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되돌아보는 2019년 가을 ‘단풍’

by 낮달2018 2022. 8. 2.
728x90

[지리산자락 지각 답사기] ⑤ 이르다고 발길 돌린 피아골 단풍

*PC에서는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2019년 10월 31일에 찾은 피아골

 

피아골은 2019년 10월 31일, 여행 첫날의 첫 방문지였다. 우리는 연곡사를 거쳐 직전마을에 이르는 길을 오르면서 길옆 계곡의 단풍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화염’으로까지 비유되는 지리산 단풍을 상상하면서 잔뜩 기대하고 온 나에게 이제 막 단풍으로 물드는 계곡의 가을은 좀 마뜩잖았다.

 

상기도 푸른빛을 마저 벗지 못한 나무들 가운데 드문드문 눈에 띄는 단풍나무들이 연출하는 붉은 점경(點景)을 투덜대면서 나는 아내에게, 때를 맞추지 못했다고, 다음에 오자며 발길을 돌려버렸다. 정작 뒷날의 기약이란 흔히 공수표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지리산은 높을 뿐 아니라 ‘깊은 산’이다. 지리산이 깊다는 것은 산아래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고만고만한 산과 달리 산중에 들면 세상과 까마득히 멀어지는 지리산을 겪고 나서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이 나타나는 능선과 고개, 찾으면 찾을수록 멀어지는 지리산을 나는 첫 산행에서 깨달았었다.

 

‘깊은 산’ 지리산 골짜기마다 밴 아픈 현대사

 

젊을 때 천왕봉을 몇 차례 올랐다고 해서 지리산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지리산은 인간의 알량한 이성과 오감을 넘어 존재하는 산이다. 비록 말 없는 산이지만, 지리산은 그 산자락에서 숨져간 의병과 빨치산, 그리고 남북의 병사들을 안고 있는 산이다. 지리산이 지켜본 것은 바로 이 땅의 고단한 현대사였다.

 

내가 지리산에 끌리는 것은 지리산이 이처럼 우리 현대사의 상처까지도 안고 있는 산인 까닭이다. 지리산에 오르면 길섶에 난 산죽 무리에도 마음이 아려오는 것도 지리산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빨치산과 병사들을 떠올려 주어서다. 분단 반세기를 넘긴지 오래지만, 지리산자락엔 분단과 전쟁의 상처와 그 자취가 여전히 남아 있다.

 

구례 출신의 시인 이시영(1949~ ) 선생의 시 ‘지리산’은 ‘산 사내’로 표현된 빨치산과 누이의 사랑을 그리고 있으나 그 사랑은 잔혹한 비극으로 끝난다. 사내는 대창에 찔려 죽고, 아버지는 대밭에 숨고, 그리고 집은 불탄다. 그리고 누이는 이웃 동네에 내려와 몸을 푼다.

 

분단과 전쟁이 마을의 평화를 앗아갔고, 이념(이데올로기)이 마을을 공포와 억압으로 몰아넣는다. 그 와중에서도 새 생명은 태어나고, 그리고 이 땅의 삶은 이어졌다. 지리산은 전쟁과 이념이 할퀴고 간 오래된 상처를 담담하게 응시하고 있다.

 

우리가 잠깐 지나친 단풍은 골짜기의 끝이었을 뿐, 피아골은 훨씬 위에 있는 골짜기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삼 년이나 지나서였다. 우리가 둘러본 곳은 남명(南冥) 선생이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고서 단풍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한,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다’라는 의미로 ‘삼홍(三紅)’으로 불리는 단풍의 피아골에 미치지 못한 곳이었다.

 

흰 구름 맑은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가을에 붉은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천공(天公)이 나를 위해 뫼 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의 한시 ‘삼홍소(三紅沼)’의 번역 시라고 너도나도 인용하는 시다. 원문을 찾을까 싶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원문(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이라는 시는 나도는 해석과는 좀 많이 다르다. 

 

秋日與友登智異(추일여우등지리)   가을날 벗과 함께 지리산에 오르니

山紅水紅人心紅(산홍수홍인심홍)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 마음도 붉다.

昨來春今過滿秋(작래춘금과만추)   어제 봄이 오는가 했더니 오늘 깊은 가을이 지나가네.

何時何處想如夢(하시하처상여몽)   언제 어디서 꿈처럼 또 생각이 날까,

‘산, 물, 사람’도 붉다는 부분은 칠언절구의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 ‘산홍(山紅), 수홍(水紅)’에 이어 ‘인심홍(人心紅)’이라 썼다. ‘사람도 붉다’보다는 ‘사람 마음도 붉다’가 울림이 더 좋다.

 

애당초 단풍을 찾아 나설 때마다 그 절정기에 맞추어 단풍을 찾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나는 또 이른 단풍에 실망해 돌아서곤 했다. 첫 방문에 피아골을 만나지 못했지만, 다행히 2년 후인 2021년에 가족들과 함께 찾은 피아골에서 절정에 가까운 단풍을 만날 수 있었다. [관련 글 : 절정 직전의 피아골 단풍’, 그 자체로 완벽한 풍경]

 

올 가을 단풍은 언제 어디서 만나면 좋을까. 

 

2022. 8. 2.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