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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로 『42줄 성경』간행

by 낮달2018 2024.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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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455년 8월 24일, 금속활자로 『구텐베르크 성경』 인쇄

▲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인쇄한 『42줄 성경』. 2001 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455년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로 인쇄한 『42줄 성경』을 완성하다

▲ 구텐베르크(1398~1468)

 

1455년 어느 날(<위키백과>는 1456년 8월 24일로 특정하고 있으나 그 근거는 어디서도 찾기 어렵다.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 항목에서도 연도와 날짜를 특정하지 않고 있다.) 독일의 금 세공업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8~1468)는 고향인 마인츠(Mainz)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한 ‘42줄 성경’(구텐베르크 성경)을 완성했다.

 

1450년께 인쇄기를 발명한 구텐베르크가 1452년부터 3년에 걸쳐서 인쇄한 구텐베르크 성서는 인쇄기를 이용한 첫 출판물이었다. 그는 3년에 걸쳐서 180부를 인쇄했는데 양피지에 인쇄된 최초의 성경 30권 중에서 단 4권만 총 1,282쪽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었다.

 

인쇄기가 속도와 정보와 지식 혁명을 창출하다

 

인쇄기를 통한 인쇄는 필사본 생산 속도와 비교하여 15배나 빨랐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인쇄공의 숙련도에 따라서 1분에 2~10장가량을 인쇄할 수 있었다. 인쇄 속도에 비교하면 최초의 인쇄본의 숫자가 적은 것은 구텐베르크는 인쇄본 성서가 필사본처럼 보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 종교개혁을 촉발한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구텐베르크는 이것으로도 재미를 보았다.

구텐베르크는 라인강 기슭의 도시 마인츠의 조폐국에서 일했던 경력을 살려 활자 기술을 창안했다. 금화, 은화의 초상화 도안을 찍어내는 펀치에다 글자를 거꾸로 새겨 철판에다 찍어 거푸집을 만들고 그 위에다 철로 만든 주조기를 덧씌워 납과 안티몬, 주석 합금을 부어 주조하는 방식을 고안해낸 것이었다.

 

이 방식은 철로 만든 거푸집과 주조기(鑄造機)를 쓴 덕분에 수천 번을 주조해도 모양과 크기가 일치했다. 조판과 활자에 서로 요철(凹凸)을 만들어 꽉 물리게 하는 방식을 썼으므로 수백 장을 찍어도 활자가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기. 이는 속도, 지식혁명을 가져왔다.

구텐베르크는 여기에 대량 인쇄에 가능하도록 기존의 포도주 기름 등을 짜던 압축기(프레스)를 활용했다. 활자인쇄가 잘 되려면 충분한 압력이 필요하지만, 사람의 힘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현재 신문과 언론을 ‘프레스(press)’라 부르는 것은 구텐베르크 인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텐베르크 인쇄기의 속도는 기존의 필사에 비기면 가히 혁명적이었다. 이후 활자 인쇄술은 급속히 퍼져서 1450년부터 50년 동안 3만 종의 책을 총 2천만 부나 인쇄할 수 있었다. 이는 이전 1천 년 동안 출판된 책보다 더 많은 양이었다.

 

지식의 대중화는 종교개혁 등 ‘근대’로 이어져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단순히 속도 혁명만 가져온 게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필사로 만든 성경 66권 한 질은 무려 집 10채 값이었기에 성경은 수도원이나 교회만 소유할 수 있었다. 성경을 독점한 교회는 교리를 자신들 방식으로 해석하고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성경이 대량으로 보급되어 사람들이 손쉽게 성서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수도원과 교회의 교리해석을 비판할 수 있는 여지가 만들어졌다. 인쇄기의 개발이 마침내 종교개혁을 돕게 된 것이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 ‘95개 조 반박문’을 게시하며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주장했다.

 

루터의 반박문은 30만 부 이상 인쇄되어 두 주 만에 독일 전역에, 두 달 만에 유럽 전역에 퍼졌다. 루터는 또 라틴어로 쓰인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인쇄된 독일어 성경은 급속하게 확산하였다. 누구나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유럽을 중세 가톨릭교회의 억압과 질곡에서 벗어나게 한 근대의 출발점이었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었다. 그것은 정보와 지식을 대중화한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었다. <타임(Time)>이 ‘지난 1천 년의 인물’로 구텐베르크를 선정한 이유다.

▲ 고향이자 『42줄 성경』을 간행한 라인 강변의 도시 마인츠에 있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박물관.

1448년 마인츠에 인쇄소를 개업한 구텐베르크는 가톨릭교회의 면죄부를 찍어 팔아서 쏠쏠한 재미를 본 바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개발한 인쇄술이 면죄부에 대한 반박문을 유럽 전역에 확산하고 종교개혁을 촉발하는 데 이바지한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연도를 특정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기로 성경을 인쇄한 것은 1450년대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1377년 고려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보다 78년 뒤다.

 

혹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직지심체요절』을 찍어내다

▲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직지심체요절』의 금속활자 영인본.
▲ 『직지』 본문 마지막 장에 '주자인시(鑄字印施)'가 선명하다.

