간을 운영하게 되면서 나는 집에 남아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었는데, 어쩌다 만나 뵙는 아버지를 마치 낯선 나라의 손님처럼 느꼈던 것 같다. 어머닌 언제나 나를 다정하게 품어 주었지만,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애정 표현을 들어본 기억은 없다. 그것은 그 시절의 풍속이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받은 따뜻한 사랑의 기억이 하나 있다.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으리라. 나는 그 즈음 잘 다듬어진 팽이가 몹시 갖고 싶었으나 학교 앞 초라한 전방(廛房)에선 그놈을 구할 수 없었다. 혼자서 낑낑대며 적당한 나무로 깎으려 해보았으나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를 지켜보던 당신께서는 목수의 능숙한 솜씨로 팽이를 깎아 어린 아들에게 쥐여주셨다. 이때, 나는 기쁨에 겨워 ‘아부지가 최고’라는 탄성을 질렀는데 어머니는 오래도록 그 일을 두고 한 시절 부자간의 정겨운 순간으로 추억하곤 하셨다.

▲ 얼음 위를 지치는 썰매. 요즘은 이런 물건을 인터넷에서도 판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였던 것 같다. 나는 문학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다소 불량스러운 고교 시절을 겪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무소불위의 거인이 아니라, 왜소하고 무력한 가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나브로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맏형님이 지질러 놓은 빚을 받으러 집에 쳐들어온 젊은 빚쟁이로부터 수모에 가까운 항의를 무력하게 받던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까까머리 중학교 1학년짜리 아들은 문설주만 뻑뻑 문지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느 겨울날이었던가. 돌아가신 할머니 3년 상을 나던 때였다. 혹독한 추위에도 아버지는 빈소 앞, 대청에서 도포 자락을 날리며 호곡하셨고, 아버지 눈에서 흐른 눈물이 하얗게 센 수염에 고드름으로 달리는 것을 나는 우울하게 지켜보기도 했다. 그때 아버지께서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지금도 가슴 아리는 그 저녁, 아버지의 오열을 기억한다.

 

철이 들면서 나는 아버지께서 얼마나 따뜻한 인간성의 소유자인지를, 가족과의 단란한 삶에 대한 당신의 꿈이 얼마나 소박하고 정겨운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빙그레 웃고 있는 당신의 미소 뒤에 가족에 대한 사랑이 오롯이 쟁여져 있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바람은 그치지 않고,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이 임용된 이태 후 가을에 세상을 떠나셨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다가 막내가 왔다는 형님의 전언에 눈을 크게 부릅떴다 끝내 아버지께선 숨을 놓으셨다. 1985년, 을축(乙丑) 팔월 스무이레였다. 아버지의 육신이 산으로 향하던 날, 나는 상여 뒤를 따르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못내 흐느꼈다.

 

그날 세 살배기 딸애가 역시 아버지의 솜씨였던 녹색의 페인트칠을 한 대문을 붙잡고 눈이 빨개지도록 울어대던 모습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날은 내가 낳은 당신 손자의 백일이었다. 그러나 딸애와 마찬가지로 녀석에게 할아버지의 기억은 한 올도 남아 있지 않다.

 

조부의 출상 덕택에 백일을 빈손으로 넘긴 아들 녀석의 타고난 흰 살결, 여름이 들면서부터 땀으로 속옷을 적셔내는 체질과 너그러운 성품은 꼼짝없이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나는 가끔 아들의 모습에서 누대에 걸친 피의 순환과 그 경이를 확인하곤 한다.

 

피와 세대의 순환 앞에서

▲ 선친의 필적. 왼쪽은 필사한 <추풍감별곡> , 오른쪽은 <제문요초(祭文要抄)>의 한 부분이다.

어린 아들에게 팽이를 만들어 주신 아버지의 피가 내 몸속에 연면히 흐르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해직 시절, 여러 가지로 조건이 나빴지만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들과 산으로 다녔고, 사진을 찍어주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

 

봄이면 냇가로 데리고 가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게 하였고 여름이면 물 맑은 계곡을 찾아 야영하면서 단란한 가족끼리의 시간을 꾸렸다. 겨울에는 집안의 자투리 나무와 철사 따위로 썰매를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아이들은 내가 만들어 준 썰매를 지치던 어느 겨울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방학을 마치고 서울로 떠나는 아들을 향해 나는 군말을 삼갔다. 선친의 모습을 문득 떠올렸고 문득 아이가 다 자랐다는 걸 환기한 탓이다. 아버지께선 자식들에게 매우 방임적이셨다. 조심하라거나, 자중하라는 말씀만으로 당부를 마치셨던 것이다. 그런 당신의 말씀을 참견으로 알아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던 내 어리석은 젊음이 새삼 부끄럽게 떠오른다.

 

녀석은 안쓰러워하는 부모를 향해, 걱정하지 마시라, 알아서 하겠다고 선선히 위로하곤 집을 떠났다. 30여 년 전에 내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두려워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된, 아들의 아비가 된 자신의 모습을 마치 타인처럼 바라본다.

 

거기 세월 속에 명멸했던 우리들 삶과 세대의 순환 앞에 나의 초상이 있다. 선친께서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우리는 ‘서서 자는 말’이다. 고통과 두려움을 넘어 아이들이 어른이 되듯, 우리는 아들의 아비가 되고, 다시 왜소하고 무력한 존재로 스러지려 한다.

 

나이 들면서 자식들 중에 내가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 한다. 친지들이나 고향 사람들은 내 모습에서 가장 뚜렷하게 아버지를 기억하곤 하는 것이다. 나이 들면서 아비의 머리숱을 닮을까를 저어하는 아들의 엄살을 지켜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한 30년쯤 후에 지인들은 아이의 모습에서 어김없이 나를 기억해 낼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세월을 뛰어넘는 피의 순환일 터이다.

 

 

2009. 4. 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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