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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 나말여초에 선종의 수선(修禪) 도량으로 이름 높았다

by 낮달2018 2022.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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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자락 지각 답사기] 지리산 연곡사(鷰谷寺,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PC에서는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지리산 연곡사는 6.25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폐사된 뒤 1960년대부터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를 대여섯 번쯤 읽었다. 주요 인물들 간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이른바 ‘썰’로 풀 수 있을 정도다. 하동의 최참판댁을 지나는 길마다 들르곤 하는 것도 <토지>의 인물들이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감으로 내게 살아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토지>에서 전개되는 서사의 배경 가운데 연곡사(鷰谷寺)가 있다. 최참판댁의 여장부 윤씨 부인이 요절한 남편의 명복을 빌러 기도드리러 간 절로 우관 선사가 주지다. 윤씨는 형인 우관의 절에 휴양차 와 있던 동학 접주 김개주에게 겁탈당해 김환(구천)을 낳는다. 반세기에 걸친 최참판댁 가족사가 비롯하는 배경인데, 어쩌다 보니 나는 이 연곡사에 가보지 못했다.

 

피아골 단풍을 보러 간다고 나서면서 지도를 살피다가 연곡사를 발견하고 나는 무릎을 쳤다. 피아골 입구에 있으니 연곡사에 들렀다가 피아골로 들어간다. 그건 최상의 여정이 아닌가 말이다.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774번지 연곡사에 주차장에 닿은 건 10월 31일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연곡사 일주문. 피아골 전투로 불타 폐사된 후, 1995년에 세웠다.
▲연곡사 천왕문.
▲연곡사 천왕문의 사천왕상.

인근 화엄사의 말사인 연곡사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남북국시대(698~926) 통일신라 승려 연기가 창건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연곡사 누리집에는 연곡사 사적에 따라 백제 성왕 22년(544) 인도의 고승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기가 인도인이 아니라, 경덕왕 때의 신라 승려였다는 주장도 있다.)

 

같은 해에 화엄사도 창건한 연기가 절을 지을 때 큰 연못이 있어 물이 소용돌이치며 제비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연곡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었다. 통일신라 말과 고려 초기 선종(禪宗)의 수선(修禪) 도량으로 이름이 높았고 도선국사, 현각선사 등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다.

 

임진왜란 중인 1598년 4월 왜병이 불을 질러 전소된 뒤 인조 5년(1627)에 소요대사 태능(太能, 1562∼1649)이 중창하였다. 영조 2117(45년)에는 연곡사가 밤나무로 만드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 율목주재봉산(栗木主材封山)이 되어 연곡사 주지가 도제조가 되었다.

▲연곡사 경내에는 피아골 순국 위령비도 있다.

이후 연곡사는 밤나무의 남용으로 사세가 기울어 승려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절이 폐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1907년 의병장 고광순(1848~1907)이 당시 광양만에 주둔한 일본 정규군을 격퇴하고자 의병을 일으켜 연곡사로 집결시켰다. 이때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의 기습으로 고광순과 의병들은 모두 순절하였고, 절은 왜병들이 불태웠다.

 

그 뒤 1942년에 중건하였으나 6·25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된 뒤로 사찰분규와 교통 사정 때문에 재흥(再興)을 보지 못하다가 1965년에 소규모 대웅전을 요사채를 겸하여 세웠고, 1981년에 새 대웅전을 준공하였다. 이어서 1983년에 대적광전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94년에는 요사를 증축하였다. 1995년에는 일주문을 세웠고, 1996년에는 종각과 수각(水閣)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부분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고하였으나, 좀 헛갈린다. 대웅전과 대적광전을 다 갖춘 절집 같으나 사실 지금 연곡사에 대웅전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연곡사로 전화해서 확인해 본 바, 대웅전은 요사채로 쓰고, 대적광전에 부처님을 모셨다는 것이다. 원래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인데, 두 전각이 동시에 있는 절은 없는 듯하다. 따라서 연곡사에는 지금 대웅전 대신 대적광전만 있다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 절집의 모든 전각은 모두 20세기에 지은 것이다. 한눈에 들어오는 절의 전경에 전혀 고풍스럽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가 보았다. 절집은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지어졌다. 길가 주차장에 붙은 일주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사천왕문에 이르고, 다시 계단을 오르면 삼홍루(三紅樓)다. 다시 계단을 오르면 대적광전에 이르는 구조다. 계단의 양옆과 전각 앞뜰에는 빨강, 노랑, 보랏빛 국화가 탐스러웠다.

▲연곡사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이다.