『직지심체요절』(이하 『직지』)은 고려조의 승려 경한(景閑)이 부처와 조사의 게송·법어 등에서 선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이다. 1377년(우왕 3) 7월 청주목의 교외에 있던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인 주자로 『직지』 초간본을 찍어냈다. [관련 글 : 직지(直指)금속활자이야기]

▲ 청주 흥덕사지. 1985년 발굴 뒤, 금당과 3층석탑을 복원, 1992년 고인쇄박물관을 개관하였다. ⓒ 청주고인쇄박물관

70여 년의 간격을 두고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금속활자가 인쇄에 이용된 것이다. 고려의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하권(下卷)과 “구텐베르크의 양피지에 인쇄된 『구텐베르크 42행 성경』과 동시대의 배경 문서”는 2001년 나란히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텐베르크는 ‘인쇄기’, 『직지』는 ‘금속활자’에 방점

 

그러나 『직지』와 『구텐베르크 성경』은 그 함의가 다르다. 구텐베르크의 경우는 인쇄기에 방점이 찍히고 금속활자는 그 부속품의 일부로 인식된다. 그의 인쇄기는 유럽 지식의 역사를 바꿔 놓을 만큼 막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반면, 고려의 『직지』는 인쇄물 자체보다는 그 인쇄를 가능하게 한 ‘금속활자’에 방점이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중세 이후 유럽 문화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낸 것과는 달리 『직지』는 지식의 대중화와는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가 인쇄·출판을 독점한다는 것은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중국은 송대(宋代)에 이미 민간의 출판사와 서점이 존재했으며,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이후 민간에서 출판사와 서점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반해 한국은 민간 영역의 출판이 국가의 출판 독점을 압박하거나 능가하거나 전복시킬 정도로 성장한 적은 없었다.

출판물의 성격으로 볼 때 도리어 국가가 담당하지 못한 부분을 보완하는 역할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국가는, 특히 중앙의 주자소(鑄字所)와 교서관(校書館)은 어떤 것을 출판할지 그 대상 선정부터 활자와 장인 결정까지 인쇄·출판의 전체 시스템을 일관되게 갖춘 유일한 기관이었다. 바로 이것이 한국 출판의 역사, 곧 책의 역사를 기본적으로 규정했다.”

 

         - 강명관, 『조선 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천년의상상, 2014) 중에서

 

구텐베르크가 민간 업자로 인쇄술의 발전을 선도한 것과 달리 우리나라에서 인쇄소는 국가기관 한 곳뿐이었다. 또 국가에서 서적 간행과 보급, 유통을 관리하면서 고려는 불경, 조선은 유교 경전의 간행에 주력하였다.

 

15세기 90여 년간 11종의 금속활자가 만들어졌으나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은 1000종을 넘지 않았고, 종별 부수도 20∼200부에 불과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는 고려 시대의 금속활자는 우리 스스로 “세계 최초의 발명품”이라고 강조하는 것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독일 마인츠에 있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박물관의 구텐베르크 동상

구텐베르크 이후, 1500년께 240개 이상의 인쇄소가 만들어지고 약 1천만 권의 책이 인쇄된 유럽과 견주어지는 대목이다. 1520년에는 신대륙 멕시코시티에 첫 인쇄소가 세워질 만큼, 이 인쇄 혁명의 전파 속도는 눈부셨다. 구텐베르크 이전까지 서적이라곤 필사본 3만 권뿐이었던 유럽에는 16세기에 약 2억 권, 17세기에 약 5억 권, 18세기에는 10억 권 이상 간행되었다.

 

구텐베르크는 약 180여 권의 성경을 인쇄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를 위해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법정에까지 서게 되는 불운을 겪었다. 정작 자신이 발명한 인쇄술로 지식혁명을 촉발했지만, 그는 돈을 벌지 못했다. 재판에서 패소한 그는 1468년 2월 3일 가난에 시달리다 쓸쓸히 생을 마쳤다.

▲ 여주 취암사에서 간행한 『직지심체요절』 목판본. 보물 제1132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직지』는 19세기 말 콜랭 드 플랑시 주한 프랑스 공사가 매입해 여러 루트를 거쳐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이후 묻혀 있던 『직지』는 그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던 고 박병선 박사의 노력으로 1972년 파리 세계도서전시회에서 공개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프랑스국립도서관 수장에서 잠자고 있는 『직지』

 

고간본(古刊本)으로는 1378년 백운 화상이 입적한 여주 취암사(鷲巖寺)에서 간행한 목판본이 있다. 목판본은 1992년 4월 20일 보물 제113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상하권 1책이 각각 소장되어 있다.

 

그간 우리는 『직지』의 반환을 프랑스 정부에 계속 요구해왔으나 프랑스의 외면으로 진척이 없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에서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는 2011년 반환 추진 20년 만에 ‘영구대여’ 형식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약탈문화재가 아닌 『직지』는 국제법과 관행상 소유권을 주장하기가 어려우므로 『직지』의 반환은 프랑스 정부에 달린 셈이다. 반환을 주장하기보다 프랑스국립도서관 수장고에 잠자고 있는 직지를 일반 관람객에게 공개할 수 있도록 유도하거나 국내 전시에 대여를 추진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2018. 8. 22. 낮달

 

 

참고

· <나무위키>

· <위키백과>

· 강명관, <조선 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천년의상상, 2014)

· 허진호, 직지심체요절과 구텐베르크, 정화와 콜롬버스

· 구텐베르크세상을 참으로 풍요롭게 만든 사람!

· 독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박물관 탐방기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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