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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直指)』와 ‘금속활자’ 이야기

by 낮달2018 2022.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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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과 흥덕사지, 청주고인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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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덕사지 옆에 들어선 청주고인쇄박물관. 1985년 흥덕사지가 발견되고 난 뒤 1992년에 문을 열었다.
▲ 청주고인쇄박물관 전시관. '활자로 태어난 직지'에 대한 내용부터 시작된다.

흥덕사지의 청주 고인쇄(古印刷)박물관을 찾은 것은 지난 5월 27일, 문의문화재단지를 돌아보고 나서였다. 도시락까지 준비하고 소풍 삼아 문의에 갔었지만, 때를 훌쩍 넘기고 마땅히 도시락을 펼 데를 찾을 수 없었다. 오후 3시쯤, 아내와 내가 고인쇄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거기서 불편하게 도시락을 비운 사연이다. [관련 글 : 소풍은 문의마을로 가서 도시락은 차 안에서 먹었다]

 

청주고인쇄박물관과 흥덕사지 방문

 

흥덕사지(興德寺址)는, 한국토지공사가 운천 지구 택지개발사업을 시작하고 청주대 박물관이 운천동 사지 발굴조사를 진행하면서 발견되었다. 흥덕사지는 현장에서 화강암으로 잘 다듬은 초석(礎石)과 치미편(鴟尾片), 연화문(蓮花紋) 또는 당초문(唐草紋)이 새겨진 와편(瓦片)을 수습하면서 찾아낸,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절터였다.

 

1985년 10월에 사지의 동쪽에서 ‘갑인오월일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甲寅五月日西原府興德寺禁口臺座)’라는 명문이 있는 청동 금구(쇠북)와 청동 불기(佛器) 등이 출토되면서 이 절터가 흥덕사임이 확인되었다. 아울러 이 사지가 바로 고려 우왕 3(1377)년에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를 인쇄한 곳임도 밝혀지게 되었다.

▲ 사적으로 지정된 흥덕사지를 복원 정비하여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팔각지붕의 흥덕사 금당과 삼층석탑을 복원하였다.
▲ 고인쇄박물관의 전시된 '흥덕사지의 발견'. 1985년 사지의 동쪽에서 '흥덕사' 명문이 있는 청동 쇠북 등이 출토되었다.

충청북도는 사적으로 지정된 절터를 복원 정비하여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팔각지붕의 흥덕사 금당과 삼층석탑을 복원하고 회랑 터와 강당 터는 주춧돌이 드러나도록 잔디를 심어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흥덕사 옆에 청주고인쇄박물관이 개관한 것은 1992년 3월이었다.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물 <직지>를 인쇄한 곳, 흥덕사지

 

고인쇄박물관은 이곳이 흥덕사지이고, <직지>가 인쇄된 곳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박물관의 자격을 갖추고도 남는다. 박물관은 충청북도와 청주시가 운영하는 시설이지만, 국립 못잖은 시설과 내용, 이른바 ‘컨텐츠’를 구비하고 있다. 박물관을 돌아본 섣부른 감회보다는 <직지>를 제대로 알아보는 게 더 유용할 듯하다.

 

<직지>는 현존하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 가운 가장 오래된 책이며, 백운화상 경한(景閑, 1298~1374, 백운은 호)이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에 필요한 내용을 뽑아 1377년에 펴낸 불교 서적이다. 줄여서 간단히 ‘직지심체요절’, ‘직지’로 부른다.

▲ <직지심체요절> 목판본(1372). 원나라에서 받아온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의 내용을 대폭 늘려 상하 2권으로 엮은 것이다.

