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 된 제자들(1)
한 5년쯤 될까. 교직에 들어 한동안은 ‘제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어쩐지 ‘제자’라는 말을 올리는 게 민망해서였다. ‘제자’라는 말의 상대어는 당연히 ‘스승’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제자’라고 말하려면 내가 ‘스승’이 되어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통 없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교사들 대부분은 그런 자격지심과 무관한 일상어로 이 낱말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무심히 제자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예사롭지 않은 자격지심이 멀쩡한 동료를 능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다.
‘스승과 제자, 혹은 교사와 학생’ 사이
그래도 ‘스승’을 입에 올리는 것은 서른 해를 훌쩍 넘긴 지금도 여전히 쉽지 않다. 모든 교사에게 ‘스승의 날’은 언제나 부담스러워 피하고 싶은 날인 이유다.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교사들치고 ‘스승’이라는 이름을 버겁게 여기지 않는 이는 드물다.
누구든 좋은 ‘스승’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열악하기만 한 교육환경 앞에 선 교사들에게 스승의 자리는 멀고 높다. 세상의 변화보다 더 빠른 아이들의 변화를 따라잡는 일도 쉽지 않을뿐더러 요즘 아이들은 옛날처럼 교사에게 더는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학생’은 있되 ‘제자’는 없고, ‘선생’은 있되 ‘스승’은 없다.”는 이야기는 그런 현실을 집약적으로 드러내 준다.
초임교인 여학교에서 현재의 남학교까지 내가 거쳐 온 학교는 모두 여덟 개다. 글쎄, 계산을 해 보진 않았지만 내 앞에선 교과서를 펼친 아이들의 숫자도 아마 수천은 좋이 되리라. 그러나 내게서 국어를 배웠다고 해서 그들이 온전히 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그들을 가르쳤다고 해서 내가 온전히 그들의 스승이 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내게서 국어를 배웠지만 나를 교사로 여긴 아이들에겐 나는 그냥 ‘선생’일 뿐이고, 내가 국어를 가르쳤지만 내가 따로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들 역시 그냥 ‘학생’에 그칠 것이다.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공간에서 교사와 학생으로서 일상을 나눌 때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제 관계’가 이루어지지만, 졸업이나 전근으로 헤어지고 나면 그 관계는 희미해지다 마침내 끊어지고 마는 것이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내 앞에 나타나 스스로 제자를 칭하는 아이들이라면 내가 그를 기억하든 하지 못하든 그는 내게 온전히 제자가 될 수밖에 없다. 세월이 흘러 그가 설사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이 역시 나의 온전한 제자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나는 스승의 몫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스승’과 ‘제자’는 상대가 그 역할을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겠다.
초임 학교에서 만났던 큰아기들은 어느새 불혹의 고개를 훌쩍 넘었고 이태 전에 가르쳤던 여자애들은 올 수능을 거쳐 대입시에 바쁘다. 그 간극이 벌써 25년이 넘는다. 내가 교사로서 연륜을 더해갈 때 제자들 역시 자기 앞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터이다. 삶의 어떤 순간에 학창 시절의 국어교사를 기억한 아이들은 얼마나 될까.
교단에 선 지 벌써 삼십 년이 가깝다. 학창시절에야 내 앞에서 교과서를 편 아이들이었지만 지금은 모두 한 가정의 아내로, 어머니로, 또 가장으로 자기 몫을 다하는 친구들이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전화로 편지로 안부를 물어오고 때로 먼 길을 달려오는 제자들도 더러 있다.
이들은 늘 자주 연락하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손사래를 친다.
“아니다. 제발 그러지 말아라.
이웃에 살아도 찾는 것은 고사하고 전화로
안부 묻기도 쉽지 않은 게 세상사, 인생사가 아니냐.
이렇게 기억하고 안부를 물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쁘고 고마울 뿐이다.”
공치사가 아니라 정말이다. 정작 나는 옛 학창시절의 선생님들께 변변한 인사치레조차 못 하고 산 지 오래다. 수십 년 전의 스승을 기억해 주고 관계를 이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사람됨 덕분이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넉넉하고 따뜻해서 내가 기억될 뿐이라는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제자라면 역시 ‘첫사랑’이다. 초임 시절, 고1부터 졸업할 때까지 아이들 따라 올라가며 가르친 큰아기들에 대한 기억이 가장 오래다. 나와 띠동갑이던 이 친구들은 올해 마흔다섯, 고교생과 대학생을 둔 어머니가 되었다. 가끔 전화와 문자로 안부를 묻거나 친한 친구들 몇몇은 나를 찾기도 한다. [관련 글 : 밀양, 2006년 8월(2)]
제자, 혹은 함께 나이 먹는 이웃
그중 한 친구는 몇 해 전, 먼저 세상을 떠났다. 1학년 때 내 반이었는데, 몸에 깃든 병이 그 아이를 데려갔다. 화장장에서 그를 배웅하던 친구들이 문자를 보내주어서 나는 그의 죽음을 알았다. 먹먹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는 건 순서가 있지만 가는 건 무순’이라는 말을 실감하면서 나는 그들이 이미 제자의 지위를 넘어서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이웃이라는 걸 깨달았었다.