모든 전각이 20세기에 지어졌다고 해서 이 절을 시뻐해선 안 된다. 이 절에는 동승탑(東僧塔)과 북승탑(北僧塔) 등 국보가 둘, 삼층석탑과 현각선사탑비(玄覺禪師塔碑), 동승탑비(東僧塔碑), 소요대사탑(逍遙大師塔) 등 보물이 넷이나 된다. 이 정도 규모의 절집에 국가 지정문화재가 6점이나 있다는 것은 이 절을 허투루 봐서 안 되는 이유로 충분하다.

▲동승탑(국보). 고려 초기에 만든 도선국사의 승탑으로 추정된다. ⓒ 연곡사 누리집
▲동승탑비(보물). 몸돌은 없고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연곡사 누리집

고려 초기에 만든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승탑으로 추정되는 동승탑은 대적광전에서 북동쪽 10m 내외의 산기슭에 있다. 일제강점기 때 동경대학으로 옮겨 가려 몇 달간 연구하였지만, 산길로는 운반할 수 없어 포기했다고 한다. 다른 승탑보다 기단부가 높고 세부적인 조각 수법은 치밀하다. 동승탑비는 동승탑 남서쪽에 있는데, 현재 몸돌[비신(碑身)]은 없고 받침돌[귀부(龜趺)]과 머릿돌[이수(螭首)]만이 남아 있다.

 

동승탑에서 150m 정도 북쪽에 있는 북승탑은 앞선 시기에 만든 동승탑을 모범으로 그 양식을 충실히 이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중대석의 받침처럼 균형미를 추구한 것으로 평가한다. 고려 초기에 건립되었다고 보이며, 현각선사 승탑으로 추정된다.

▲북승탑(국보). 고려 초기에 건립한 현각선사 승탑으로 추정한다.ⓒ 연곡사 누리집

대웅전 남쪽의 길옆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이 탑이 있는 곳까지 절집의 전각이 있었다고 보면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1967년 해체, 보수할 때 하층 기단부에서 높이 23.5㎝, 어깨너비 4.5㎝의 금동여래입상 1구가 발견되었다.

 

절의 서북쪽에 있는 소요대사탑은 문비(門扉)에 “소요대사지탑(逍遙大師之塔) / 순치육년경인”이라는 두 줄의 음각 명문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 소요대사는 백양사에서 계를 받고 부휴대사 선수(善修, 1543~1615)에게 경전을 배웠으며,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에게서 청전본원(淸淨本源)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소요대사는 순치 5년(1649)에 입멸하였는데 그다음 해에 이 승탑을 세웠다.

▲소요대사탑(보물). 소요대사는 임란 후 연곡사를 중창한 이다.
▲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연곡사 삼층석탑(보물)
▲현각선사 탑비(보물). 임란 때 비의 몸돌이 없어져 현재는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고려 전기의 승려 현각선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현각선사 탑비는 임진왜란 당시 비의 몸돌이 없어져 현재는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경종 4년(979)에 건립된 이 탑비는 머릿돌 앞면 중심에 ‘현각선사탑비’라는 전액(篆額:전서로 쓴 비석 글씨)이 음각되어 있다.

 

현각선사탑비 근처에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가 있다. 녹천(鹿川) 고광순 의사(1858~1907)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항일 의병의 길을 선택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뒤에 ‘호남의병대장’이 되어 남원·광주·화순·순천 등지에서 자신이 제작한 불원복기(不遠復旗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를 앞세우고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1958년에 구례군민이 뜻을 모아 세운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
▲고광순이 제작한 불원복기. '불원복'은 국권회복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다. 2008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형세가 불리해지자 연곡사에 들어와 유격전을 펴다가 일본 군경에 포위되어 집중포화를 받아 1907년 9월 11일 장렬히 순국했다. 1958년에 구례군민들이 뜻을 모아 순국한 자리에 순절비를 세웠으며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시간은 오후 3시가 넘은 데다가 산골이라 해가 빨리 진다. 나는 아내를 남겨두고 부리나케 경내로 들어가, 국가 지정문화재를 찾아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챙긴다고 챙겼는데 나중에 보니 내가 찍은 문화재는 세 점뿐이었다. 장소를 미리 확인하지 못한 탓이었다.

 

문화재를 빼면 모든 건물이 새로 지어서 천년고찰이라는 표현이 거시기하다. 언제 기회가 있으면 느긋하게 절집을 돌아보며 우관과 김개주, 윤씨 부인과 김환의 자취를 느껴보고 싶다.

 

 

2022. 7. 2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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