<직지>를 저술한 백운화상 경한

 

백운화상은 고려 충렬왕 24년(1298)에 전라도 고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후에 그는 중국의 석옥(石屋) 선사로부터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을 전해 받고 직접 심법(心法)을 전수하였으며, 인도의 지공(指空) 화상에게서도 직접 법을 물어 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귀국한 뒤에는 태고 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 1301∼1382)나 혜근 나옹화상(惠勤懶翁和尙, 1320∼1376)과 더불어 대선사(大禪師)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황해도 해주의 안국사(安國寺)와 해주의 신광사(神光寺)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이끌었다. 백운은 공민왕 23년(1374)에 여주의 취암사에서 77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했다.

 

백운화상은 75세였던 고려 공민왕 21(1372)에 불자들에게 참선의 도를 깨닫게 하고, 선풍(禪風)을 전등(傳燈 : 부처의 가르침을 전함)하여 법맥을 계승케 하고자 <직지>를 저술했다. 1377년 7월, 백운의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직지>를 금속활자로 인쇄·간행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등의 여러 불서(佛書)와 역대의 여러 불조사(佛祖師)의 게(偈), 송(頌), 찬(讚), 가(歌), 명(銘), 서(書), 법어(法語), 문답(問答) 중에서 선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것만을 골라서 쓴 것이 그 주된 내용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학승(學僧)들이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수의과(隨意科)에서 공부하는데 사용되는 대표적인 학습서였다.

▲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발견해 보고한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 <직지>.①인쇄 시기 ② 장소 ③인쇄방법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인증서.
▲ 활자판과 인쇄물
▲ <월인천강지곡> 활자판과 인쇄한 책 <월인천강지곡>
▲ <오륜행실도> 활자판과 인쇄한 <오륜행실도>

<직지>는 중국에서 얻어 온《불조직지심체요절》의 내용을 대폭 늘려 상·하 2권으로 엮은 것이다. 중심주제인 ‘직지심체(直指心體)’는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가졌을 때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현존하는 것은 하권 1책뿐인데, 1800년대 말 콜랭 드 플랑시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가 사 갔다. 뒷날 골동품 수집가 앙리 베베르가 경매에서 <직지>를 180프랑을 내고 샀다.

 

<직지>를 발견하고 이를 세계 최고의 인쇄된 책임을 밝혀낸 박병선 박사

 

베베르는 <직지>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했고 이후 지금까지 거기 보관되고 있다. <직지>의 존재를 발견한 이는 이 도서관에 사서로 근무하던 박병선(1923~2011) 박사다. 그는 <직지>가 전 세계에 남아 있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임을 밝혀냈다.

 

동백림사건’(1967)의 여파로 프랑스에 귀화한 그는 도서관 창고에서 파지로 분류돼 잠자고 있던 조선 왕실 기록물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하고 이를 고국에 알렸고, 한국 서적 코너 한 귀퉁이에 있던 <직지>를 발견하고 전율했다. 거기에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일어와 한문에 능통한 유일한 사서였다. 관련 연구는커녕 자료도 전무한 상태에서 그는 <직지>가 구텐베르크보다 78년이나 앞선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임을 입증하는 데 오랜 시간을 바쳤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로부터는 ‘반역자’로 몰렸고, 한·불 양국의 냉담과 조직적 핍박 속에서 힘들게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책의 역사 종합전람회’에 직지심체요절을 출품했고 이를 통해 직지심체요절이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성경책보다 무려 78년이 앞선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임을 전 세계에 알렸다. <직지> 고증 이후, 본격적으로 그 소재를 파악하고자 애쓰던 박병선 박사가 <외규장각 도서>의 행방을 찾은 것은 1978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1979년 권고사직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떠나야 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직지>, 그러나 여전히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직지>는 2001년 9월 4일에 <승정원일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직지>가 뒤늦게 누리게 된 영광의 상당 부분은 박병선 박사에게 돌려져야 하는 이유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9년 9월 그의 오랜 헌신을 기려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여전히 <직지>는 프랑스 소유여서 현재 우리 정부는 <직지>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그가 행방을 밝혀낸 <외규장각 도서>는 2010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서 프랑스와의 정상회담에서 외규장각을 한국에 대여하되, 5년마다 그것을 갱신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외규장각 의궤>는 145년 만에 ‘환수’가 아니라 ‘대여’의 형식으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소유권은 프랑스에 있어 우리 문화재도 등록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외규장각 도서의 온전한 환수를 위해선 소유권을 우리 정부가 갖는 추가적 조치와 협상이 요구된다.