이들이 졸업한 후 나는 남학교로 옮겼다. 옮아와서도 아이들과의 교유는 심심찮게 이어졌다. 옮긴 학교에서 이태를 채우지 못하고 나는 해직되었다. 해직 기간 중 명절 때마다 내게 얼마간의 돈을 부쳐준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복직해서도 아직 그 아이의 마음을 전혀 갚지 못했다. 스승의 마음을 헤아렸던 그 애의 따뜻한 마음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애는 그 후, 십여 년 만에 나를 찾으면서 양주 한 병을 놓고 갔다. 나중에 그게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값비싼 술임을 알고 왜 그랬냐고 했더니, 오랜만에 선생님을 찾는데 어떻게……, 하고 그는 말꼬리를 흐렸었다. 그런 친구였는데 전화번호가 바뀌었는지 요즘 연락이 끊어지다시피 되었다. 바빠서 그렇거니 하면서도 허전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의 빚이 많아서일지도 모르겠다.
담임을 맡았던 아이 가운데 지금도 내 생일을, 그것도 음력으로 기억하고 있는 친구도 있다. 그는 더러는 스승의 날에 맞추어 흔치 않은 선물을 보내주기도 했다. 선물을 받아서가 아니라 20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는 그의 따뜻한 마음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또 고맙다.
그 애는 올해도 내 생일 안부를 문자로 물어왔다. 너무 새삼스러워서 ‘아이고, 내 생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것만으로도 고마우이’ 하고 나는 반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교사의 생일을 물어 챙기곤 했지만, 요즘 아이들은 교사의 생일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때의 제자들 가운데 교사가 된 친구도 몇 있다. 나는 단지 교사로 그들을 만날 뿐, 굳이 소속 교원단체를 묻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한 친구는 단위학교의 분회장으로 애썼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속으로 기꺼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동에 참여하든 않든 이들의 모습을 먼빛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반가움이 남다르다. 그들은 이제 제자이기 전에 동료이니 말이다.
지금도 내 블로그를 드나드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그중 한 친구는 공부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자녀가 가진 능력과 그릇을 진솔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아이들을 자유롭게 기른다고 하지만 그게 자신의 아이가 되면 문제는 사뭇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친구는 정작 참교육을 지향했던 나 자신보다 훨씬 열린 태도로 자기 아이들을 길러낸 것이다.
두 번째 학교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문학동아리 하나를 만들어 아이들을 지도하게 되면서 적지 않은 제자들이 생긴 학교다. 나를 따른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알게 모르게 핍박도 적지 않았는데도 끝내 지도교사에 대한 지지를 지킨 친구들이다.
불과 1년 반 남짓 지도했지만 정작 이들은 내 반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내 친구 장과 함께 해직되었을 때 <한겨레>에 지지 광고를 내고 내가 그 소읍에 살던 4년 동안, 해마다 해야 했던 이사를 도맡아 해 주었던 친구들이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기꺼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두 번째 학교, 동아리와 열등반의 아이들
이 친구들과의 교유는 지금도 이어진다. 인근 도시로 옮아온 올해는 가까이 살게 되면서 만나기가 더 쉬워졌다. 지난 한가위 때는 아이들 넷이 찾아와 우리 내외와 함께 밥을 같이 먹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우리는 눈인사만으로도 서로를 너끈히 이해할 만한 사이가 된 것이다.
올해 갓 마흔, 대학을 나와 직장 생활을 하거나, 고졸로 학력을 마감하고 자동차 정비나 정보기술(IT) 계통의 일을 하면서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몫을 다하는 친구들이다. 개중에는 내게 직접 배우지 않았으니 기꺼이 내 제자가 된 이웃 학교의 여학생도 있다.
그러나 이들만큼 내 기억에 남은 친구들은 내가 맡았던 열등반의 아이들이다. 풋내기 교사가 이 나라 교육의 온갖 모순을 뼈저리게 깨닫도록 해 준 친구들. 내 패악에 가까운 체벌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준 친구들이다. 공부가 시원찮아서 고졸로 학력을 마감했지만, 이들은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자기 몫을 다하며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으리라. [관련 글 : 문제아는 발길질과 따귀로...]
학교를 떠나게 되면 나는 무엇보다 이들을 만나고 싶다. 만나서 옛날의 체벌을 참회하고 그들과 나누고자 했던 우정과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 우리 나이로 마흔둘, 어느새 이들은 우리 사회의 튼실한 허리가 되었다.
복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옛날 말썽꾸러기였던 열등반의 친구 하나가 보일러공이 되어서 인근 비행장의 공사 현장에 있다며 내 앞에 나타났다. 녀석과 나는 옛날을 추억하면서 소주를 마셨고 그는 내게 우정 그렇게 말했다.
선생님, 집을 지으실 땐 연락해 주십시오.
우리 친구들 모이면 집 한 채는 아주 간단히 올릴 수 있으니까요.
글쎄, 집을 지을 일은 없을 듯하지만 나는 혹은 전기공으로, 혹은 목수로, 미장공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이 친구들을 다시 꼭 한번 만나고 싶다. 그래서 이십몇 년 전의 내 과오를 고백하고 그들에게 용서받고 싶다.
2012. 12. 29. 낮달
'이 풍진 세상에 > 교단(1984~2016)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아이들과의 10년, 1998년에서 2008년까지 (0) | 2019.03.22 |
---|---|
좋은 이웃, 혹은 제자들(2) (0) | 2019.03.22 |
31년…, 뒤돌아보지 않고 떠납니다 (1) | 2019.02.25 |
나의 전교조 25년, 그 옹이와 매듭 (2) | 2019.02.21 |
문제아는 발길질과 따귀로...내가 왜 이러지? (0) | 2019.02.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