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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사, 망국의 치욕에 선비는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by 낮달2018 2022.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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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자락 지각 답사기] ③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매천사(梅泉祠)

*PC에서는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매천사 전경. 맨 뒤의 건물이 매천사다. ⓒ 구례군

애당초 우리 여정에 ‘매천사(梅泉祠)’는 들어 있지 않았다. 노고단에 올랐다가 내려와 하동 쪽으로 길을 재촉하던 때에 나는 얼핏 ‘매천사’라는 이정표를 보았고 차를 돌렸다. 글쎄, 구례에 와서 매천사를 지나면서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매천사는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에 있는,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생전에 선생이 살았던 곳에 후손과 지방 유림이 1955년에 세운 사당은 앞면 3칸·옆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1984년에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되었다.

▲ 매천 초상-조선 말기의 화가인 채용신이 그린 황현의 초상화.

매천은 전라남도 광양 출신이다. 청년 시절에 과거에 응시하고자 상경하여 당시 문명이 높던 추금 강위(1820~1884), 영재 이건창(1852~1898), 창강 김택영(1850~1927)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뒷날 매천은 이들과 함께 한말 ‘한문학 사대가(四大家)’로 불리게 된다.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라고도 불린다.

 

매천은 과거의 초시(初試)에서 1등으로 뽑혔으나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이 되자 나머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귀향했다. 뒤에 부친의 명으로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해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썩은 정관계를 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 매천야록

매천은 구례로 솔가하여 독서와 시문, 역사와 경세학 연구에 전념했다. 마흔여덟에 만수동에서 월곡(구례군 광의면 수월리)으로 이사하여 대월헌(待月軒)에서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記聞)> 등을 집필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통분하여, 당시 중국에 있는 김택영과 함께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망명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그 5년 뒤(1910)에 일제가 강제로 조선을 병합하자 매천은 유서와 절명시 네수를 남기고 더덕술에 아편을 타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56세.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이 되어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난국에 죽지 않는다면 오히려 애통하지 않겠는가.”

 

매천은 나라가 망하면 백성은 마땅히 죽어야 옳다고 여겼다. 사대부들이 염치를 중히 여기지 않고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종사를 망쳐 놓고도 자책할 줄 모른다고 통탄하였다. 그는 명예를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한 사람으로 그는 기꺼이 죽었다.

그의 부음을 들은 경재(耕齋) 이건승은 “의를 이룸이 예로부터 전공보다 높거니와 / 이 시(詩)야말로 겨레의 충성심을 깨우쳤다네. / 과연 벌족들은 너무도 잠잠한데 / 한 포의(布衣) 마침내 해동(海東) 이름 드높였네.”라는 시로써 매천의 죽음을 애도했다.

 

조선왕조가 아니 대한제국이 왕의 나라라면 마땅히 망국의 책임과 죄업은 임금과 그 일가가 져야 한다. 그러나 이씨 성의 왕족 가운데 스스로 책임을 다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가 없는 매천이 죽음으로써 그 부끄러움을 대신했을 뿐이다.

 

경재의 시에서 ‘벌족(閥族)은 잠잠한데’ 오히려 ‘한 포의(벼슬하지 않은 선비)’가 ‘해동 이름 드높였’다는 것은 그것을 이른 것이었다. 그렇다. 을사년(1905) 이래 경술년을 지나면서 스스로 왕토에 사는 신민(臣民)의 도리를 다한 이들은 선비 예순여섯 분이었다. [관련 글 : 장엄하여라, 우국의 황혼이여]

 

매천 사후 1911년에 벗 창강 김택영이 상해에서 그의 시집 <매천집>을 출판 배포하였다. 1955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매천야록>을 간행하였고 구례군 월곡마을에 사당 매천사(梅泉祠)가 세워졌다. 1962년, 사후 52년 만에 매천에게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관련 글 : 포(布衣)의 선비 황현, 망국의 책임을 대신하여 자정하다]

▲ 황현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매천사의 창의문은 사당의 외삼문이다.
▲ 맞은편 건물이 매천이 책을 쓰고, 목숨을 끊은 대월헌이다.
▲ 맞은편에 사당의 내삼문, 오른쪽 비석은 매천황선생묘정비다.
▲ 정면에 보이는 게 사당의 내삼문이고, 오른쪽 건물은 매천황현유물관이다.
▲ 매천사. 이 사진은 아래 호양학교 사진과 같이 구례군 문화관광해설사 임세웅 님이 찍은 것이다.

매천사에 들렀지만, 사진은 창의문 사진과 담 너머를 찍은 사진 몇 장이 다다. 맨 뒤에 있는 사당 매천사 사진은 따로 없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면 담 너머로 사진을 찍을 일은 없다. 그러나 갈 길이 바빠서 문을 열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매천사는 그저 ‘들른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인근에 그가 세운 호양학교(壺陽學校)가 복원되어 있다는 건 이 글을 쓰면서 겨우 확인한다. 호양학교는 매천 황현이 신학문 보급과 민족의식 함양을 위해 1908년에 설립한 학교이다. 황현이 살았던 광의면 월곡리 인근의 광의면 지천리에 세워졌다.

▲ 2006년에 복원한 호양학교 교사. 호양학교는 월곡리 인근의 광의면 지천리에 세워졌다 . ⓒ 임세웅

호양학교는 설립 이후 10여 년간 수많은 인재를 배양하였으며 일제의 감시와 탄압, 재정난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민족교육을 지속하였다. 그러다 1920년 3월 공립 광의보통학교의 개교와 동시에 폐교되었다. 옛터에 호양학교를 복원한 것은 2006년이라고 한다.

 

다시 남도 여행을 나서면, 매천사는 물론, 호양학교도 들여다보아야겠다. 미진함과 아쉬움으로 늘 돌이켜보는 게 여행의 낙수다.  진득하게 돌아보고 떠나는 버릇을 들여야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말이다. 

 

 

2022. 7. 2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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