▲ <직지> 하권 간기. 인쇄시기와 장소, 방법 등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흥덕사(興德寺)의 창건 연대와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직지> 하권 간기(刊記)에 고려 우왕 3년(1377)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였음을 명기(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하고 있다. 이것은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78년이나 앞선 것으로, 197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도서의 해’에 출품되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되었다.

 

<직지>는 구텐베르크가 1455년 금속활자로 <42줄 성경>을 인쇄한 때보다 정확히 78년이 앞선다. [관련 글 :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로 <42줄 성경> 간행]그러나 실제로 고려에서 금속활자 인쇄는 13세기 초부터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 고인쇄박물관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인쇄' 코너

목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1239)의 끝에 있는 최이의 발문에 따르면 기존에 금속활자로 간행된 책을 목판으로 다시 새겼다고 씌어 있기 때문이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나오는 ‘신인상정예문발미(新印詳定禮文跋尾)’에 따르면 금속활자로 <상정예문(詳定禮文)> 28부를 찍어 해당 관청에 나누어 주고 보관하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 무주정광대다라니경. 불국사 석가탑에서 출토된 소형 두루마리 경전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 초조대장경 인경본(위)와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 경판(아래).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와 고려의 금속활자,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고려의 금속활자는 서양에서의 그것처럼 ‘지식·정보 혁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이후 유럽 전역에 240개가 넘는 인쇄소가 만들어지고 약 1천만 권의 책이 인쇄되었다. 인쇄소가 생기기 전까지 필사본 3만 권에 그쳤던 유럽의 책은 16세기에 약 2억 권, 17세기에 약 5억 권, 18세기에는 10억 권 이상 인쇄되었다. 귀족과 성직자가 독점했던 지식은 대중화되면서 지식·정보 혁명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불경(고려), 유교 경전(조선) 간행에 주력하고, 국가에서 서적의 간행과 보급, 유통을 관리했다. 15세기 90여 년간 11종의 금속활자가 만들어졌으나 인쇄소는 국가기관 1곳뿐이었다. 이때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은 1천 종을 넘지 않았고 종별 부수도 20~200부에 불과했다. 국가가 활자와 인쇄를 독점함으로써 서적을 대중적으로 공급하여 ‘독점된 지식 의 해체’ 자체가 불가능했다. 인쇄가 포함하고 있는 대중화에 이르지 못한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지식 공유와 확산’, ‘지식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럽보다 최소한 78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를 만들었으나 우리나라에서의 인쇄술은 결국 국가와 지배계층의 필요에 따라 이용되는 데 그쳤다. 무엇보다도 인쇄된 책은 국가와 양반 계급의 문자인 한자 서적뿐이었다. 상업적인 이윤을 목표로 한 소설이 목판본으로 출판되는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였다.

 

5만 자에 이르는 한자를 일일이 금속활자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과 26자 알파벳으로 모든 글자를 표현할 수 있는 유럽의 상황은 비교 불가다. 애당초 문자에서 인쇄술의 전망은 갈려 버렸다. 그것이 우리나라와 유럽에서 각각 발명한 금속활자가 서로 다른 길로 갈 수밖에 없게 한 근본 원인이었다.

 

영·정조 시대에 실학자들의 각종 저술이 세종이 창제한 한글로 금속활자 인쇄를 거쳐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보급되었다면 우리의 근대는 좀더 다른 모습을 띠고 있지는 않았을까. 고인쇄박물관과 흥덕사지를 둘러보면서 그런 덧없는 상상을 하면서 나는 <직지>의 고향을 떠났다.

 

 

2022. 6.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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