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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나의 전교조 25년, 그 옹이와 매듭

by 낮달2018 2019.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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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만에 사학 재단의 사과를 받다

▲ 식사를 하고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앙에 웃고 있는 이가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다.

지난 15, 스승의 날 저녁에 나는 친구인 장() 선생과 함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갔다. 수도원장 박현동 아빠스*가 우릴 초대했던 것이다. 우리는 물론 그를 모른다. 친구는 그래도 한때 거기 신자였지만 나는 가톨릭과는 아무 인연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거기 간 것은 오래전의 어떤 인연때문이었다.

 

25년 전 - , 그새 그렇게 세월이 흘러 버렸다. 1989823일에 나는 친구와 함께 그 수도원 산하의 학교 법인에서 해임되었다. 그해 528, 온 세상을 달구며 돛을 올린 교원노조때문이었다. 전국에서 교원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난 초중등, 공사립 교사들은 무려 16백여 명이었다.

 

1989년 우리를 해임한 재단의 초대를 받다

 

그때, 우리를 해임한 이가 당시의 수도원장, 아빠스였다. 수도원장은 학교 법인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원과의 연은 학교를 떠난 우리가 5년 후, 공립학교로 복직하면서 끊어졌다. 지난해 새로 수도원장이 된 아빠스가 과거의 악연을 사과하고 이야기를 나누자며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중재역을 맡은 이의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조금 망설였다. 어쨌든 25년이나 지난 과거의 일, 우리는 복직했고, 현 정부 들면서 노조 아님통보로 대립 중이긴 하지만 전교조도 합법화되었다. 초대한 이도 과거 해임 처분의 당사자도 아니다. 만나고 어쩌고 할 일도 없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당사자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 제안 자체가 예사로운 것은 아니었다. 새 아빠스가 지난해 교황 선출식 투표로 뽑힌 이라는 것, 최근 몇 해 동안 지역의 미군기지(캠프 캐롤)에 불법 매립된 고엽제 문제에 수도원 쪽에서 적극적으로 결합해 싸워 왔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제안의 진정성은 의심할 수 없는 듯했다.

 

어쩔까. 가 보긴 해야겠는데, 별로 당기진 않네…….”
그건 그래. 괜한 의무 부여는 말고 다녀오지, .”

 

우리는 대충 그렇게 합의했다어차피 우리가 요구한 자리가 아니라 거기서 운을 뗀 자리다사과든 유감 표명이든 못 받아들일 일은 없다그런 일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좋을 만큼 그것은 이미 옛이야기다친구는 이미 세 해 전에 서둘러 퇴직했고나 역시 어쩌면 마지막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삼십 대 중반, 그 혈기 방장했던 시절, 뜨거웠던 여름을 떠올리면서 이미 내가 모든 은원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함께 해직되었던 친구 가운데 여럿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배주영과 정영상이, 황현자가 그렇고 장성녕이 그랬다.

 

당일 저녁 7시께 친구와 나는 수도원 주차장에서 만났다. 학교 행사 때 두어 번 들렀던 공간인데도 내게 수도원은 좀 낯설었다. 오래된 옛 성당 옆에 새로 지은 성당이 웅장하게 서 있었고, 건장한 체격의 고진석 이사악 신부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새 성당

 전교조 경북지부장과 초등에서 정년 퇴임한 선배 선생님, 그리고 당시 지회 동료 ‘31의 그 박()이 자리를 함께했다. 성당 안 식당에서 우리는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와 인사를 나누었다. 40대 후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젊어 뵈는 신부는 아주 선량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자리를 주선한 친구가 모임을 주선한 경과를 설명한 데 이어 아빠스가 인사말을 했다. 일부러 준비한 이야기가 아닌 소박한 인사였는데, 그게 오히려 무겁지 않아 따뜻하고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 그의 말투는 꾸밈이 없어 무척 천진한 느낌을 주었는데 요지를 따면 아래와 같았다.

 

“수도원에 입회하고 한참 후에 우리 학교에서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선생님들이 계셨다는 이야기를 간간이 듣긴 했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은 지난 2월 10일, 재단 이사장으로 정식 취임한 이후, 이 자리를 마련하면서 알게 되었다.
 
오늘 선생님들을 모셨지만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그러나 이렇게 모시게 되어 반갑다. 그리고 환영한다. 앞으로 우리 수도원을 자주 방문해 주시면 고맙겠다.”

