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넘어
6월은 10월과 함께 그 숫자가 본음이 아닌 속음(俗音)인 [유월], [시월]로 불리는 달이다. [유궐], [시붤]처럼, 하기는 어렵고 듣기에는 거슬리는 발음을 쉽게 하기 위한 일종의 활음조 현상이다. 이달을 고비로 한 해가 꺾어진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가는 것이다.
유월은 유독 민족 분단과 관련된 날이 많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6·25가 그렇고, 나라를 위해 죽어간 모든 이들을 기리는 현충일(6일)이 그렇다. 15일은 반세기가 넘게 계속되어 온 냉전의 세월을 끊은 6·15 선언이 7돌을 맞는 날이다. 불과 반세기 역사의 굽이마다 얼룩진 민족의 삶과 죽음은 얼마인가.
한국전쟁으로 남북은 각각 133만과 272만, 모두 405만여 명의 인명을 잃었다. 이 중 민간인 사상자 비중은 남한이 전체 사상자의 50%, 북한은 80%에 달해 전투원보다 비전투원의 피해가 더 큰, 전쟁의 비인간적 속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또 전쟁 기간에 대규모 인구이동이 일어났고 5백만 명의 전재민(戰災民)과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한국전쟁은 남북 모두,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우쳐 준 전쟁이었다(강만길 교수). 그러나 온 민족이 그것을 깨닫게 하는 데 들인 비용과 희생은 너무 값비싼 것이었다. 전쟁은 민족의 이해와는 무관하게 남과 북에서 제각기 채택된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일시적 분할이라고 여긴 ‘분단을 고착화’했다.
불안한 정전협정 이후 47년 만인 2000년 6월 15일, 남북의 정상이 만나 화해와 협력에 합의하고 한반도의 ‘평화통일’ 원칙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 선언으로 남한 정부 당국이 비로소 통일의 주체가 되었고 각 부문의 민간 통일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북핵과 관련한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남북이 화해와 협력의 동반적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 선언의 힘이다. 이 평화와 통일을 위한 겨레의 선언은 더 이상 냉전과 적대적 모순관계가 겨레에게 어떤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의 민족적 고백과 다르지 않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다섯 개 조항은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 통일 방안에 대한 낮은 차원의 모색, 이산가족 문제의 인도적 해결, 경제협력에 대한 신뢰 구축, 그리고 이러한 합의의 조속한 실천을 명문화하고 있다. 어찌 보면 지극히 초보적 수준의 합의인데도 이 합의가 이루어지는 데 47년이 소요되었다는 것은 이 문제가 민족적 과제라는 사실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부시의 요청에 따라 북한에 대한 쌀 차관 유보 방침에 대해 현재 진행 중인 제21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북쪽은 원론적인 반응만 보였다고 오늘 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여전히 적잖은 곡절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남북의 화해와 협력은 이미 역사적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것은 이후 우리가 어떤 형태의 통일을 꾸려 갈 것인가에 대한 과제를 던지고 있다.
10일은 1987년의 6월항쟁이 스무 돌을 맞는 날이다. 성년의 여부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갖는 우리 사회에서 20년의 무게가 지니는 의미는 남다르다. 신군부의 독재에 맞서 일어난 이 전 국민적 저항 운동은 기존 박정희의 유신체제(이른바 73체제)를 뒤집는 대변혁 운동으로, 이후 획득된 제도가 ‘87체제’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이후 한국 사회와 민주주의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6월항쟁은 스무 살 성년을 맞이하며 올해 처음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이 87체제는 그러나 정치·경제·사회적 발전의 정체와 후진성, 자본의 첨병을 맡은 신자유주의의 침탈로 대두된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이전보다 개선된 질서이긴 하지만 수많은 일시적 타협을 담은 불안정한 체제’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계점에 도달한 이 87년 체제의 극복’ 논의가 스무 해 전, 이 땅을 달구었던 민중의 함성과 물결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항쟁의 결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민주 헌정 체제로의 복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보다 소중한 것은 항쟁이 대학생이나 노동자 중심이었던 기왕의 시민운동을 넘어 이른바 ‘넥타이 부대’로 일컬어지는 사무직 노동자까지 포함하는 국민적 저항이며, 투쟁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서 6월항쟁은 늘 전언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항쟁이 전국 주요 도시에서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을 때, 나는 경주 쪽 소읍의 여학교에서 초임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일간지를 통해서만 그 추이를 바보처럼 지켜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20년 전의 항쟁의 불길을 전하는 빛바랜 흑백사진과 영상을 바라보는 순간의 마음은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19일은 단오(端午)다. 음력 5월 5일, 양(陽)의 수인 5가 겹쳐 일년 중에서 가장 양기(陽氣)가 왕성한 날로 여기는 단오는 모내기를 끝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이다. 단오는 북쪽으로 갈수록 번성하고 남으로 갈수록 약해지는데, 남쪽에서는 대신 추석이 중요시된다고 한다.
단오의 세시풍속 중 풍작을 기원하는 풍속으로 ‘나무 시집보내기’[가수(嫁樹)]가 있다. 나뭇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놓아 많은 열매가 열리도록 비는 이 풍속은 ‘성교’를 유감(類感)한 주술, 유감주술[닮은 것은 닮은 것을 낳는다든가 결과는 그 원인을 닮는다고 하는 유사율(類似律)에 바탕을 둔 주술]의 흔적이다.
어릴 적 내 고향의 단오에는 마을 앞 시냇가 모래밭에서 씨름판이 벌어졌었다. 힘을 쓰는 청년들의 거친 숨소리와 이를 지켜보는 큰아기들의 탄성이 가득했던 어느 해의 단오의 모래판을 나는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다.
무엇보다 오감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 씨름판 한편에 걸린 가마솥에서 푸짐하게 끊고 있던 개장국 내음이다.
그러나 그게 단오에 관한 마지막 기억이니 밀려오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 앞에 수천 년을 이어온 세시 풍속은 하나둘 사라져 버린 것일까.
‘강릉단오굿’과 같은, 마을의 수호신에게 제사 지내는 단오제(端午祭), 그 집단적 축제에 깃든 공동체 의식, ‘대동(大同)’의 기억들이 날이 갈수록 그 의미가 새롭게 새겨지는 까닭이 거기 있다.
유월의 달력에서 쇠귀 선생은 ‘진리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직한 삶’을 이야기한다. 그는 권력과 부 앞에 당당하고 진리와 사랑 앞에 마음을 비우며, 지름길과 행운보다 정직함을 버리지 않는 역경을 스스로 선택하는 ‘우직함’이 삶을 삶답게 이룬다고 힘주어 말한다.
선생의 말씀이 뜻하는 바는 ‘어리석은 자의 우직한 발걸음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 간다’라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인식과 이어진다. ‘자기를 세상에 맞추기’보다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고자’ 애쓰며, ‘산을 옮기려는 이’, 그 어리석은 이들의 항심(恒心)이 역사를 밀고 가는 주체임을 거듭 밝히고 있다.
고통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 낸 이들이 가진 ‘어리석음’이 그 아픔의 역사를 넘는 참된 힘임을, 그들의 우직한 발걸음이 분단의 질곡을 끊고 새로운 희망의 세상을 열어가는 첫걸음임을 분명하게 확인하면서, 아픔의 역사를 뛰어넘을 6월을 맞는다.
2007. 5. 3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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