 

그리고 준비한 꽃다발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생각지도 않은 꽃다발이 당황스러웠지만거기에 그들의 진정성이 담겨 있는 듯해서 우리는 간단히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곧 잡곡밥과 몇 가지 정갈한 반찬이 식탁에 차려지고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 식사를 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우리는 재단이 경북에서 가장 늦게 징계를 했고 전교조 교사들에 대해 매우 정중하게 대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다른 시도의 가톨릭 재단에서 벌어졌던 극단적 대립과 격렬한 충돌이 없었던 게 다행스러웠다고. 정부와의 싸움도 힘겨운데, 학교 내부에서 동료나 선배들과, 또 재단측 인사들과 싸워야 하는 것은 기실 이중의 부담이었는데 우리는 그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웠던 게 사실이었다.

 

학교마다 탈퇴각서를 요구하는 학교나 재단 쪽의 탄압과 횡포가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었지만, 우리 학교는 편안하기만 했다. 가입 교사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동료 대다수가 노조의 대의를 이해해 주는 편이어서 학교 안에서 동료들과의 마찰은 물론이고 관리자와도 대치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재단이나 교장 편에 서서 노조 가입자들을 적대시하는, 이른바 구교대(救校隊)’도 없었다. 부모님이나 가족을 찾아가 반 협박성의 탈퇴를 종용하는 일도 없었다. 정부의 중징계 방침에 따라 공립학교에서는 징계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우리는 간간이 들어오는 교장의 탈퇴 권유를 정중히 사양하는 게 고작이었다.

 

“결국, 장 선생이 십자가를 졌구먼.”

 

6월에 분회가 창립되면서 내가 분회장으로 뽑혔다고 하자,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신 당시 학교장이 그렇게 뇌까렸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사세가 부득이해서 그렇지, 당시의 학교 분위기가 그랬다. 우리는 당당했고,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동료들도 우호적이었다. 아마 한 해 전에 대다수가 가입했던 평교사회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7월에 들면서 나는 가중되고 있던 정부의 탄압에 항의하는 뜻에서 단식에 들어갔다. 수업하면서 하는 단식은 꽤 힘이 들었다. 한 끼를 걸러도 절절 매는 체질인데 그걸 감행했던 걸 보면 그 당시 나도 한껏 들떠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엔 수업을 하다가 쓰러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퇴근하는 대신 학교 휴게실에서 잤는데, 밤늦게까지 동료들이 곁을 지켜주었고, 학교장은 걸핏하면 밥 먹으러 가자고 나를 설득했다. 사흘째인 토요일에 단식을 접었다. 일요일에도 학교에 남아 있는 것도, 다시 귀가했다가 단식을 이어가는 것도 모양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 1989년 전교조 창립 이후 교사들은 흔히들 이런 형태로 연행되곤 했다.

 교목(校牧)으로 있던 사제가 우리 또래로 매우 개혁적인 이였다. 가끔 우리는 휴게실에서 담배를 나눠 피우며 상황을 공유하기도 했는데, 그가 던진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얼마간 곤혹스러워졌던 걸 기억한다. 그는 왜 재단이 징계를 질질 끌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재단이 참교육이나 전교조의 대의에 대해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천만에요재단이 징계를 늦추고 있는 것은 사제들이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길 꺼리기 때문일 뿐이에요.”

 

공립학교 징계가 마무리되었는데도 한정 없이 징계를 늦추던 재단은 결국 도 교육청의 최후통첩에 손을 들었다. 재단 이사장 임명 승인을 취소하겠다고 얼러도 나 말고도 이사장 할 사람은 많다며 버티던 당시 이사장은 결국 재정결함보조금(정부가 보전해 주던 사학 교원들의 임금)을 끊겠다는 데에 항복했다.

 

징계위는 3차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1·2차는 출석하지 않았고 3차에는 출석했지요.”

“3차에 출석했던가?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네.”

출석했어. 여기 수도원에서 열렸지.”

 

장은 집에서 가져온 보관철에 든 묵은 문서를 뒤적여 징계 의결서나 출석통지서 따위를 보여주었다. 그는 25년 전의 자료들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것이다. 그중에는 초등학교 교감이었던 그의 부친이 보내온 애끊는 부정(父情)의 편지도 있었다. 나도 그때 그 편지를 읽었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궁금해하던 기억이 아련하다.

 

“8 23일에 해임되었으니, 우리는 7월 이전에 해임된 다른 학교 교사보다 한 달 봉급을 더 타 먹은 셈이지요.”

뒤에 헌재에서 사립학교법이 합헌 판결이 나면서 우리가 재단을 상대로 낸 소송을 취하할 수밖에 없었는데, 재단은 그걸 받아들였고요.”

 

한 시절의 옹이와 매듭을 풀다

▲ 수도원과 사제들은 미군기지 고엽제 관련 집회에 적극 결합했다. (2011년) ⓒ<민중의 소리>

 이런저런 그 시절의 얘기가 꼬리를 물었다. 당시 교목 신부님의 안부를 물었더니, 지금 고등학교 교장으로 계신단다. 비로소 지난 25, 그 세월의 더께를 실감한다. 그때 30대 중반의 열혈 청년들이 어느새 예순 전후이니 시간이란 참 모두에게 얼마나 공평한가.

 

식사를 마치고 미사 주로 쓰는 와인을 한 잔씩 마시면서 이야기는 세월호 참사와 고엽제 싸움,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이야기 등을 넘나들었다. 우리는 때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고, 아이들과 함께한 단원고 교사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옷깃을 여미기도 했다. 알게 모르게 모두의 생각이 세상의 변화로 모아지고 있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8시 반쯤 모임을 끝내고 우리는 한 차례 기념촬영을 한 다음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힘주어 손을 잡으면서 아빠스는 반가웠다고, 언제든 찾아달라고 말했고, 우리도 각별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모임을 주선한 친구는 결과에 겨워했고, 우리도 그 점은 다르지 않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왔는데, 진솔하고 정중하게 대해 주니 고맙구먼.”

그래, 이걸로 우리가 지나온 한 시절의 옹이가 풀리는 셈인가…….”

 

어차피 새겨둔 은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25년 전의 대립이 권위주의 시대에 피할 수 없었던 시련이었다면, 오늘 만남은 변화된 시대를 깨우쳐 준 셈이라고 할까. 수도원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건너편에 잠든 학교 건물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나는 이 변화가 여전히 실감나지 않았던 것이다.

▲ 모임을 끝내고 우리는 실내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이걸로 한 시대를 매듭짓게 되는 것일까.

 어저께 뉴스는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국제노총)이 세계 139개국의 노동권 현황을 조사해 발표한 세계노동자권리지수보고서에서 한국이 5등급을 받았다고 전한다. [관련 기사] 5등급은 노동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켜지지 않고,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는 보호받지 못하는 그룹이다.

 

국제노총은 시민 자유, 노조설립, 노조 활동, 단체교섭, 파업권 등 다섯 부문에서 97개의 세부항목을 점검해, 권리 침해 때는 1점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점수를 합산했다고 한다. 한국이 최악의 성적을 받은 것은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등록 거부,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한 것, 파업에 나선 철도노조원 대량 해고, 노조 대상 손해배상 청구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89년 법외노조로 출발한 전교조가 합법노조가 되는 데 걸린 시간은 10, 199971일에 전교조는 합법노조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14년 만인 지난해 10, 고용노동부는 전교조가 해직자를 조합원으로 인정하는 규약을 고치라는 시정명령을 지키지 않았다며 전교조에 법외노조를 통보하였다.

 

이 역사의 퇴행 앞에 우리는 잠시 말을 잃는다. 전교조에서 제기한 법외노조 통보 취소소송에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결과 효력 정지 결정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6월 중순께 본안 소송의 판결이 있으리라고 한다. 어쨌든 이 판결은 역사의 진전이냐, 퇴행이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선택이 될 듯하다.

 

그러나, 정권은 짧고 사람들의 삶과 노동은 영원하다.

 

 

2014. 5. 26. 낮달

 

 아빠스(Abbas) : 라틴어로 아버지를 뜻하며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의 베네딕도 규칙서를 따르는 수도회들과 일부 특정 수도회들에 속한 자치 수도원의 원장을 일컫는 명칭이다. <위키백과>

 

*덧붙임 :

그러고 보니 모레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창립일이다전교조가 25살 성년이 된 것이다길은 멀고 위험은 가득하다진부하지만 새삼 참교육을 부르짖었던 초심을 떠올려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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